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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고향에 대한 생각이 사무칠수록 - 김봄빛

작성년도 : 2004년 51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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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대한 생각이 사무칠수록

- 김봄빛

 

 

고향에 대한 생각이 사무칠수록

 

프롤로그 : 불효자의 모습으로

 

내가 태어난 곳은 함경북도의 어느 산골 마을입니다. 평양에서 살던 우리 가족이 함경도 끝자락까지 가게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신 아버지의 직장배치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성장한 우리 형제자매는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모두들 대학으로 진학하였습니다. 미래의 경제학자, 직업혁명가, 건축가를 꿈꾸며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 곁을 떠나 각자의 학교가 있는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여태까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94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자책감이 가슴속의 멍울로 남아 어머니께만은 이산의 한을 안겨 드리지 않으려 했건만 운명의 끈은 저를 또다시 불효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불효자가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글을 씁니다. 당신께서 제가 잘 정착하고 있는 것을 아신다면 틀림없이 기뻐하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인큐베이터에서

 

2002년 겨울, 남편과 두 아이들을 데리고 저는 기회의 땅, 한국으로 왔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와 보이는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디며 저는 결심했습니다.

 

사랑하는 내 새끼들을 정치범 수용소냐 한국행이냐의 사생결단의 처지로 내몰면서까지 온 이 땅에서 기필코 성공하고야 말리라!”

 

대성공사에 있으면서 인큐베이터라는 생소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여기저기 물어보곤 하였는데 그 말의 뜻을 안 순간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다름 아닌 인큐베이터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따뜻한 어머니의 몸에서 나와 험한 바깥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아직 부족한 갓난아기들을 위해 인큐베이터가 있듯이, 북에서 대학을 나왔건 무엇을 했건 간에 한국 땅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한국사회의 갓난아기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정부에서 인큐베이터를 만들었구나 생각하니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도 쉽게 넘겨버릴 수 없었으며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나가기로 하였습니다.

 

특히, 저는 북한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마다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한국경제 읽기등 경제에 관한 서적들을 많이 읽으면서 자본주의라는 한국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려 노력했습니다. 수십 년을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젖어 있다가 전혀 새로운 경제체제를 배워나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하나 배워나갔습니다.

 

하나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들은하나원에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다고 회상하지만 저는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어 하루 일분 일초가 그렇게 아까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타자연습, 외래어 공부, 기초소양 공부 등을 해나갔습니다. 심지어는 남편을 학습 경쟁자로 삼아 누가 더 많이 공부했는지 내기도 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사회 정착을 위한 인큐베이터 생활을 마치고 이제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험한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첫 직장의 실패를 뒤로하고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서 한국사회에 처음으로 잡은 직장은 아는 분의 소개로 들어간 카센타 경리직이었습니다. 면접을 할 때는 과연 합격이 될까 반신반의하였으나 며칠 후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남편을 부둥켜안고 기뻐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처음 제 생각은 이곳에서 2년 정도 있으면서 한국사회도 파악하고 자본주의의 기업운영방식도 배우면 되겠다고 생각하여 큰 부담없이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장님과 동료들이 고마워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침에 제일 먼저 출근하고 동료들에게 커피도 타주었으며 아무도 하지 않는 화장실 청소도 도맡아 하면서 나름대로 회사에 적응하려고 하였으나 한국사회의 벽은 여전히 높게만 느껴졌습니다.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북한 사투리 때문에 어떤 고객들은 연변에서 왔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투리 쓰는 사람을 사무실에 앉혀 놓았다며 본사에 항의전화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생소한 자동차 부품이름에 외래어까지 섞어서 상담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을 때면 무슨 말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한동안 멍하니 전화기를 들고 서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횟수가 거듭될수록 자신감을 잃고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북한에 있을 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을 나와서 똑똑 하다는 얘기를 듣곤 했었는데 과연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는가 생각하니 서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께 회사를 그만두겠노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사장님은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다고 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고 사모님께서도 직접 저에게 이것저것 자세히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사에 들어온 지 두 달째 되던 날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본사에서 저의 서투르고 어색한 말투 때문에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친다며 카센터는 서비스업종인데 고객들에게 불편을 끼치면 곤란하니 한국아가씨로 바꿀 것을 요구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2개월 정도 일하며 겨우 배우고 익혀가는 과정인데 너무 매몰찬 것이 아닌가 하는 서러운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렸으나 더 이상 사장님께 걱정을 끼쳐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너무도 소중했던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찼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시작

 

그렇게 허무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저는 진로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영업을 시작할까 해서 여기저기 알아 보고 다녔으나 경험도 일천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자본이 없어 무턱대고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도전해 보자고 마음먹고 기다리던 중 탈북동포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설립한 단체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이런저런 나의 고민과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다 들으시고는 남편과 함께 대학원 진학을 권하셨고 처음에는 돈을 먼저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거절하던 우리 부부도 계속된 그분들의 설득에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대학원 진학을 사회정착의 과도기로 생각하자. 거기에서 자본주의의 정치·문화 등 사회주의 사회와의 차이점을 체득하여 좀 더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도약하자!!”

 

하지만 두 명의 아이가 있는 탈북 여성이 더구나 남편과 함께 학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생소한 단어들은 나의 학습 의욕을 저하시켰고 책 한 권을 보아도 남들보다 서너 배의 시간이 더 걸리는 바람에 항상 동료들에게 뒤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저녁 늦게까지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목숨을 담보로 함께 온 두 어린아이들이 밥도 안먹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아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학업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첫 직장에서의 실패경험을 떠올리며 이제 학업마저 포기한다면 내가 설 땅은 정말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버텨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라는 말처럼 제 주위에 있는 많은 분들이 헌신적으로 저를 도와주셨고 그런 분들의 도움으로 이제 석사논문을 준비할 정도가 되었지만 지금도 오직 어떻게 하면 아이들도 잘 챙기고 남편과 함께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제법 저희들끼리 공부하며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처음의 결심을 다시 한번 다지곤 합니다.

 

동포들을 도우며

 

대학원 입학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저에게 탈북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바로 대학원 입학을 추천하셨던 분이 일하시는 단체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해 왔기 때문입니다. 학비며 생활비를 낼 방도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그 같은 일자리 제안은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것이었으며 더구나 그 일이라는 것도 탈북동포들의 취업을 알선하는 것이라 저에게는 돈도 벌고 동포들도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고마움에 겨워 출근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동안 하루 23명의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동포들을 상담하며 취업을 주선한 결과 많은 수의 동포들에게 직장을 알선해 주어 뿌듯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어렵게 직장을 구해도 한 두달 만에 그만두는 탈북동포들을 만날 때는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동포들의 특수한 처지를 모르고 질책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나의 잘못인 것 같아 풀이 죽어지내며 사람들의 가벼운 입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우리 탈북동포들이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직장을 구할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비록 기대했던 수준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한 직장을 다니면서 경험과 실력을 쌓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만족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해서 비록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성실히 일하고 배워 주위 동료들에게 좋은 평을 받으며 모범적으로 생활한다면 언젠가는 좀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오기 마련입니다.

 

에필로그

 

사실 저도 아직 이 사회에 훌륭히 정착한 것은 아니어서 수기를 쓴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제가 한가지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처음에 품었던 꿈과 희망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억세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탈북동포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향에 대한 생각이 사무칠수록 고향의 부모형제들과 이웃들,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좌절하지 않고 뚜렷한 목표를 향해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갈 때 우리 모두는 성공의 언덕에 함께 올라 통일된 그날 떳떳한 모습으로 불효를 저질렀던 부모님 앞에 그리고 나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2004. 11. 김봄빛 씀

 

 

2005-01-27 12:21:07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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