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나’와 탈북 - 박세준
작성년도 :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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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나’와 탈북
- 박세준
고향을 떠난 지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다.그 누구나 봄에 대한 추억은 있다. 나 역시 해마다 맞고 보내는 봄이지만 봄철이 오면 인생의 감회 속에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수많은 스토리를 엮곤 한다.벌써 대한민국에 입국해서 맞는 다섯 번째 봄이다. 북에 있는 나의 어머니도 따스한 봄철의 기운을 느끼고 있겠지만 언제 만날지 모르는 이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의 날을 보내고 있으리라.나는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생활하는 과정에 나의 남행길이 결코 북에 두고 온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에게 대한 배반과 반역의 길이 아니라 애국과 사랑의 길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가장 성공한 인생은 자기 자신의 삶의 가치를 올바로 느꼈을 때라고 생각한다. 남한에서의 5년은 나의 인생에서 거짓과 진실을 깨우치고 강요된 삶이 아니라 자기의 진정한 삶을 찾은 나날이기도 하다.북에서 살면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을 키웠지만 남행길을 결심하는 순간 치열한 자본경쟁의 사회에서 자신이 과연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도 없지 않았다.2007년 12월 10일은 나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날이다. 이날이 바로 북한을 등지고 탈북을 단행한 날이다.칠칠야밤에 북한군 국경경비대 장교의 안내를 받으며 12살 어린 아들을 목마 태우고 검푸른 두만강에 뛰어들던 그날로부터 어연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가족을 데리고 중국을 거쳐 베트남과 라오스, 태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목숨을 건 모험을 단행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긴장감으로 식은땀이 나고 소름이 끼칠 때가 많다.남행길을 결심하기까지의 심리적 고충과 고뇌를 어떻게 짧은 수기 한편에 다 실을 수가 있으랴만 탈북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심이었고 모험이었다.북한사회에서 나는 군인가정에서 나서 자라 그래도 부모님의 좋은 배경으로 생활의 어려움이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고 전문대와 군복무, 대학과정을 거쳐 비교적 안정적이면서도 순탄한 성장코스를 밞았다.학창시절 학생간부는 당연했었고 군에서도 22살 어린 나이에 부대의 같은 또래들보다 제일 먼저 노동당에 입당하여 화려한 당 생활 경력을 보유했다.이와 같은 경력과 학력으로 왜 그 사회를 등지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한다.90년대 중반과 후반기 탈북자들의 대다수가 어려운 경제난으로부터 생계형 탈북을 결심했지만 최근의 탈북자들은 북한 정부에 대한 환멸과 함께 남한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기획 탈북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내 인생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이다.군복무를 하던 나는 그때 한국에서 올림픽경기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선인민군 신문에 “남조선괴뢰도당의 올림픽개최는 분열을 추구하는 매국적 행위이다”는 논설이 실리고 그 논설에 대한 독보모임이 있었는데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그저 올림픽이라는 그 말이 귀전을 맴돌면서 넋을 잃어버렸다.북한주민들의 경우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달라진 동기가 88올림픽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식민지로 사람 못살 불모지로 형상하고 거지떼가 욱실거린다던 한국에서 세계적인 대축제를 진행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남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는 충분하였다.물론 그 전에 TV를 통해 시위를 진행하는 남한주민들의 옷차림이나 고충건물들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은 여러 번 했지만 결정적 계기는 이때였다. 94년 군에서 전역하고 사회대학 학생으로 사회생활을 접해보니 사회는 군부보다 남한에 대한 동경과 환상이 더 농후하였다.88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주민들 속에서 한국에 대한 호기심은 싹텄고 결국 ‘한국바로알기 운동’이 벌어졌다. 시장에서 소형라디오들이 부리나케 팔렸고 이 소형라디오들은 불 없는 어두운 집안의 이불안에서 아주 조용히 한국을 알리기 시작하였다.한국정보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욕구는 귀에서 눈으로 업그레이드 되어갔다. 국경연선의 밀수꾼들은 한국 드라마로 떼돈을 모았다. 나 역시 이 한류열풍에 동조하여 죽을 먹으면서도 아깝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돈을 엄청 날렸다.이렇게 라디오방송청취와 드라마,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북한과 너무나 다른 한국, 북한사회가 나에게 가르쳤던 남조선과 너무나 다른 대한민국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속담에 “재미난 곳에 범이 난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드라마에 도취되어 경계심을 잃어버린 탓에 고만에 감시망에 걸려들었다.드라마 시청에 동참했던 6명의 교사들이 보위부의 조사를 받았다. 외국드라마도 아니고 남조선 드라마 건이라 무사치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아버님이 물려준 40년의 군복무 대가의 선물TV와 힘든 생활난 속에 어렵게 마련한 VCD기, 경대가 시장으로 나갔다. 이렇게 마련된 돈이 위력을 발휘했다. 감옥행이 좌천 행으로 바뀌었던 것이다.그때 동료들은 “죽는 것 보다 까무러치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며 교단에서 노동 현장으로의 좌천을 서로가 격려했던 생각이 난다.나는 이렇게 되어 함경북도 화성군에 위치한 어랑천 발전소 현장 노동자로 좌천되었다.인생의 모든 것을 잃고 현장에 내려왔지만 마약 중독자마냥 한국에 대한 호기심은 없어지지 않았다. 드라마 속의 대한민국은 너무나 믿기 어려운 사실을 전하고 있었지만 꿈이었고 생의 목표였던 교단에 다시는 갈 수 없다는 절망의 사나이에게는 뭔가를 시사해주고 있었다. 분노와 울분을 터트릴 수도, 그 어떠한 의사표현이나 불만표출도 할 수 있는 사회, 그런 것이 절절했던 나에게 한국은 동경의 대상에서 기어이 밞아보고 싶은 목표로 다가왔다.하지만 부모님들의 한생이 어려 있고 선조의 뼈가 묻힌 고향을 버리고 인생의 탈바꿈을 하는 것은 나 하나의 절박감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또 드라마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남한사회를 보면서도 어릴 적부터 주입된 남한사회의 교육효과 때문인지 갈등과 모순이 가득한 자본사회라는 비판적 견해가 언제나 함께 공존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의 갈등은 자본사회의 불공평성과 계급적 모순에 대한 북한의 세뇌교육으로 굳어진 인식이었다.내가 사회주의 이념이 헛된 것이고 분명 무언가 잘못 굴러간다는 의심과 함께 북한정부에 대한 증오와 환멸을 느낀 것은 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였다.고난의 행군을 겪은 세대라면 누구나 느끼고 체험해본 일이지만 나 역시 무서운 공포와 갈등의 고뇌를 겪었다. 한국을 몰랐을 때는 이 모든 것이 주어진 운명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정치를 잘못한다고 김일성을 빗대어 김정일만 욕을 했다. 하지만 한국을 보면서 우리가 뭔가 잘 못 알고 누구에겐가 속고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인민에 대한 ‘위민이천’의 허울정치로 정권의 야심가로 절락된 북한의 지도부를 바라보면서 탈북이라는 새로운 인생목표를 설계할 때 정말 많은 것이 부담스럽고 힘겨웠다. 한생을 김일성, 김정일의 충신으로 사회주의 이념의 철저한 옹호자로 살아오신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함께 형제와 일가친척들의 앞날에 드리울 어두운 장막으로 마음이 괴로웠다.2007년 12월 3일 북한을 떠날 결심은 굳혀졌지만 기약할 수 없는 생사기로의 길임을 알았기에 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내와 함께 홀로 계신 어머니를 뵙기 위해 고향에 다녀왔다.자주 뵙는 어머니의 얼굴이었지만 이 날만은 어머니의 모습이 남달리 측은해 보이셨고 자식으로서 어머니를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것 같은 죄스러움에 눈물이 앞을 막았다.그때 어머니께서 왜 자꾸 눈물을 흘리느냐고 하시기에 그저 너무 일찍이 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서 그런다고 나의 속마음을 감추던 그 순간이 이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어머니! 설날에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앓지 마세요.”라는 인사말을 남겼지만 나의 심장은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아들의 길을 축복해 주세요)라며 피눈물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이렇게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북한의 국경도시 회령시에 도착한 것은 2007년 12월 7일이었다.탈북의 길은 처음부터 심장을 옥죄이고 가슴이 떨리는 나날이었고 순간순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삶과 죽음의 계곡이었다.12월 10일 아들과 함께 살을 에우는 차디찬 강물에 들어서면서 언뜻 이런 생각을 했었다. 강을 건너보지도 못하고 물속에서 심장이 멎지 않을까? 하지만 아내와 아들, 그리고 나의 심장은 다행히 뛰고 있었다.강만 건너면 있다던 중국의 브로커는 보이지 않았다.숲에 숨어 이렇게 조금만 있으면 얼어 죽을 것 같았다.나는 아들과 아내의 손목을 잡고 숲을 헤쳐 불빛이 보이는 중국의 민간마을을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손발이 얼어들고 속이 떨려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걸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우리가 2시간 정도 헤매며 도착한 것은 중국의 용정시 삼합마을이라는 국경 인접의 중국마을이었다.탈북자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태도는 냉랭하였다. 탈북자들을 보호해주고 도와준 것이 죄가 되어 손해를 입은 동네사람들이 여럿이 된다고 한다.몇 집을 돌며 도움을 청하다가 다행히 인심 좋은 중국인 집을 만나 핸드폰을 빌릴 수가 있었다. 그 집에서 몸을 녹이면서 2시간가량 지나니 브로커가 나타났다.국경지형에 대한 파악이 부족한데도 있지만 밤길이다 보니 브로커와 만날 장소를 찾지 못하여 생긴 불찰이었다.우리 가족은 이렇게 중국 땅에 첫 발을 디뎠다.중국 연길시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다음날 태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브로커의 요구에 따라 연길의 한 시장에 나가 중국식 옷차림과 머리단장을 하는 등 여행준비를 다그쳤다.우리를 국경에서부터 연길까지 안내한 브로커는 최씨 성을 가진 40대 중반의 중국인 조선족이었다. 나는 그를 ‘최형’이라고 불렀고 그는 중국식으로 나를 ‘아우’라고 불렀다.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많은 탈북자들이 남행길에 실패하고 북송되었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 길은 성공을 장담 할 수 없는 극적인 모험의 길임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특히 북한에 있을 때 한국행을 하려던 가족도주자들을 정치범 관리소로 이송했다는 소문도 많이들은 터라 마음의 불안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시장에서 옷가지들과 세면도구들을 비롯한 여행에 필요한 용품들을 사고 난 후 나는 최형을 조용히 불러 부탁하였다.“최형. 싸이나 아시죠? 꼭 필요해서 그러니 한 통만 부탁 합시다”고 했다.‘싸이나’는 염산가리라고 하는 금속재료 분석과 금 채취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인데 독성이 강해 조금만 먹어도 즉사하는 독약이다.북한에서는 국경밀수꾼들을 통해 불법으로 구입하거나 금속연구소에서 모래 빼내어 꿩을 비롯한 날 짐승을 사냥하는데 사용하군 한다. 북한의 시장들에서도 암거래로 밀매되기는 하지만 발각이 되면 징역형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중범죄로 취급된다. 북한의 북부도시 청진시 수남 시장에서는 수지연필 속대를 넣는 통 크기의 싸이나가 북한돈 7만원에 거래되었다. 그 때 시가대로라면 중국 위안으로 200원인 셈이다.북한에서는 산 짐승이나 날 짐승을 잡아 생계를 연명하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이 싸이나를 구입하여 사냥에 사용하군 한다. 껌을 씹다가 얇게 펴고 거기에 콩알 크기의 싸이나를 싸서 고기나 생선에 숨기고 개나 돼지에게 먹이면 입에 들자마자 거품을 쏟으며 쓰러지는 강한 독성으로 하여 맹수사냥에 널리 사용하군 한다. 또한 고체 싸이나를 물에 희석하여 그 물에 두부콩을 담가 불긴 다음 그 콩을 다시 꺼내서 말린 다음 콩 밭에 뿌리고 꿩과 비둘기를 사냥한다.최형은 내가 무엇 때문에 그 약을 요구하는지 알아채는 눈치였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나?”하고 그는 물었고 나는 “최형도 북한을 잘 알지 않습니까?”고 반문하였다. 시장에서 싸이나의 가격은 위안 60원이었다.이렇게 되어 나는 싸이나를 구입하는데 성공하였고 만약 가다가 잡혀 북송되는 경우 차라리 이 약을 먹고 죽을 결심을 하였다. 나의 결심에 아내는 동의하였지만 아들까지 사용하는 것은 결사 반대였다. 아내는 자식에게 너무 잔인한 처사이고 설사 잡혀서 아들이 북송된다고 해도 부모의 강요대로 움직인 것으로 하여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주장으로 나를 설복했다.이렇게 되어 나와 아내는 싸이나를 옷깃에 바늘로 꿰매고 길을 떠났다.하지만 이 약의 휴대가 내 운명에 어떤 비극적인 일을 가져 올 것인가 하는 것은 그때로서는 알지 못하였다.우리가족은 브로커가 정해준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부터 한국행의 머나먼 장정을 시작하였다.오직 중국 땅이라는 것만 알았지 우리를 언제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에 타라면 타고 걸으라면 걷고 숨으라면 숨었다.브로커들은 일정구간 간격으로 연속으로 우리를 인계인수하며 10여일 만에는 중국의 국경을 넘어 베트남과 라오스를 거쳐 태국까지 우리 가족을 옮겨놓았다.기나긴 여행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며 우리는 태국의 국경도시 시안마이에 도착하였다.시안마이에 도착한 우리는 이미 한국에 있는 브로커와의 약속대로 핸프폰카드를 구입하여 전화통화를 했다. 브로커는 전화로 태국에서 우리가 할 일들을 알려주었다. 또한 북한에서 탈북자 체포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도 있으니 주의도 당부했다.브로커의 지시대로 우리는 태국의 수도 방콕행 버스에 올랐다. 5시간 정도 달렸을 때 검문소 하나가 나타났다. 버스에 올라온 경찰관은 승객을 들러보더니 우리가 앉은 좌석으로 다가와 태국말로 말을 건넨다. 무언부답이자 경찰은 버스에서 내리라고 손짓한다.이렇게 되어 우리는 경찰에게 단속되었고 검문소 안으로 들어가 몸과 짐 수색을 당하였다. 배낭과 가방수색을 마친 경찰들은 옷을 벗기고 옷들을 검사하기 시작하였다.순간! 옷깃에 숨긴 싸이나를 빨리 없애지 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태국에 들어서서도 옷깃에 매달린 싸이나를 만져보았었다. 허나 브로커의 말대로라면 여기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이 못 된다는 판단에 싸이나를 없애지 않았다.한 경찰이 나의 웃옷 속에 숨겨져 있는 싸이나를 발견하였다. 싸이나는 껌을 녹여 감싸고 우에 미역으로 포장하였었다. 그 경찰은 바늘로 깁아 맨 미역을 조심히 헤치고 녹인 껌 포장을 벗겼다.나는 저도 모르게 “독약입니다”라고 한국어로 소리를 치며 경찰에게 다가섰다. 옆에 있던 경찰이 권총을 꺼내고 격발기를 당기며 물러서라고 턱을 저었다. 총구를 보는 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그런데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경찰은 고체분말의 싸이나가 마약인줄로 알았던지 코에 대고 냄새를 맡더니만 맛까지 볼 참이다.이 순간을 놓치면 경찰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몸을 날려 경찰의 손목을 후려쳤다. 다행히 경찰의 손에서 싸이나는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지만 옆에 있던 경찰들이 무리로 달려들어 나에게 물매를 안겼다. 바닥에 넘어져 날아오는 군화에 불꽃을 날렸다.아내와 아들은 울며 소리를 친다. 결혼 15년에, 또 12살 난 아들애 앞에서 볼 것 없이 처참하게 매를 맞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잊혀 지지 않는 순간인 것 같다.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뒹굴며 군화 발에 채이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 순간에 나의 몸은 만신창이 되어 버렸다. 옆에서 아내와 아들이 발버둥을 치며 말렸지만 경찰들은 막무가내였다. 앞 이발 두 대가 부러졌고 눈두덩이 금시에 부어올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경찰 두 명이 나를 결박하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책상 밑으로 떨어진 싸이나를 경찰들이 찾고 있었다.나는 순간 태국에서 영어소통이 가능하다는 브로커의 말이 생각나 서투른 영어로 소리를 질렀다. “돈트 잇, 율 라이” 그랬더니 경찰이 “오케이”하면서 나를 보고 영어를 아는 가고 영문하는 것이었다. 간단한 영어 대화정도는 가능했지만 싸이나의 약품을 설명하기에는 나의 영어실력이 너무 바닥이었다. 경찰들은 서로가 무슨 대화를 하고 나서 전화를 걸었다.1시간 정도 지나서 신사복 차림의 사람이 나타났는데 들어서면서 “안녕하세요?”하고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태국에 건너와 선교를 하고 계시는 목사님이라고 한다. 언어 구사가 안돼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몰이 매를 맞은 나는 그 목사님의 손목을 잡고 울고 울었다.목사님의 통역으로 경찰과의 담화가 시작되었고 약의 진의가 밝혀졌다.담화가 끝난 시간은 새벽 2시 경이었다. 우리 가족은 경찰서 차량으로 이송되었고 나는 병원으로, 아내와 아들은 지방에 있는 수용서로 갔다.이렇게 되어 나는 태국에서 한 달 반가량 뜻하지 않은 입원생활을 하게 되었고 부러진 이발을 뽑고 가공 이를 하게 되었다.지금도 가끔 칫솔질을 하면서 그때일이 생각나 몸서리가 처질 때가 있다.당시 태국 수용소 생활을 하며 태국의 마약범들과 마약중독자들이 급증으로 정부의 비상대책이 강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특히 외국인 마약사범을 색출하기 위한 비상경계령이 수시로 내려진다는 것이다. 경찰들에게는 마약 단속에 불응하는 밀매업자들은 현장에서 사살해도 무방하도록 법적 권능이 주어졌다고 한다. 결국 그 순간 태국 경찰에게 있어서 나는 분명 마약 밀매업자였고 경찰의 마약단속에 불응한 ‘마약사범’이었던 것이다.참 다행스러운 것은 경찰이 들고 있는 총구에서 탄알이 발사되지 않은 것이고 그나마 금방 한국인 목사님이 와서 오해가 해결된 것이라는 생각을 애써 가져본다. 그때 경찰서에서도 입원한 나에게 여러 번의 면회도 왔고 사과도 하였다.나를 통역해준 목사님도 병원에 면회를 왔었다. 목사님은 나에게 본인의 국적이 현재는 불투명하고 난민수용소에 가기 전에 발생한 일이어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불리하다고 하셨다. 지금까지 ‘인권’이라는 말을 나에게 처음으로 해주신 분이 바로 태국의 임 목사님이시다.북한에 있을 때 정치인들이 가끔 사용하는 인권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쓰일 만큼 자신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목사님께 물었다.“내가 대한민국 국민이었으면 어떻게 됩니까?”목사님은 이렇게 답해주셨다.“그렇다면 정부에서 가만있지 않죠. 국가는 국내에 있는 국민이던 국외에 있는 국민이던 보호할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그때 목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의미 깊은 말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북한의 공식 국적을 가지고 해외에 나와 이런 일을 당했다면 북한에서 어떻게 했을지 하는 생각을 해보았을 뿐이다.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인민을 저버린 북한정부에 너무나 가당치 않을 생각이지만 국적 없는 유랑민족의 설움에 겨워 떠올린 생각이었다.목사님의 말을 들으며 설마 했던 생각이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생활하면서 거짓 없는 사실임을 느꼈고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감과 의무감의 깊이를 새삼 느끼고 있다.북한에 있으면서 해외에 나가 있는 북한주민들에 대한 뉴스를 거의 듣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공적이던 사적이던 해외에 나가있는 국민들에 대한 인권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탈북자들에 대한 북한 정부의 입장을 놓고 보아도 야만적인 북한의 인권상황을 알 수 있다. 탈북주민을 강제로 북송하여 교양 개조한다는 국가의 명분이 있다면 응당 탈북 주민들의 인권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목사님의 말씀이 맞았다. 방콕에 올라와 탈북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보다 더 심한 고충과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에서 라오스에서,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북한인들은 인권유린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으며 고향은 있어도 진정한 조국이라 불러볼 나라가 없는 탈북난민들의 운명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죽을 각오로 휴대했던 싸이나로 인해 억울하고 분한 치욕의 순간을 겪은 나는 싸이나를 버린 그 순간이 있어 새 삶의 희열과 목표를 찾았다.하지만 북녘의 동포들은 내가 선택한 싸이나가 아닌 보이지 않는 싸이나에 여전히 치욕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싸이나가 바로 김정은과 북한의 독재권력 집단이다.나라를 잘 못 만난 탓에, 정치인을 잘못 만난 탓에 생겨난 탈북자들의 인권상황, 이는 누구든 꼭 책임져야만 하고 반드시 해결 되어야 할 문제이다.유린되고 짓밟힌 북한주민들의 인권침해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며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나는 비록 싸이나를 지니며 모진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오늘의 자유를 얻었지만 하루속히 북한주민들도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한다.
2012년 5월 박세준
2012-11-29 04:08:54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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