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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는 행복을 만드는 요리사 - 한종구

작성년도 : 2002년 62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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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을 만드는 요리사

- 한종구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

 

나는 함경남도 어느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51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별 어려움 없이 내 꿈을 키우며 자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 노릇을 하며 마음껏 뛰놀던 그때가 그립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만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조국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그동안 알지 못했던 현실을 접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조국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앞날이 캄캄해졌다. 이런 현실에서 무엇을 꿈꾸며 살 것인가? 한숨만 나왔다. 이런 나에게 남한방송은 관심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자유가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럴수록 현실은 견디기 어려운 장벽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남한 라디오 방송을 청취한다는 사실이 당국에 적발되고 말았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도망하느냐.... 검거되느냐.... 정든 고향을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처벌을 받기는 싫었다. 결국 모든 미련을 버리고 북한을 탈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탈북후 이국을 떠돌던 3년동안 난 누군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늘 불안하게 지내야만 했다. 숨막히는 도망자 생활의 긴장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범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내 명이 길어서 인지는 몰라도 다행이 위기를 잘 넘겼다. 용기를 잃지 않고 버텨준 나 스스로가 대견스럽고 날 지켜주신 신께 감사할 따름이다. 힘겨운 고비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도해주고 있는 그 무엇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종교생활은 지금까지 나를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내가 선택한 인생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바로 자유의 땅을 밟던 20004월 어느날이었다. 그날 만큼은 국경을 넘던 고통과 이국땅에서 방황하던 시련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앞날에 대한 부푼 희망이 가득할 뿐이었다.

 

정착교육기관에 있을 때는 하루 빨리 사회에 나가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다. 서울에 정착후 한동안은 모두들 날 반겨주고 걱정해 주었다. 하루하루가 편안하고 힘들게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내 앞엔 또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과 모든 것이 다른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이 시작되었다. 사회정착교육을 마치고 텅빈 집에 홀로 누워 내가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왔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건 분명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러나 자유의 날개짓을 하며 살아보겠다는 막연한 의지만이 불타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경쟁해야 하는 현실을 체험하면서 그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의지하며 인생에 도전을 거는 일이었다.

 

남한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사회를 알아 나가는 정착과정이 그야말로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우선 대화 속에서 튀어나오는 북한 사투리는 남한 사람들과 너무 이질적이어서 날 당혹스럽게 했다. 말 뿐 아니라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가끔 정신적인 고통에까지 미친다. 어떻게 반만년을 한민족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문화가 50년 동안 이리도 많이 차이나게 되었을까?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많이 대화하고 부대끼며 알아 나가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빨리 기반을 잡으려고 급하게 서두르다 실패를 많이 했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 정착생활을 시작하며 최우선 목표로 정한 것이 우선 배우자!였다. 사회생활에서부터 인간관계, 문화생활 등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우선 직업을 구하기 위해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었다. 송파구에 있는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요리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며 공부했다. 직접음식을 만드는 일은 선생님의 지도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이론 수업은 이해가 잘 안됐다. 책에 나오는 용어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하긴 했지만 무조건 외우기로 하고 그날 배운 내용은 모두 머리속에 담아두려고 노력했다. 몇 개월을 익히다 보니 서서히 이론공부에도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 학원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한식조리사 시험에 응시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남한에서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단번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래서 지금은 한식당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내가 끓여내는 해장국을 맛있게 먹는 손님들을 볼 때마다 일하는 보람을 느끼곤 한다. 내가 마치 행복을 만드는 요리사가 된 것 같다. 일상의 격무로 지친 손님들에게 잠시나마 나의 정성을 곁들인 따뜻한 국물로 대접하는 주방장 일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난 인생의 반을 이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산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치열한 생존경쟁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난 이 사회의 초년병이나 다름없기에....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나와 같은 탈북자 출신인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린지도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우리 부부는 아직 2세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주위에선 나이도 많은데 자식이 없다고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뒤로 미루고 있다. 나는 어렵게 생활하고 있지만 후대는 좀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고 싶어서다. 튼튼한 기반이 있어야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부부는 둘다 취업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

 

힘들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하루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가정계획도 세우는 맛이 요새 새록새록 하다. 피곤한 몸을 쉬게 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이런 소박한 즐거움이 계속되고 발전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꾸려 나갈 것이다. 다시 고향에 가볼 수 있는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그날이 꼭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대한민국에서 다시 태어난 인생을 열심히 헤쳐 나가려 한다.

 

20022월 한종구 씀

 

 

2004-11-19 04:04:12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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