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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서울 촌놈 - 최영석

작성년도 : 1999년 412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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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1년 7월 평양에서 국가계획위원회 고위간부로 재직하시던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슬하 3남4녀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외할아버지의 자살사건으로 인해 황해도로 쫓겨났기 때문에 유년시절 대부분을 황해도에서 보냈다. 북한에서는 가족중 자살자가 있으면 반혁명죄, 반당종파분자로 분류돼 불이익을 받는 다. 당시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면 직장에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고통을 감수하며 가족을 지켰다. 나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아버지께 효도를 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사리원 지질대학에 2년간 다니다 군에 입대하여 복무중이던 95년, 존경하던 아버지는 뇌출혈로, 어머니는 원인모를 병으로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특별휴가를 신청하였으나 상부에서는 "김일성 동지의 유훈대로 95년말까지 총 대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며 불허했다.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부모님도 못 만나게 하는 것이 사람 중심의 사회란 말인가?

어느 날 드디어 나는 운명에 도전하는 심정으로 휴전선을 넘었다.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지뢰밭을 걸으며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을 의식하면서 나는 목숨을 걸고 가족들과 헤어지는 이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며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였다. 탈출하는데 걸린 3일은 내 인생의 절반 만큼이나 길고 또 외로웠다.

내가 미지의 세계였던 한국에 와서 처음 느낀 소감은 한국이 그리 낯선 땅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은하수라는 TV드라마를 통해 남한 사람들의 생각과 살아가는 모습을 처 음 보면서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 각종 뉴스를 접하면서 이 사회가 정말 사람이 숨쉬는 곳이구나 하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서울에서의 생활은 북한과 다른점도 많다. 대학 입학식때 나는 깨끗한 양복과 번쩍번쩍 윤이나는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갔다.

북한에서는 획일적인 유니폼 차림을 하기 때문에 남한학생도 유니폼식 정장 차림으로 입학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입학시장에서 똑같은 정장차림을 한 학생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어 당황했다.

또 학기초에 일어난 일이다. 과 동기들이 옆에 앉지 않고 교수님도 나에게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 기이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학과 친구들이 "옷차림이나 행동이 너무 근엄해 학생지도 교수나 경찰로 알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캐주얼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미팅때에도 촌스럼을 면치 못해 여학생들로부터 "삭았다"거나 "노티난다"라는 이야기들을 자주 들어야만 했다. 북에서 보낸 세월의 두께가 나를 서울 촌놈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나는 지금 통일이 되면 선진기술을 북한에 전수시켜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데 초석이 되고자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있다. 훗날 통일이 되면 돌아가신 부모 님의 영전에 엎드려 그동안 통일조국의 기술발전을 위해 노력했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위해 학업에 전념하고 있다.

다가오는 희망찬 21세기를 하나가 아닌 둘로 맞이해야 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 가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 하루빨리 남북의 정계, 재계, 문화계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 이 한걸음씩 물러나서 새로운 통일의 길을 만들어 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램이다.

따뜻한 나라 대한민국에 온 지 벌써 4년, 이제 어느정도 남한사람이 다 되었구가 하는 생각을 하면 북에 두고 온 혈육들을 생각하면 분단 현실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낀다. 말로는 통일을 쉽게 말하면서도 진정한 화해의 움직임을 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1999년 9월 최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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