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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는 악몽 속에서 살아나왔다. - 김옥금

작성년도 : 2011년 628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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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몽 속에서 살아나왔다.

- 김옥금

 

 

, 옥금아 니 뭐했니?”하는 친구의 고함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손에 꼭 움켜쥐고 있던 배낭끈만 달랑 남아있고 배낭은 없다. 내 전 재산, 아니 우리집식구 명줄인 장사배낭이 없어졌다.

정신이 들면서 이게 어떻게 된거지?”하고 친구한데 되물었다.

배낭 어디 갔냐구?” 명옥이가 소리를 질러댄다. 할 말이 없다.

친구가 기차 언제 들어오는지 알아보러간다며 나가고 대합실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나는 잠이 들어버리고 그사이 도둑맞은 것이다.

며칠을 기차 기다린다고 역에서 지내면서 잘 자지도 못하고 하다가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어느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지 전문 배낭털이 도둑들이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일을 벌인 것이다.

말로만 듣던 배낭털이를 내가 진짜 당할 줄이야. 배낭끈을 손에 칭칭 감고 손에 꽉 쥐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지?”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제발 이거 날려먹으면 안 된다. 손이 발이 되게 빌어서 꾼 돈이다. 알았지?” 라고 신신당부 하시던 엄마 얼굴이며 돈 내놓으라고 집을 난장판 만들 사채꾼들의 모습이 휙휙 지나간다. 인정사정없는 사채꾼들의 횡포를 우리식구들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미칠 것 같다. 멀고먼 함경북도에서 자강도까지 우리고장에 없는 고구마 장사 한번 해보자는 친구의 말을 듣고 큰마음 먹고 빌린 돈인데 이제 어쩐단 말인가?

친구가 뭐라고 계속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하지만 귀에 안 들린다.

사채꾼들 앞에서 쩔쩔 매며 사정사정 해야 될 걸 생각하니 죽고 싶다. 어디 돈 나올 데라도 있으면 돈 갚을 날짜를 미뤄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겠지만 하늘이 두 조각이 나지 않는 이상 돈은 먹고 죽으려고 해도 나올 데가 없다.

그보다 이거 하나 믿고 내가 장사 갔다 오면 갚아준다고 지금 외상으로 식량을 해결하고 있을 집식구들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우리 엄마는 졸지에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미친 듯이 대합실 안을 휘저으며 내 배낭 못 봤습니까?” 물었지만 사람들은 이거 미친년 아냐?” 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는 휙 돌아앉는다. 모두 자기 입에 거미줄이라도 안 쓸게 하는데만 전념하다보니 나 같은 애가 배낭을 잃어버리던 말든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거들떠도 안 볼 사람들 같다.

대합실 안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누구 한 명이라도 봤으련만 말해주는 사람은 더구나 없다. 만약에 말해줬다가 도둑들 한데 보복이라도 당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나도 그런 것을 본적이 있었다. 자강도로 갈 때 기차 안에서 있은 일이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느라고 캄캄해졌을 때 누군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터널을 통과하고 훤해지자 얼굴에 피가 줄줄 흐르는 한 아주머니가 울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양쪽 눈썹 위에서부터 턱 아래까지 서너 갈래로 찢어진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끄덕끄덕 졸던 사람,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생각에 빠져있던 사람, 배고프다고 우는 애를 무작정 업고 둥둥하며 달래던 여자, 열차 방통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목을 빼들고 여자를 보고 있었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서로가 영문을 모르며 두리번거렸다. “뭐지? 무슨 일이지?”하며 나도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콩나물처럼 빽빽이 서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30대로 보이는 한 사내가 지나가며 그러길래 주둥아리 건사 잘 해야지.”하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뻔뻔하고 당당하게…….

그제야 사람들이 웅성이며 사건의 전말을 수군대기 시작했다.

전날 화성역에서 기차가 멈춰있을 때 한 아낙이 돈을 잃어버렸다고 고함을 지르며 찾아다닐 때 소매치기 장면을 목격한 지금 피 흘리는 아주머니가 자기가 본 것을 얘기해주었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아주머니는 지금 보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면도칼 날을 네 손가락 짬에 하나씩 끼우고 그 손으로 사람의 얼굴을 한번 쓱 쓸어주면 저렇게 가혹한 참상이 벌어진다.

이것이 북한사람들의 생활상이다.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들이 득실거리고 양심과 도덕을 어느 쓰레기통에 팔아먹고서야 살 수 있는 곳이 지금의 북한이다. 인민을 위한 나라, 인민이 주인 된 나라를 만든다는 김정일의 정책이 지금의 북한을 만든 것이다.

숨이 콱 막힌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내 배낭 좀 주시오하고 애원을 하지만 들어주는 이도 없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온갖 후회가 밀려온다. 친구가 처음 장사 제안을 했을 때 듣지 말았으면, 그냥 열심히 농장일이나 나갔으면 가을에 쥐꼬리만 한 분배라도 탈걸, 아니면 누구 남자라도 하나 같이 왔으면 짐이라도 지켜주지 않았을까? 별의별 후회가 다 온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불고 요동치고 나니 온몸이 다 땅으로 잦아드는 것 같다.

돈 아낀다고 전날 저녁에 두부밥 하나씩 사먹고 하루 종일 굶은 데다 울기까지 하고나니 그야말로 녹초가 된다.

그러다가 또 잠이 들었다. 꿈이다. 시장에 갔더니 오늘만 공짜라는 팻말이 붙여져 있고 떡장수, 사탕장수, 꽈배기장수, 암튼 모든 먹을거리장수들이 웃으며 천사 같은 얼굴로 사람들한테 공짜로 음식을 주고 있었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나도 정신없이 들어가 먹어댔다. 한참 먹다가 아차 엄마도 데려와야지 하고 돌아서 나오다가 누군가의 발에 탁 걸려 넘어지며 눈을 떠보니 현실은 공짜 떡은 커녕 공짜 물도 없는 세상이다.

눈물이 나온다.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울어도 울어도 끝없는 눈물.

그때 어떤 배가 불룩하게 나오고 얼굴에 기름이 번지르한 사내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딱 보니 간부다. 옆에 간부가방 하나 들고 거들먹거리며 역사무실로 들어간다. 들어가서 차 시간을 알아보는지 역장인 듯 한 사람과 몇 마디 하더니 다시 나와 대합실을 빠져나간다. “저런 간부들은 얼마나 좋을까?” 부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도 여기 장사 오기 전까지 하루 11시간이상씩 농장 일에 충실했고 정말 내가 우리나라의 쌀 창고를 책임졌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봄에는 허리 부러지게 논에 모를 냈고 여름엔 처녀손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바닥 전체가 굳은살이 박히도록 호미질을 했고 가을에는 한 알의 낟알이라도 흘릴세라 정성들여 벼를 베고 겨울에는 또 더 좋은 퇴비를 생산하려고 남의 집 변소 똥까지 도둑질해가며 열성분자 명단까지 올랐다.

하지만 사회주의 분배원칙에 따른다는 명목 하에 내 앞에 차례진 분배량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 네 식구가 한 달 정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너무 적은 양이였다.

현금으로 나온 분배돈은 바로 통장에 들어간다며 빈껍데기 통장만 준다. 5년 동안 빈 통장만 받고 나라사정이 어렵다는 구실로 돈은 일전도 받아보지 못했다. 결국 그 돈은 농장 관리일군들이 드셨겠지? 아니면 김정일이 먹었을까?

나는 하루 두 끼 겨우 죽을 먹으며 한 끼에 5개의 삶은 감자 먹고 한 시간 뒤에 화장실 한번 가면 속이 텅 비는 그런 생활을 하며 피땀 흘려 번 돈이건만.

왜 이런 거지? 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하루하루 먹을 식량걱정을 해야 되고 저런 간부들은 왜 저렇게 기름이 번지르르하게 잘 사는 거지?”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원래가 그런 법 인줄알고 살아야만 했다.

이틀 후 드디어 기차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대합실에 쫙 퍼지고 사람들은 술렁이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 잃어버리고 빈 몸이 되었지만 그래도 집에는 가야하기에 나도 친구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출입구를 빠져나왔다.

얼마 뒤 기차가 들어왔다. 수백 명 사람들의 기차 탑승전쟁이 시작되었다. 입구부터 시작하여 어디라 할 것 없이 사람 천지다.

힘 센 남자들은 입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마구 짓밟으며 올라가고 애를 업은 아줌마는 앞에 올라가는 남자들의 뒤꽁무니를 꽉 움켜쥐고 악을 쓰며 앞사람들처럼 앉아있는 사람들을 마구 짓밟고 올라간다. 그렇게라도 올라가면 다행이지만 힘이 없어 그렇게도 못하는 사람들은 길 내라고 고함만 질러대다. 완전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입구에는 사람들이 꽉 막혀있어 아예 탈 엄두도 못 내고 유리가 다 깨져 비닐박막으로 막아놓은 창문 쪽으로 가서 돈 받고 태워주는 사람에게 우리 밥까지 굶어가며 아껴두었던 돈을 주고 창문을 통해 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발을 옮겨 디딜 수도 없다. 콩나물시루도 이것보단 빽빽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창문턱에 손을 짚고 발은 의자에 한발만 걸치고 한 발은 공중에 뜬 채로 기차가 출발했다.

그런 채로 한 여덟 시간이 지난 후에 겨우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고 그나마 바로 서서라도 갈수 있게 되었다. 두 발을 바닥에 붙이자 이제 살 것 같다. 그동안 깜박하고 있던 잃어버린 배낭 생각에 또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느덧 캄캄한 밤이 되었다. 전등 하나 없는 열차는 오로지 달빛으로만 자기가 태우고 가는 춥고 배고프고 화장실 가고 싶어도 발을 옮길 수 없어 이 악물고 참으며가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시키며 힘겹게 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삐이익~~~~~~~”하고 급정거를 하는 것이다. 간신히 서있던 사람들이 기차가 달리던 방향으로 약속이나 한 듯 쓰러졌다. 또다시 고래고래 욕설이 터지고 저저마다 목청껏 뭐야?” 하고 질러댄다.

그런데 심상치 않다. 열차승무 안전원들이 손전등을 들고 열차 앞쪽으로 뛰어간다. 창문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한참을 목을 빼들고 내다보더니 또 하나 죽었구만.”하고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말한다. 기차 빵통 위에 앉아서 가던 사람이 잘못 움직여서 전기에 감전되어 죽었단다.

처음 이런 일을 겪은 나와 친구는 너무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지만 전문 장사로 기차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잇지?”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싶어 조용히 옆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분명 사람이 죽었단다. “에이그. 잘 죽었지. 이렇게 맨날 고생하느니 죽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한 거지.” 하고 말하는 아주머니는 오히려 그 사람이 부럽기까지 한 표정이다.

참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이렇게 태연하게 하는 그 사람들의 속은 또 어떤 아픈 상처들로 채워져 있을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칙칙폭폭 칙칙 폭폭. ~익 칙

숨 가쁘게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던 증기기관차가 드디어 온성이라고 쓴 기차역에 도착했다.

자강도 강계역에서 배낭을 잃고 출발한지 열흘만이다. 그나마 전기기관차로 왔으면 좀 더 빨리 왔을지 모르겠지만 회령역에서 고물통 증기기관차로 바뀌고서는 한정거장을 가고 한 시간씩 서서 기력보충을 하느라고 기차로 4시간 거리를 5일 만에 온 것이다.

냄새나고 춥고 거기다 배고픈 것은 기본이다. 콩나물시루 같은 빵통에서 내렸다.

집이 있는 땅에 내리긴 했지만 장사 한답시고 간신히 꾼 돈을 홀랑 다 털어먹고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면 아빠한데 혼날 생각을 하니 집 쪽이 아닌 친구집으로 발길이 돌려진다.

그런데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 기다린다.

금아 니네 아버지 상새 났단다.” 친구 언니가 신을 벗으려는 나한테 말했다.“무슨 소리야?” 하고 되물으면서 내 머릿속엔 중풍으로 누워계시던 아빠모습이 스쳐지나간다.“설마?”“한 며칠 됐다. 소문이 자자하던데.”하고 친구 언니가 말하는 걸 들으며 뛰쳐나와 20리 밖에 있는 집으로 정신없이 달렸다.“아닐 거야.”하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쩜 장사 망한 거 혼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다가 기가 막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20리길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정신없이 달리다 집 앞에 도착했다. 가슴이 정신없이 널뛰기를 한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지만 안 보인다. 아랫목에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1년 전 저녁을 드시다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진 아버지. 동네에 사는 병원 의사에게 달려가 아버지가 쓰러진 얘기를 하고 불러다가 진찰을 해보니 풍이란다.

가볍게 지나간 것이라서 이제부터 식사 잘 대접하고 영양보충 좀 하고 약 잘 쓰면 나을 수도 있는데…….” 하고 의사가 차마 우리한텐 말 못하고 혼자 말처럼 중얼 거린다. 하지만 한 끼 식사꺼리도 겨우겨우 마련해나가는 우리 집에 영양보충이라니? 약이라니?

엄마와 동생이 매일 석탄 달구지를 끌고 15리 밖에 있는 곳에 가서 손발을 다 얼려가며 겨우 팔아 하루 식량을 해결하는 우리 신세에 어디서 그런 돈을 마련한단 말인가?

그 다음날부터 아버지는 왼손과 왼쪽다리를 못쓰셨다. 마비가 온 것이다.

지금 여기 남한 같아서는 그 정도 풍은 아무렇지 않게 고쳐 드릴 텐데. 병이라고 감히 말도 못 붙이게 고칠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과연 무엇이 나를 그렇게 무능력하게 묶어놓은 것인지? 무엇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그렇게 쉽게 보내드려야 했는지?

엄마, 아버지는?”“상새났다.”

엄마가 울먹이시며 자초지종을 얘기 해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가 나를 찾으셨단다. 혹시라도 장사 나간 큰 딸이 돈이라도 벌어서 금의환향이라도 하길 바라신건지…….

아버지는 금아 금아그리고 조용히 잠드셨다.

그것이 마지막 이였다. 순간 정말 TV에서만 듣던 그 단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목이 메이면서 귀에서 윙~하는 소리가 났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뒷산 아버지산소에 찾아갔다. 오불꼬불 산길을 돌아올라 아버지 묘소가 보이자 동생이 저기 아버지 산소하고 얘기해주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달려가 아버지 앞에 쓰러졌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아버지 생전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닌데. 어쩜 아버지가 없으면 술값도 안 들어가고 잔소리도 안 들어도 될 것이라 더 좋겠다고 생각한적 많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너무 슬프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한 느낌을 그때 첨 느꼈다.

그냥 아버지 아버지하염없이 울부짖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뱉은 한마디 미안합니다. 아버지그 말이였다.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나왔다.

큰딸로서 아픈 아버지 대신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고 하루 두 끼 죽도 겨우 먹게 한 것도 미안하고 돈을 못 벌어서 약도 좋은 것 못 써드리고 돌아가시게 한 것도 미안하고, 아버지 살아계실 때 그 좋아하시는 약주도 맨 날 돈 없다고 안 사다드린 것도 미안하고, 소주 한 병에 강냉이 1kg이니 사다드릴 수도 없었지만 겨우 약주 사드린 날은 안주도 없이 그냥 소금에 절인 배추 썰어드린 것도 미안하고, 다리 아프시다고 다리 좀 밟아달라고 하실 때도 짜증 낸 것도 미안하고. 미안한 것 천지다.

그때부터 13년이 지난 오늘도 아버지 생각만하면 목이 메이고 미안해요. 아빠이 말만 나온다. 정말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아버지한테 잘 해드릴 것이다. 후회 없이, 미안함 없이, 부족함 없이.

그래도 아빠,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그때 지금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알았으면 아버지한테 사랑한다고, 두 번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의 딸로 살 것이라고 했을 테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도 몰랐고 그 말이 그렇게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단어인줄도 몰랐다. 오직 충성, 맹세, 총폭탄이 되리이런 말만 배우고 듣고 외치며 살아온 나였던 것이다.

실컷 울고 산에서 내려오는 내 머릿속에는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하는 의문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집에 와서도 아버지생각에 한참을 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아침이다. 또다시 하루 한 끼 걱정으로 하루해가 뜨고 지는 일상의 반복이다.

어제 저녁 잠들기 전 그나마 좁쌀죽으로 배가 불려졌을 때 차라리 내일 아침이 오지 말고 영원히 지금 이 배부른 시간으로 세월이 멈추었으면 하고 바래보기도 했지만 그 바램도 추운 겨울바람에 실려 날라갔나부다. 지겹다. 이놈의 세월이 지겹다.

그래도 눈이 떠졌으니 일어나야지. 옆에 엄마와 동생이 누워있는데 배가 쏙들어가서 등가죽에 말라붙었다. 그걸 보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얼른 눈물을 닦고 부엌으로 나가봤지만 자그마한 대접에 담겨진 옥수수가루 몇 줌이 나를 반긴다. 그걸 물에 반죽을 해서 놓고 아궁이에 나뭇가지들 주워놓은 거 몇 개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

감자 대충 썰어 넣고 옥수수 반죽을 수제비 삼아 뜯어 넣고 식구들 깨워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동생과 집을 나선다. 집 뒷산에 땔감 하러 가야한다. 가서 썩은 가지들 널브러져 있는 거 있는 대로 끌어다 모아서 지게에 차곡차곡 쌓고 등에 지고 하고 일어섰다.

벌써 해가 중천이다. 오후가 된 것 같다. 하늘의 해를 보고 대충 시간을 짐작하면서 후들거리는 다리에 젖 먹던 힘까지 다 주면서 한걸음씩 걷는다.

차라리 올리막 길이 더 낳은듯하다. 내리막은 자꾸 다리가 푹푹 꺾이면서 더 힘들다.

얼마쯤 내려오다가 펑퍼짐한 바위 한 개가 보이 길래 거기에 나무지게를 기대놓고 잠깐 숨을 돌리려고 동생이랑 나란히 앉았다.

맑은 겨울하늘 아래 강 건너 중국이 보인다. 지나다니는 차들도 보이고 사람들도 보인다. 어느 집에서 뭐 맛있는 걸 해먹는지 고소한 콩기름 냄새가 바람 타고 우리 코에까지 들어와서 위를 뒤집어 놓는다.

언니, 중국 사람들은 뭐 먹고살까?”“낸들 아니.” 하면서도 나도 궁금해진다. 왜 중국 사람들은 저렇게 잘 먹고 잘살까? 그러다가 5분도 안 된 사이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결정을 한다. 나도 중국에 가야겠다. 가서 돈 좀 벌어와야지. 장사 밑천만 모으면 돌아와야지.

이렇게 나의 중국행이 결정되었다.

그 다음날 평소에 소문 나 있던 도강꾼을 찾아갔다.

며칠 후 밤 나는 옆집 동생과 마을언니와 함께 깊은 어둠을 타고 두만강 뚝에 스며들어 잡관목을 헤치면서 도강꾼과 약속된 장소로 갔다.

거기에는 벌써 중국남자 한명이 고무보트를 끌고 와있었다. 우리 셋은 거기에 정신없이 올라타고 국경을 넘어 잠시 후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셋 다 숨도 소리 안 나게 쉬고 있었다.

그길로 어디로 차를 타고 밤새 달렸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어느 농촌마을의 한 집 앞에 내렸다. 그 집에 들어가자 나이 지숙한 내외가 우리를 맞이했다. 아줌마가 인상이 너무 좋았다.

배 고플 텐데 밥부터 먹소.” 하면서 하얀 이밥과 김치랑 감자 볶은 걸 내놓았다.

몸과 마음은 바짝 긴장되어 있으면서도 우리 손은 어느새 숟가락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낯선 곳에 대한 경계심과 낯선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도 배고픔을 호소하는 인간의 본능에는 이길 수가 없었던 듯싶다.

정신없이 밥을 퍼 먹고 있는 우리를 흘끔흘끔 바라보며 우리를 데리고 온 사람과 집주인 아저씨가 뭐라고 조용조용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한 시골집에서 하루 세끼 밥 근심 안하고 차려주는 밥을 바닥까지 싹싹 비우며 맛있게 먹었다.

3일째 되던 날 점심쯤 갑자기 차 한대가 마당에 삐~익하고 급정거를 하는 소리가 들릴 때 이상한 느낌이 확 들었지만 벌써 늦었다.

경찰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중국 훈춘 국경수비대 감옥에 끌려갔다. 거기에는 다른 몇 명이 벌써 잡혀 와있었다.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이 시작되었다.

중국 국경수비대 감옥에서 하루 3끼 주는 옥수수빵 한 개에 배를 채우며 일주일을 더 보냈다.

중국 국경수비대 군인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집 잃고 헤매는 짐승을 주인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잡고 있는 듯 한 그런 표정이다.

이것들은 왜 집을 뛰쳐나와서 우리를 이렇게 성가시게 하는 거야?” 하는듯하다.

학교에서 일제 강점기시기를 배울 때 나라 없는 설움을 표현하는 글귀를 보면서도 저런 감정은 어떤 감정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서야 느꼈다.

, 나는 지금 나를 보호해줄 아무도 없구나. 여기서 그냥 죽어나가도 아무도 모르고 길가의 쓰레기처럼, 주인 없는 짐승처럼 버려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또다시 그런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후회스럽고 저주스럽고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눈물이 안 나온다. 이상하다. 악밖에 안 남는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생각하면서도 후회는 들지 않았다. 앉아서 굶어죽느니 남들 다하는 도강이라도 해서 돈이라도 벌어 와서 잘살아보려고 한 게 왜 죄인가?

그렇게 담담하게 생각하면서 드디어 강제북송의 날이 왔다.

나까지 모두 7명이 차에 태워졌다. 무섭고 떨리면서도 내 나라 내 땅으로 간다고 하니 마음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감정인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기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군 안전부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 이제 정말 끝이구나.”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차에서 내려 건물 안에 들어서자 우리를 맨 끝방에 들여보냈다.

아무도 없는 방인데 왜 들여보냈지? 하는 의구심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한 여자안전원이 들어왔다. 우리보고 단박에 옷을 다 벗으란다. 설마하면서 속옷은 안 벗은 우리에게 그 안전원이 한다는 말 야 이놈의 에미나이들, 다 벗으란 소리 안 들리니?”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사람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벗어버리자 따라서 다 벗었다. 아무리 같은 여자라지만 그때의 수치심은 평생 느껴볼 수 없는 그런 더러운 기분이었다.

벗은 옷 구석구석 검사가 끝나자 우리는 서로 방을 배치 받아 들어갔다.

무슨 위생검사가 아니고 주로 돈 있는지 그걸 확인하는 것이다. 추가로 위험한 물건, 송곳 같은 것이다. 만약에 돈이 나오면 자기네가 가진다.

내가 들어간 방에는 15명 정도가 있었다. 모두 양반다리를 하고 똑바른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었다. 마음대로 움직이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고 감방장이라는 여자가 얘기해주었다.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정말 무섭게 생긴 지도원 한명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새로 들어온 사람들 호명하여 일어세우고 뚫어져라 보는 것이었다. 그때 만약 얼굴을 들어 그 사람을 쳐다보았으면 난 아마 지금 이글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너무 무서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한참을 있었더니 앉아하는 것이다. 냉큼 앉았지만 그때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 지도원 인상이 험악했던 것이다.

한참을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다 나가버리자 그때 앞에 앉아있던 고참이 너 오늘 진짜 운 좋다. 김 선생한테서 그렇게 조용히 빠져나가기 힘든데.”하면서 만약에 내가 그 사람과 눈 마주치기만 했으면 나는 오늘 뼈도 못 추리게 맞는다는 것이다. 그 미친놈한데 맞아서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온 자기얼굴을 보여주면서 얘기하는데 나는 내가 맞은 것 마냥 몸이 떨렸다.

그렇게 하루 종일 묵언수행만하면서 한 일주일이 지났을까. 차디찬 마룻바닥에 내 윗도리 하나 벗어서 둘둘 말아 베개 만들어 베고 10시 정각 취침시간이 되어 방마다 점호를 마치고 저마끔 제자리에 누워서 지옥 같은 오늘하루를 돌이켜보다가 간신히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누구지?”하면서 눈을 떴더니 감옥을 지키는 최아무개라고 하는 지도원 한명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하고 벌떡 일어났더니 나보고 나오란다. 무슨일인가 싶어 허리 숙이고 벌렁벌렁 기어 다닐 정도의 방문 앞에 가섰더니 문이 열린다.

나갔다. 나를 데리고 복도 맨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캄캄한 방에 연한 달빛만 비추는데 이 미친놈이 무작정 나를 끌어안더니 입을 갖다 붙인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지만 정신을 차렸다. 일주일간 감방에서 지도원들 모르게 고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귀동냥해 들은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전에 한 여자가 나처럼 지도원이라는 놈한테 끌려 나가 당하고 들어왔는데 그 며칠 후부터 그 여자는 아무 이유 없이 감방 지키는 지도원 놈들에게 차례대로 불려나가 취조당하고 감방에서도 괜히 일으켜 세워서는 감방에 설치되어있는 쇠창살에 바짝 붙여 세우고 얼굴이며 손가락을 죽게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다섯 손가락을 쇠창살사이에 하나씩 끼워놓고 회초리로 내리친다고한다.

그 생각을 하니 내가 뭣 때문에 이런 미친 놈한테 내 몸 뺏기고 또 매까지 맞아야하나 싶어 죽을힘을 다해 밀어냈다.

그러자 그 지도원이라는 놈이 더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손에 뭐든지 잡히면 그놈 대갈통을 박살내고 싶지만 야속하게도 아무것도 안 잡힌다.

그런데 내입에서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지도원동지, 여기서 이러다가 걸리면 나는 죽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나간 다음에 우리집에 오십시오.” 그렇게 밀고 당기고 하다가 끝내 그놈이 나를 풀어주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내 몸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최일선에 있다는 안전부 지도원이라는 것들이 그렇게 썩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뭐가 잘되겠는가?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장에 성추행으로 걸려 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창피한데 북한에는 성추행이라는 죄목도 없고 그걸 문제 삼아 떠들만한 마음의 여유들도 없는 것이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그깟 성추행이 대수랴? 아마 그곳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말도 못하고 수치심에 치를 떨면서 이를 갈았을 여자들이 얼마나 많을지…….

치가 떨린다. 그리고 그 방을 나와 내가 갇혀있는 방 조각문을 열고 내 자리에 들어가 누웠지만 똥물을 뒤집어 쓴 듯 한 더러운 기분에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눈물은 뭐가 터진 것 마냥 쏟아져 내리는데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다. 내 손으로 주먹을 부르쥐고 가슴을 두들겨 팼다.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그렇게 나를 때렸다. “너는 왜 이렇게 못나서 이런 곳에나 잡혀 들어오고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것이냐? 왜 인생이 이렇게 밖에 안풀리냐?”하고 나한테 계속 되물으면서…….

하지만 그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일이겠는가? 당장 내일 끼니거리가 없는 여자들은 배급을 타게 해주겠다는 배급소 소장의 말에 홀리어 만났다가는 몸만 뺏기고 배급도 못타고 억울한 사연 어디가 하소연도 못하고 집에 와서 혼자 울고. 그런 일을 보고 듣고 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 뒤로도 그 지도원 놈은 매일 나를 불러내다가 화장실 청소니 뭐니 하면서 계속 추근거렸다. 생각 같아선 뺨 한대 후려갈기고 싶지만 죄 아닌 죄를 지은 몸이라 온갖 구실 다 대가며 피하느라 그나마 먹은 죽도 소화가 안 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한 달 보름을 지옥에서 헤매던 어느 날 지도원 한 명이 와서 쇠창살 앞에 폼 잡고 떡하니 서서 이름 부르는 사람은 일어서란다. 내 이름도 불려지고 우리는 밖으로 끌려 나갔다.

갑자기 햇빛이 눈이 부시게 비추자 끌려나온 사람들 열 명 정도가 동시에 눈을 가렸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햇빛이 이렇게 눈부시다는 것을 그때 아마 처음 느낀듯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장정 두 명이 앞뒤에서 우리를 지키며 길을 떠났다. 30리 밖에 떨어져있는 저수지공사장. 한마디로 노동단련대에 투입된 것이다.

30리길을 가면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심지어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꾹 참고 걸어야했다. 처음 길을 떠날 때부터 일체 말을 해서도 안 되며 어떤 요구조건도 들어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하자 숙소라고 하는 방에 짐을 풀라고 했는데 웬걸? 남자 여자가 한집에서 살게 됐고 안방은 남자들, 아랫방은 여자들 이렇게 방 배치를 받았다.

거기다 미닫이문도 없었다. 누가 일부러 떼버린 듯. 세상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건만 어떻게 다 큰 성인들을 아무리 죄인들이라도 잠자리는 제대로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얼마나 우리를 인간취급을 안하면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안전부 구류장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망상이었다. 취침시간이 되어 모두 잠자리에 들고 한 시간쯤 지나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방에서 남자 한명이 살금살금 나오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눕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상한 소리와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참 기도 안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노동단련대 반장이라는 남자와 힘 좀 있다는 남자들이 욕정을 참지 못하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아무 여자나 더듬고 끌어안으면 다다. 그 여자는 정신 차리고 어둠속에서도 누구인지를 확인한 다음엔 끽소리 못하고 당해야한다. 안 그럼 다음날부터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완전 무법천지이고 그걸 단련대 책임자라는 사람한데 호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백배 무서운 보복이 따라오고 개처럼 끌려 다닌다. 오히려 그 인간들, 당에서 파견했다는 관리 지도원들이 그런 추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지금도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북한은 겉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외치지만 속은 팍팍 썩어 언제 터질지 모를 고름덩어리가 비눗방울에 가리워져 있다고. 비눗방울의 영롱한 빛에 눈이 부셔 그 속에 가려진 고름덩어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비눗방울이 겉으로 볼 때 화려한 빛을 뿜어 아름다운듯해도 속은 텅 빈 아무것도 없는 환상체인 듯 북한의 모든 정책이나 제도들이 인민을 위한 것인 듯 보여도 김정일 부자와 그 하수인들의 추악하고 추잡스런 진면을 가리기위한 위장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매일저녁 이상한 숨소리를 들어가며 잠은 들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새벽 5시부터 기상 소리에 번개같이 일어나 씻고 줄을 지어 밥이라고 차려 준 것을 먹어야한다. 밥이래 봤자 옥수수가루 범벅에 시래기를 버무려 찐 것이다. 국이나 반찬은 생각도 못한다.

만약 제대로 깨지 못하고 씻는데서 시간을 끌면 그날 아침은 밥이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속한 조가 단체 기합이다.

안 그래도 기운 없고 가까스로 버티는 사람들을 운동장 50바퀴 뛰기를 시키면 완전 초죽음이다. 온갖 욕설이 홍수마냥 터진다. “야 이 개간나새끼들아, 좀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하니? 그것도 못하겠으면 어디 가서 뒈지든가?” 뭐 보통 이 정도다. 그걸 맨 정신에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팽이처럼 움직여야한다.

일은 또 얼마나 고된지 지금도 내가 그 일을 해내고 살아있다는 것이 대견스럽다.

손잡이 네 개 달린 들것에 푹 젖은 흙을 가득 담고 50미터밖에 내다버리고 오는데 그걸 여자 둘이서 들어야한다. 한번만 갔다 오면 벌써 손은 꽉 굳어버리고 손바닥은 빨갛게 충혈 되고 하루 만에 벌써 손가락 마디마디 물집이 잡혔다.

눈물이 계속 나오려고 한다. 난 그걸 못나오게 하려고 애를 쓴다. 울다가 조장이나 반장한테 걸리면 뒤지게 맞는다고 먼저 와서 일하던 선배들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땐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때린다.

그리고 저녁에 들어가면 호된 생활총화를 겪어야 한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강하고 돈벌어오려고 했던 것이 이렇게 큰 죄가 되어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짐승 같은 생활 속으로 나는 던져진 것이다.

저녁 잠자리에 들면 눈물이 소리 없이 계속 흐른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지?” “우리 엄마 아빠는 왜 다른 부모들처럼 돈을 잘 못 벌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먹고살기에 이런데 안 왔을까?” 끝도 없는 질문을 하고 결국은 대답해 주는 이도 없고 혼자 울다가 울다가 어린애마냥 울다 지쳐 잠이 든다.

그 뒤 일주일정도 지난 어느 날 점심시간. 반장이 내 이름을 부르더니 오후일 나갈 때 나가지 말란다. 힘든 일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왜 나를 나가지 말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잔뜩 긴장하고 숙소에 남아있는데 엄마가 면회 오신단다.

그 순간 엄마?”하고 불러보는데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갑자기 어린애가 된듯했다. 그때부터 대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참후 엄마가 동생과 함께 나타나셨다.

엄마하고 달려가 안기는데 왜 그렇게 미안하고 죄스러운지. 건강도 안 좋으신 엄마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놀라고 떨렸을지 생각하니 정말 평생 못 느꼈던 그런 죄스러움을 느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금아하고 불러주시는데 그때 나는 결심을 굳혔다. 여기에서 풀려나가면 난 꼭 다시 중국 갈 거다. 가서 돈을 벌어 와서 우리엄마 꼭 호강시킬 거다 고.

엄마가 가지고온 짐을 풀어놓으시는데 그걸 보고 또 한 번 왈칵 눈물이 터졌다. 힘든 데서 일하는, 아니 단련 받는 딸을 위해 어디서 났는지 강냉이랑 콩이랑 섞어서 고소하게 볶아오고 엿도 한 1kg정도 사오신 것이다. 분명 집에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이 많을 것을 해오면 울 엄마랑 동생이랑 며칠을 풀죽을 먹어야할지.

나는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당장 가져가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무 소리 없이 내 보따리 속에 그것들을 차곡차곡 넣어주시는 것이다.

일 힘들지? 견뎌내. 마음 든든히 먹구.”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아주 가늘게 떨린다.

삼십분 간의 면회가 끝나고 돌아서서 가는 엄마의 등을 보는데 왜 그리 처량한지? 그 심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으리.

엄마도 나도 서로 안보이려고 감추었지만 나의 눈엔 엄마의 눈물이 보이고 엄마의 귀엔 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고 또다시 지옥 같은 단련대 작업현장으로 끌려 나갔다. 땅은 왜 그렇게 파 제끼는지 폭 4미터, 깊이 5미터로 계속 땅을 파야한다. 도대체 이런 일을 왜 하는지? 어디다 쓰려고 이렇게 땅을 파는지도 모른 채 계속 땅만 파나갔다.

그 밑에서 땅을 파는 남자들은 30분에 한 번씩 폭력이 오고간다. 몸도 약하고 뒤에 빽도 없는 사람이 조금만 일을 잘못하면 조장, 반장 이런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찬다. “이 개새끼야. 이런 것도 못하면서 중국은 어떻게 갔니?”

그러면 맞은 사람은 흠뻑 젖은 진흙바닥에 쓰러졌다가도 아픈 내색도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잘하겠습니다.”하고 연이어 사과를 하고 빌어야한다. 나이 많고 적음이 여기서는 아무 상관도 없다. 때리는 반장은 아버지 벌되는 사람도 마구 욕질하고 때린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피로 눈물로 얼룩진 땅을 족히 1km정도는 팠을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이 훗날 한국행 과정에 고향에서 온 사람을 만났는데 우리가 팠던 그 땅을 뒤에 온 단련대생들이 또 다 메꿨단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사람들을 그 개고생 시키며 땅을 파게 해놓고 다시 메꾸다니? 결국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만든 일인 것이다. 파는 사람들은 파느라고 고생, 메꾸는 사람들은 메꾸느라고 고생, 참 어이가 없다. 오로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용도로 생땅을 파고 메꾸고 한 것이다.

이것이 김정일의 부하들이 고안해내는 일들이다. 나도 그 밑에서 한때나마 충성을 노래하며 뼈 빠지게 일한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자기한테 충성하는 300만의 군인과 부하들만 있으면 된다는 김정일과 그 아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이를 갈았던지 그때부터 나는 자면서 이를 가는 버릇까지 생겼다.

반년을 더 단련대에서 생땅을 파며, 내 설움을 파며 마지못해 살다가 해방을 맞았다.

아침이 되어 회의시간이 되자 단련대 책임자가 오늘 출소하는 사람들 명단을 부르기 시작했다. 매일 오늘은 오늘은하면서 기다렸던 시간이다. 한사람 두 사람 호명하다가 김옥금하고 불렀다. 꿈인가 싶어 가만있자 다시 불렀다.

김옥금

진짜 내 이름이다. 해방이다. 자유다.

이름 불리운 5명은 단련대 사무실로 가서 또 훈계를 받는다. 어버이장군님의 하늘같은 은혜로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단다. 실컷 부려먹고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을 땐 그 얼어 죽을 은혜는 다 어디로 사라졌던 것인가?

3시간 넘게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누가 또 길에서 잡고 어디로 끌고 갈까봐 배고픈 줄도 모르고 힘든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걸었다.

그 다음날 나는 또다시 목숨 걸고 도강 길에 나서고 한번 갔던 경험으로 혼자서 두만강을 건너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중국생활 6년을 지나 3국을 또 거쳐 한국행에 성공했다.

중국에서 공안 옷을 입은 사람이 먼발치에 보이기만 해도 가던 길을 돌아서 정신없이 뛰어 도망치고 밤에 자다가도 혹시 경찰차의 경보음이 울리면 소스라치게 놀라 깨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고 멀리 사라질 때까지 심장은 쿵쾅거리고 얼굴은 경련까지 일었다. 지금도 아무 지은 죄도 없이 경찰차의 소리만 들리면 그때 놀라고 두근거리던 상황이 다시 재연 되군 한다.

경찰서의 담당형사가 안부 전화를 해와도 김형사라는 전화기에 뜨는 이름만으로도 심장은 두려움에 쿵쾅거린다. 중국에서 내가 느꼈던 그 지독한 공포감이 언제나 사라질런지.

지금 내가 쓰는 이 몇 장의 글이 어찌 지나온 나의 십여 년의 서럽고 한 많은 세월을 다 담아내랴.

3번의 강제북송, 그리고 중국에서 겪은 공포와 악몽들, 도망 갈래야 갈 수 없는 집이라는 이름의 감옥 아닌 감옥에서 지낸 18개월의 시간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수한 아픔들을 겪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고비들을 넘겼고 지금 이렇게 그 어려웠던 시절들을 회고하고 있다.

우리 탈북자들 어느 누구 하나 저마다 구구절절 가슴 아픈 사연이 없는 사람이 있겠냐만은 두 번 다시 그런 고통을 안 받으려면, 그런 아픔을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눈물만 짓지 말고 남겨둔 가족들 생각에 한숨만 짓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한다.

누구의 선동이나 선전에 의한 것이 아닌 오로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우리들의 앞길을 개척해야할 것이다.

나는 지금 한 가정의 주부로, 한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세상은 내가 노력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우리 부모들처럼 자식 배 굶기고 남보다 못했던 삶은 내 아이에게 절대로 살게 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내일의 아침이 기다려지고 또 다른 내일이 기대된다.

그 내일 속에는 반드시 사랑하는 엄마와 동생, 그리고 오빠도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2011430일 김옥금

 

 

2011-07-05 02:27:33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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