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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는 이 사회의 이방인이 되고 말 것인가?" - 이영훈

작성년도 : 2000년 63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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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회의 이방인이 되고 말 것인가?"

- 이영훈

 

 

탈북후 중국 등지를 헤매다 동남아 제3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것이 어제일 같은데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기간동안 북한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많은 일들을 체험하였다

 

나는 평양에서 태어나 당 간부였던 부모님들의 후광으로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후 북한군 소좌로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까지만 해도 평범한 당의 일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당은 나를 유일사상 체계에 위반되는 반당적, 반혁명적인 요소를 가진 위험인물로 지목하였다. 이때부터 장래의 희망이 좌절되면서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 귀결점은 탈북이었다.

 

처음 한국에서 생활은 마치 다른나라 땅에 온 것처럼 생소하였다. 북한에 있을 때 외국출장을 가 본 적도 있고 영어도 조금 아는 편이었지만 이 낯선 한국땅에서는 도적히 적응될 수 없는 이방인이 바로 내가 아닌가 하고 느껴지기도 하였다.

 

언젠가 여의도에 있는 63빌딩에 간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젊은 청년 2명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분명 우리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짧은 영어실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들중 한사람의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너 핸드폰 있지, 지금 연락해서 태광빌딩 커피숍에서 미팅하자고 해" "그리고 올 때 와이프 데리고 오라고 하고, 지금 내려서 엘리베이터 타면 빠를거야" 나는 속으로 핸드는 손이고 폰은 전화를 뜻하는 텔레폰의 약자일 것이니 핸드폰은 휴대용전화일 것이고, 빌딩은 건물, 커피숍은 커피를 파는 매장, 미팅은 영어로 미트이니 뒤에 ing를 붙여 만나는 것으로 되며, 와이프는 아내, 엘리베이트는 승강기다는 식으로 해석하고서야 겨우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참으로 같은 민족이지만 남과 북의 언어사용이 이렇게도 차이가 나다니...

 

사투리 때문에 말의 의미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내가 잠시 생활했던 경상도 지역은 서울과 달리 사투리 투성이었다. 언젠가 친구가 자신의 차를 태워 주겠다고 해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 밥을 살테니 함께 식사하러 갑시다 라고 했더니 언제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바로 했더니 그 친구가 다시 언제예라고 하기에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큰소리로 지금 가자니까요하니까 그제서야 그는 배를 잡고 웃으며 언제예라는 말은 괜찮다, 사양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 언제예와 같은 의미의 북한말로 오해를 산 적이 있다. 모 회사에 취직하여 첫 출근을 하던 날 사장님이 커피를 마시겠느냐라고 묻기에 일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은 즉석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훗날 내 말에 몹시 불쾌했다고 토로했다. 당신에게 볼 일이 없으니 자꾸 귀찮게 말 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50여년의 남북분단이 가져온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나는 매일 영어1단어, 한자 2자라는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공부했다. 그 결과 이제는 거리의 간판들과 신문이나 잡지를 어려움 없이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쇼핑할 때나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말 뜻을 몰라 얼버무려야 했던 지난 2년을 기분좋게 회상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한편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을 부여해준 정부와 국민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떳떳한 인생을 살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주위의 고마운 분들이 소개해 주는 좋은 회사들을 마다하고 신문에 기재된 직업모집란을 보고 모 식품회사에 응시하여 체인점 관리부 대리로 입사하게 되었다. 입사후 연수과정에서 나이가 10년이상 아래인 직원들에게 일을 잘못한다고 꾸지람을 들을 때에는 정말 화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감정을 억누르며 꾹 참았다.

 

1개월간의 공장연수를 마친 후에는 식당 손님접대와 주방일을 배웠는데 몸에 익숙치 않아 힘이 부쳤다. 하루종일 뛰어다니며 손님접대를 하고 나면 장단지가 심하게 부어 걷기조차 힘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하나,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나는 영영 이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곤 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느라고 힘은 들었지만 내게 제일 부족한 부분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원리를 배운다는 생각에 졸음과 싸웠다. 이러한 나의 노력 덕분인지 회사 입사 1년후에는 영업부 과장으로 1년반 후에는 차장을 거쳐부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지금은 조그만 회사의 오너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정착과정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북한에 두고온 부모 형제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그것이다. 특히 설날이나 추석, 생일에는 자연히 마음이 심란하고 우울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회사동료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내 자신을 이겨나갔으며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술을 멀리하였다

 

지난 2년간의 세월을 돌이켜보는 이 시점에서 자신의 노력과 열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인 한국에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 불쌍한 북한 주민들을 생각할 때면 그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이들을 위해 하루빨리 통일을 앞당겨야 할 것이며, 통일을 앞당기는 길은 바로 모든 국민들이 하나같이 자립심을 가지고 국가화 사회에 손을 내밀지 않고 짐이 되지 않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세계의 정상에 우뚝선 경제대국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글을 보시는 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탈북자들을 대할 때 이방인 취급을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탈북자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같은 한국사람으로 대하면 사회적응이 훨씬 빨라질 것이다. 국민들의 가슴속에 진정으로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자리잡을 때 남북통일의 대장정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20003월 이영훈

 

 

2004-11-18 00:14:34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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