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방울의 가치를 생각하며 - 임영선
작성년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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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내고향
내 고향은 평양시 대성구역 용흥동! 내 고향은 한 마디로 평양의 명소 대동강이 감돌아 흐르는 모란봉과 용남산을 병풍으로 낀 위엄있는 대 성산 기슭이다. 내 고향이 얼마나 좋은 명소인가를 확신시키는 에피소 드가 있다. 광복후 보통강 기슭에서 살았던 김일성에게 어느 한 역술인이 그 집터는 안좋으니 다른데로 이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사를 안하면 중대한 사건으로 집없이 유랑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얼마후 그 예언대로 6.25 전쟁이 터져 김일성은 근 5년간 집없이 유랑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김일성 지시에 의해 제일 좋은 명당이라고 찾은 곳이 바로 내 고향이고 죽어서도 그 자리를 뜨지 않고 금수산 의사당에 안치되어 있을 정도다.
2. 예쁜 우리 선생님
북한에서는 유치원 교육을 합쳐 11년간 의무교육을 한다. 학창시절중 가장 인상깊은 선생님은 인민학교때 담임으로 다른 여선생보다 훨씬 예뻤고 그래서 따라 다니는 별명도 많았고 헛소문 또한 많았다. 그 중 가장 관심이 높은 것은 폭력배로 밤낮없이 우리 학교주변을 서성거리 며 선생님 행방을 묻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늘 학교 밖으로 나가려면 여기 저기 밖을 주시하다가 재빨리 행동해야 했다. 어느날 교장선생님이 날 부르더니 "네 형을 데리고 와"라고 했다. 다음날 복도에서 형님의 뒷 모습을 보았는데 그날 초저녘 우리 학교 마당에서 는 사건이 터져 날마다 빈둥거리던 폭력배들에게 철퇴가 내려졌다. 내가 부모님보다 더 무서워하고 존경하는 맏형이 저런 폭력배들을 거 느리고 다닌 깡패두목이란 말인가? 밥 먹을 때 숟갈소리도 내지 말라 고 눈도끼를 보내고 학교갈 때 부모님에게 인사를 멀쩡히 해도 몇 번씩 반복시키던 가정의 정직과 질서의 화신인 형님이 폭력배 우두머리라니... 잠시후 안전원(경찰)들이 들이닥쳤고 형님과 그의 돌격대원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혹시 누가 고발하면 큰일이라 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다음날부터 우리학교에 는 한명의 폭력배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우리 선생님의 얼굴에도 밝은 빛이 살아났다. 1년후 예쁜 선생님이 김일성대학 교수님과 결혼했다 는 소리를 들었다.
3. 돌격준비와 도토리
그렇게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아버지가 평양 체육관을 지으면서 받아야할 영웅칭호를 아첨쟁이가 가로채자 노동 당에 정면으로 반발한 것이 화근이 되어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추방되 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분을 삼키다 운명을 다했다. 노동당에 불만을 가진 집안 자식들은 군입대가 되지 않는데 교장선생님의 특별 추천으 로 다행히 17살인 80.8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 산골에서는 옥수수 와 감자만을 먹으며 살았지만 군대에서는 쌀과 밀이 섞인 밥을 주는데 꿀맛이었다. 먹기 힘들었던 과일도 군대에서는 가끔 먹어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군대에서도 배고픔은 여전했다. 전술훈련의 날이었다. 돌격준비하라는 상관의 명령이 하달되면 병사 들은 신발끈을 조이고 장구류들을 휴대하며 총창을 꼽고 뛰쳐나갈 준 비를 하고 "우로 전달 돌격준비 끝"이라고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 리 기다려도 준비를 끝마쳤다는 보고가 없자 소대장이 참호 위로 머리를 올려 살펴보고는 입을 벌린채 말을 못했다. 참호속에 은폐하고 돌격준비를 끝냈어야할 병사들이 낮은 도토리나무에 열린 도토리를 따 주머니에 넣느라고 정신이 없는 것이다. 소대장은 엉겁결에 "돌격 준비 그만, 도토리 채취"라고 외쳤다. 나는 돌격준비 대신에 따모은 도토리를 날 것으로 먹었다
4. 지하비행장
남한사람들은 북한인들이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모습을 접할 때마 다 가슴 아파한다. 반면에 호전적인 군사퍼레이드나 훈련모습을 보면 서 의아심을 감추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13년가 복무한 부대 는 인민군 군사건설국이다. 이 부대의 주요임무는 중요 전략기지들을 극비리에 건설하여 전문부대에 넘겨주는 것이다. 3개의 부서로 나누 어 건설을 진행하는데 공장건설부,공군건설부,해군건설부이다. 현재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중요 군사기지는 핵시설,미사일 발사장,최첨단 전파 탐지기실 등을 지하에 설치하는 것이다. 지하시설의 건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땅굴속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안전시설에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다. 또한 건설도중에 사고로 죽은자는 "전사자증"이란 종이조각과 얼마간의 식량과 옷감 따위 를 위로품으로 주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모순과 갈등 속에 반동가족 이라는 성분으로 인해 출세의 한계를 느끼면서 나는 무작정 북한을 떠나 93.8 아버지의 고향으로 찾아들었다.
5. 소주 한 병에 얽힌 에피소드
서울이 풍요와 변화, 창조의 도시라고 할 때 평양은 조용한 정적이 감 도는 전시관을 연상시킨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로 오면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승용차의 물결과 곳곳의 사람들, 외국영화에서나 본 듯한 풍 요로움에 깜짝 놀랐다. "여기가 정말 우리 민족이 사는 우리 나라일까 ?" 믿어지지 않았다. 더욱 놀란 것은 며칠후 동네 수퍼에 갔을 때였다. 가게 안에 꽉 들어찬 물건들은 무엇이 먹는 것이고 쓰는 것인지 알 수 가 없었다. 평양에서는 이런 물건을 사려면 미국이나 일본돈이 있어야 한다. 나는 무슨 물건을 고르면 좋을지 몰라 당황스럽고 얼굴이 빨개 져서 망설이다 급히 소주 한병을 집어 들었다. 이유는 내가 아는, 눈에 익숙한건 오로지 소주였기 때문이다.
6. 새로운 희망
94.9 나는 북한의 군대경험을 살려 우리나라의 대기업 건설업체에 입사하였다. 회사 분위기는 일 절반 잡담 절반으로 일하는 북한과는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말없이 얼마나 열심히 일 하는지 말 한마디 걸 기가 주눅들 정도였다. 북한에서는 제법 건축실무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도면은 이해가 됐지만 해설은 거의 영어로 되어 있어 눈 뜬 장님신세였다.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과감하게 oo변전소 건설 견적을 맡겨 버렸다. 나는 죽을 각오로 작업에 착수했으나 너무 몰랐 다. 빈번한 질문에 처음에는 친절하게 가르쳐주던 선배들도 지쳐 버렸다. 자기 일에 능숙한 동료들이 매일 생일이라고 한잔, 스트레스 쌓인다고 한잔 하면서 술을 마셔대는데 빠질 수가 없었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빨라도 자정이었다. 방금 눈을 붙 인 것 같은데 벌써 자명종이 귀를 찌른다. 실컷 잠이나 자보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푸짐하게 주는 회사의 점심은 피곤에 지친 나를 잠으로 몰고 갔다. 10분만 잤으면... 비록 몸이 피곤할 망정 내게는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고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날 북녘 가 족이 있기에 희망을 갖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힘차게 헤쳐 나갈 것 이다. 통일의 그날을 위해 열심히.....
1999.5 임영선 씀
내 고향은 평양시 대성구역 용흥동! 내 고향은 한 마디로 평양의 명소 대동강이 감돌아 흐르는 모란봉과 용남산을 병풍으로 낀 위엄있는 대 성산 기슭이다. 내 고향이 얼마나 좋은 명소인가를 확신시키는 에피소 드가 있다. 광복후 보통강 기슭에서 살았던 김일성에게 어느 한 역술인이 그 집터는 안좋으니 다른데로 이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사를 안하면 중대한 사건으로 집없이 유랑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얼마후 그 예언대로 6.25 전쟁이 터져 김일성은 근 5년간 집없이 유랑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김일성 지시에 의해 제일 좋은 명당이라고 찾은 곳이 바로 내 고향이고 죽어서도 그 자리를 뜨지 않고 금수산 의사당에 안치되어 있을 정도다.
2. 예쁜 우리 선생님
북한에서는 유치원 교육을 합쳐 11년간 의무교육을 한다. 학창시절중 가장 인상깊은 선생님은 인민학교때 담임으로 다른 여선생보다 훨씬 예뻤고 그래서 따라 다니는 별명도 많았고 헛소문 또한 많았다. 그 중 가장 관심이 높은 것은 폭력배로 밤낮없이 우리 학교주변을 서성거리 며 선생님 행방을 묻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늘 학교 밖으로 나가려면 여기 저기 밖을 주시하다가 재빨리 행동해야 했다. 어느날 교장선생님이 날 부르더니 "네 형을 데리고 와"라고 했다. 다음날 복도에서 형님의 뒷 모습을 보았는데 그날 초저녘 우리 학교 마당에서 는 사건이 터져 날마다 빈둥거리던 폭력배들에게 철퇴가 내려졌다. 내가 부모님보다 더 무서워하고 존경하는 맏형이 저런 폭력배들을 거 느리고 다닌 깡패두목이란 말인가? 밥 먹을 때 숟갈소리도 내지 말라 고 눈도끼를 보내고 학교갈 때 부모님에게 인사를 멀쩡히 해도 몇 번씩 반복시키던 가정의 정직과 질서의 화신인 형님이 폭력배 우두머리라니... 잠시후 안전원(경찰)들이 들이닥쳤고 형님과 그의 돌격대원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혹시 누가 고발하면 큰일이라 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다음날부터 우리학교에 는 한명의 폭력배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우리 선생님의 얼굴에도 밝은 빛이 살아났다. 1년후 예쁜 선생님이 김일성대학 교수님과 결혼했다 는 소리를 들었다.
3. 돌격준비와 도토리
그렇게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아버지가 평양 체육관을 지으면서 받아야할 영웅칭호를 아첨쟁이가 가로채자 노동 당에 정면으로 반발한 것이 화근이 되어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추방되 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분을 삼키다 운명을 다했다. 노동당에 불만을 가진 집안 자식들은 군입대가 되지 않는데 교장선생님의 특별 추천으 로 다행히 17살인 80.8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 산골에서는 옥수수 와 감자만을 먹으며 살았지만 군대에서는 쌀과 밀이 섞인 밥을 주는데 꿀맛이었다. 먹기 힘들었던 과일도 군대에서는 가끔 먹어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군대에서도 배고픔은 여전했다. 전술훈련의 날이었다. 돌격준비하라는 상관의 명령이 하달되면 병사 들은 신발끈을 조이고 장구류들을 휴대하며 총창을 꼽고 뛰쳐나갈 준 비를 하고 "우로 전달 돌격준비 끝"이라고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 리 기다려도 준비를 끝마쳤다는 보고가 없자 소대장이 참호 위로 머리를 올려 살펴보고는 입을 벌린채 말을 못했다. 참호속에 은폐하고 돌격준비를 끝냈어야할 병사들이 낮은 도토리나무에 열린 도토리를 따 주머니에 넣느라고 정신이 없는 것이다. 소대장은 엉겁결에 "돌격 준비 그만, 도토리 채취"라고 외쳤다. 나는 돌격준비 대신에 따모은 도토리를 날 것으로 먹었다
4. 지하비행장
남한사람들은 북한인들이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모습을 접할 때마 다 가슴 아파한다. 반면에 호전적인 군사퍼레이드나 훈련모습을 보면 서 의아심을 감추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13년가 복무한 부대 는 인민군 군사건설국이다. 이 부대의 주요임무는 중요 전략기지들을 극비리에 건설하여 전문부대에 넘겨주는 것이다. 3개의 부서로 나누 어 건설을 진행하는데 공장건설부,공군건설부,해군건설부이다. 현재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중요 군사기지는 핵시설,미사일 발사장,최첨단 전파 탐지기실 등을 지하에 설치하는 것이다. 지하시설의 건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땅굴속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안전시설에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다. 또한 건설도중에 사고로 죽은자는 "전사자증"이란 종이조각과 얼마간의 식량과 옷감 따위 를 위로품으로 주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모순과 갈등 속에 반동가족 이라는 성분으로 인해 출세의 한계를 느끼면서 나는 무작정 북한을 떠나 93.8 아버지의 고향으로 찾아들었다.
5. 소주 한 병에 얽힌 에피소드
서울이 풍요와 변화, 창조의 도시라고 할 때 평양은 조용한 정적이 감 도는 전시관을 연상시킨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로 오면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승용차의 물결과 곳곳의 사람들, 외국영화에서나 본 듯한 풍 요로움에 깜짝 놀랐다. "여기가 정말 우리 민족이 사는 우리 나라일까 ?" 믿어지지 않았다. 더욱 놀란 것은 며칠후 동네 수퍼에 갔을 때였다. 가게 안에 꽉 들어찬 물건들은 무엇이 먹는 것이고 쓰는 것인지 알 수 가 없었다. 평양에서는 이런 물건을 사려면 미국이나 일본돈이 있어야 한다. 나는 무슨 물건을 고르면 좋을지 몰라 당황스럽고 얼굴이 빨개 져서 망설이다 급히 소주 한병을 집어 들었다. 이유는 내가 아는, 눈에 익숙한건 오로지 소주였기 때문이다.
6. 새로운 희망
94.9 나는 북한의 군대경험을 살려 우리나라의 대기업 건설업체에 입사하였다. 회사 분위기는 일 절반 잡담 절반으로 일하는 북한과는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말없이 얼마나 열심히 일 하는지 말 한마디 걸 기가 주눅들 정도였다. 북한에서는 제법 건축실무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도면은 이해가 됐지만 해설은 거의 영어로 되어 있어 눈 뜬 장님신세였다.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과감하게 oo변전소 건설 견적을 맡겨 버렸다. 나는 죽을 각오로 작업에 착수했으나 너무 몰랐 다. 빈번한 질문에 처음에는 친절하게 가르쳐주던 선배들도 지쳐 버렸다. 자기 일에 능숙한 동료들이 매일 생일이라고 한잔, 스트레스 쌓인다고 한잔 하면서 술을 마셔대는데 빠질 수가 없었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빨라도 자정이었다. 방금 눈을 붙 인 것 같은데 벌써 자명종이 귀를 찌른다. 실컷 잠이나 자보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푸짐하게 주는 회사의 점심은 피곤에 지친 나를 잠으로 몰고 갔다. 10분만 잤으면... 비록 몸이 피곤할 망정 내게는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고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날 북녘 가 족이 있기에 희망을 갖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힘차게 헤쳐 나갈 것 이다. 통일의 그날을 위해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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