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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의 탈북 이야기 - 김한나

작성년도 : 2005년 578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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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탈북 이야기

- 김한나

 

 

사람들마다 다 가지가지의 사연들을 갖고 있다지만 우리 탈북자들처럼 쓰라린 과거와 현재를 안고 사는 이들도 아마 드물 것이다. 21세기 단 하나의 분단국으로 존재하며 그 속에서 또 제2의 분단의 아픔을 맛보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그 고통의 끝은 과연 어디 까지일까.

 

1. 도강을 하다

 

고요한 밤 정적을 깨뜨리며 우리 일행은 강가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허리를 가르는 두만강물속으로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건넜다. 도강을 하는 것이다. 그 때의 나의 머리에는 오직 빈 공간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강을 건넜는지 허둥대며 젖은 옷을 대충입고 그들과 함께 이끄는 곳으로 따라섰다. 한 밤중에 컹~~ 짖어 대는 개들로 하여금 이 늦은 밤에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음을 깨우쳐 줄 뿐이였다. 등하간지를 한 어느 조선족의 집으로 우리는 들어 갔다. 우리를 인도한 그들은 이 집이 자기 큰어머니의 집이라고 하였다.

 

그때는 왜서 그리 순진하기만 하였던지, 자기도 믿지 못한다는 저쪽 세상에서 살아 왔건만 그렇게 모든 것을 쉽게 믿었던 것이다. 중국으로 가면(당시는 5월이였으니 한창 농경기였다)하루 일당으로 중국돈 40원을 준다는 달콤한 말을 믿고 따라 나섰던 것이다. 하루 장사를 해도 우리돈100원을 벌기가 어려운 때라 중국 돈 40원이면 대충잡아도 우리 돈1000원이였다. 가서 단기간 동안만 고생하면 돈 좀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안고 모험의 길을 나섰다.

 

그들이 얘기하기를 자기의 친척이 중국에 있으니 그 쪽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도 다 알아 봐 줄 수 있고, 자신들은 경비대를 끼고 도강을 밥먹듯 한다고 ... 어느 정도 돈을 벌면 또 다시 자기들이 길안내를 하여 넘어 오게 해주겠다고...

 

그 때는 다 같이 어렵게 사는 때라 정말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려나 하고 고맙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겉과 다른 검은 속심이 들어 있을 줄 꿈에나 생각했으랴. 이렇든 저렇든 도강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자 나는 평시에는 꿈도 못 꿀 월경이라는 모험길에 올랐다.

 

"돈이 원쑤다"라는 말들을 흔히 하듯이 그 때에는 하도 힘든 생활을 하는 때라 그러한 것들이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넘었던 길 이제는 정정 8년 세월이 흘렀다.

 

2. 내가 겪었던 첫 고통들

 

중국물품이 많이 들어와 시장을 휩쓸 때라 중국이 우리 보다 잘 사는 나라라는 것 밖에 몰랐던 나로서는 이 곳의 생활의 어쩜 우리와 이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 지에 놀라웠다. 명절이나 되여야 준비했을 밥상을 이 곳에서는 매 끼를 마주 하는 것이였다.

 

이 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니 새 옷을 주며 갈아 입으라고 하였다. 새 옷이 내가 입은 옷 보다는 좋기는 하지만서도 내가 땀 흘려 번 돈으로 마련한 옷을 버리는 것이 웬지 몹시 서운하였다. 시내로 들어 온 이후 나는 그들이 우리를 팔아 넘기고 갔다는 것을 알았다. 믿었던 사람들한테 사기를 당하고나니 그 보다 더 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때는 늦은 법, 그렇다고 경거망동하며 뛰쳐 달아 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였다. 말도 모르는 형세도 모르는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곳을 마구 다니다가는 내가 이루어 보려던 그 달콤한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붙잡힐 수도 있었다.

 

그 다음은 불법월경자로 북송되여 어떤 처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현실에 적응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후 그들의 소개로 북부도시의 조선족남자를 만나 알게 되였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살게 되였다.

 

죄 아닌 불법월경자라는 죄를 짓고 살아 가는 나로서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웠다. 감금아닌 나 스스로의 감금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왜나면 언제 어디서 붙들려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될수록이면 그러한 모멘트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평범한 생활속에서 나의 첫 시련은 다가 오고 있었다. 24시간을 48시간으로 쪼개며 열심히 뛰며 살던 나에게 안일이 찾아 오니 몸속이 병마가 머리를 들고 일어 났다.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만성맹장염이 나를 괴롭혔다.

 

다행히 집안 분들이 고마움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잘 되였으나 이번에는 또 척추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가 말하기를 제때에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앞으로 실변을 할 수도 있으면 나아가서는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였다.

 

정말로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가진 것도 없이 이 몸 하나 뿐인데 자력할 수도 없는 병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 간다면 죽기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죽음을 결심하고 수면제를 먹기도 했으나 죽음은 그렇게 아무에게나 선택의 권리를 주지는 않았다.

 

그 후 우려하던 일들이 내 몸에서 생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장기간 약을 복용하며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매 달 투여되는 적지 않은 약값과 앞으로 닥쳐 올 수 있는 후환 때문이여서인지 집안 사람들이 저를 멀리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눈물로 그와 혜여져야만 했다.

 

내 처지가 처지인 것만큼 그들이 나를 멀리해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 후 나는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사랑과 인도로 세상을 내다보며 살아 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였다.

 

특히 한 한국 집사분은 나의 처지를 가슴아파하며 한국에 있는 교회형제분들과 연계하여 장기간 복용 할 수 있는 약도 보내 주셨다. 그러한 사랑으로 나는 오늘날 건강한 몸으로 이 곳의 그 누구와도 다름없는 사회의 한 성원으로 살아 가고 있다. 차츰차츰 세상을 대하는 대담함도 생겨 혼자 몸으로 여행을 결심했다.

 

3. 차 안에서 만난 또 다른 탈북자들

 

고향을 더 가까이에서 접하고 싶어 나는 연길로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언니들이 배웅을 받으며 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 올라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웬 남자분이 나에게 다가와 귀속말로 자리를 교체하자는 것이였다. 자기들은 지금 탈북자들을 북송중인데 구입한 좌석표가 다음줄로 이어지는 좌석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간단히 양해를 구하고 막무가내로 내 짐을 옮겼다. 나는 그 순간 그 처럼 위험의 대상으로 여겼던 공안원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 더구나 그들이 지금 나와 같은 처지의 탈북자들을 북송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놀랐다.

 

하지만 긴장감은 곧 풀어졌고 북송된다는 탈북자들에게 마음이 쏠렸다. 50대의 체구작은 아줌마와 20대의 여자, 그리고 30대 중반의 여자 셋이 서로의 손에 족쇄를 채운 채 담담히 앉아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속에 있는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나와 옆에 자리를 함께 하고 가는 사람들 역시 조선족들이였다. 조선족이 그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30대의 아줌마는 어린아이의 사진을 꺼내 보며 울고 또 울었다. 어린 자식을 떼어 놓고 가는 생리별의 아픔을 그 녀는 그렇게 눈물로 토로했다.

 

공안원들은 자기들은 과일을 사 먹으면서도 그 녀들에게는 권하지조차 않았다. 식사는 했냐고 물으니 아침도 굶고 점심도 이렇게 건네는 것이였다. 나는 열차 식당칸으로 달려 가 라면과 간단한 음식을 사다가 그들에게 권했다.

 

나는 그때 어디서 그런 힘이 동했는지 몰랐다. 그저 나와 같은 불쌍한 그들을 이렇게 굶으면서 떠나 보낼 수는 없다는 한 가지 마음 때문에 잠시 자신의 신분을 잊고 행동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처벌이 기다려질 그 곳으로 가는 그들을 도와 줄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도문역에 도착하자 그들은 호송원들에게 끌려 그렇게 나와 헤여졌다.그 때의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였을까. 재 탈북하여 한국행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아 가고 있는지, 아니면 나 처럼 중국의 어는 곳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는 것인지...

 

정말로 아직도 어디엔가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굳세게 살아 가길 바랄 뿐이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속담의 진리를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실화인것이다.

 

그 누가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 땅에서 친척친우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 가길 원하지 않는 이가 있으며 그 누가 이국 땅에서 이러한 설음을 안고 살아 가길 원하는 이가 있겠는가.

 

단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으로 내닫게 하였는가. 이 답을 아마 탈북자 여러분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이루어 지는 그 땅에서 헤어진 부모형제들과 행복히 살아 갈 그날을 위해 우리 모두 꿋꿋이 살아 갑시다. 나 자신도 래일에 고향 땅에서 헤어진 형제들과 만날 날을 기대하며 비록 힘든 오늘에 있을 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힘차게 살아 가렵니다.

 

2005329일 김한나 중국에서

 

 

2006-03-30 10:41:02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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