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북동기는 ‘도둑질’ - 이성우
작성년도 :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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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의 탈북동기는 ‘도둑질’
- 이성우
6개월간의 국정원 조사를 거친 나의 ‘탈북동기’는 아래와 같이 규정지어졌다.“개성학생소년궁전에 보관 중이던 ‘김정일 선물악기’ 도난사건과 관련하여 책임 추궁을 받던 중 탈북하였음.”결국 도둑질과 연계된 탈북자가 되었고 자연히 탈북동기 또한 도둑질과 결부되게 되었다. 도둑질이라...하긴 북한에서 생활할 때 무던히도 많이 했던 도둑질이다. 따지고 보면 그놈의 도둑질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생존 수단이기도 했다.담력을 키우기 위한 도둑질평양에서 자라 평양에서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열일곱 살 되던 해, 인민군대에 나간 후로는 생각이 달라졌다.무엇이든 훔쳐야 살 수 있었다. 인민군대에서의 도둑질은 공공연한 삶의 수단이라는 것을 깨우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개월간의 신입병사 훈련을 마치고 본대로 배치 받았던 1978년 가을에 있은 일이다.하루 훈련을 마치고나니 피곤이 엄습했다.“취침”구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곯아떨어진 나를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부분대장 명석이었다.“부분대장동지...” 잠결에 헛소리처럼 되뇌고 있는데, “쉿!”하는 소리와 함께 부분대장의 손이 나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다.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를 따라 나서라는 것이다. 잠에서 채 깨지 못한 상태로 부분대장을 따라 병실 밖을 나서는데,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마대자루 몇 개를 나에게 걸머지운다.이어 우리는 중대 부업용 달구지를 끌고 인접마을 과수원으로 갔다.달 밝은 밤이어서 과수원 전체가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조금 먼발치로는 경비 막까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사과는 모두 수확한 상태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야심한 밤에 과수원을 어슬렁거리고 있을지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부분대장이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하듯 속삭였다.“빨리 퍼 담으라!” “???”그러고 보니 발치에 뒹구는 고구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농민들이 사과나무 사이에 심어 놓은 고구마들을 캐놓고 미처 창고에 들여가지 못한 듯 했고 부분대장은 그 고구마들을 나에게 담으라는 것이었다.“이건?!” “이 새끼 뭘 꾸물거려. 빨리 퍼 담지 않고!”한 대 때리기라도 할 기세로 부분대장은 눈을 부라렸고 나는 엉겁결에 고구마를 마대에 퍼 담기 시작했다.그렇게 4시간 정도를 정신없이 돌아치다보니 어느덧 동편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가자!”그렇게 부분대장과 나는 온 밤 도둑질을 하여 확보한 고구마 여덟 마대를 달구지에 싣고 부대로 돌아왔다.아무런 설명도 없이 암묵적으로 진행된 ‘야간 행동’이지만 나는 이것이 인민들의 재산에 손을 댄 도둑질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혹시 이 사실이 드러나면 중대장이나 정치지도원으로부터 추궁은 물론 처벌까지도 받을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하지만 그것은 군대생활에 대한 파악이 전혀 없는 나의 기우였다. 부분대장과 나는 이튿날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대장의 배려 섞인 지시대로 하루 종일 낮잠을 자는 것은 물론 며칠 후, 중대장 사모님으로부터의 특별 초대를 받고 저녁대접까지 받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그날 저녁, 부분대장 명석이 나의 등을 툭 치며 이야기 했다. “그 고구마 중대 군관들 집에 나누어 주었어. 2마대 씩. 그리고 그거 담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쯤으로 생각해 두라고. 딴 데 가서 절대 말하지 말구. 알았지?!”도둑질에는 다 이유가 있다.3년차가 되면 제법 ‘구대원’ 소리도 들을만한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10년 정도 군복무를 해야 하는 북한군의 실정상 3년 정도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군복무 3년차 쯤 되던 어느날, 곤히 잠든 나를 또 다시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이번에는 분대장 형석이었다.“분대장 동지?!” “조용히 나를 따라 와. 아무소리 말구.”그렇게 분대장을 따라 간 곳은 부대 인접 마을의 목공소였다.목공소에 도착한 분대장 형석은 아무 말 없이 가지고 갔던 ‘빠르’(못을 뽑을 때 쓰는 목수 도구)로 목공소 뒤쪽의 조그만 뙤창문을 뜯어 버리는 것이었다.그리고는 날 더러 창문을 넘어 들어가 안에 있는 목수도구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예? 목수도구를요?!” “야가 이어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가져오라면 가져 올 것이지.”결국 그날 저녁 리(북한 농촌마을의 말단 단위)목공소의 목수도구 일체를 도둑질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나는 단숨에 ‘구대원’ 소리를 듣게 되었고 분대장의 신임을 독차지 하게 되었다.그럼에도 ‘인민의 재산을 훔쳤다’는 죄책감으로 찜찜해 하고 있는 나에게 분대장이 불쑥 이런 말을 내 뱉는 것이었다.“그 목수반장새끼 말이야. 내가 며칠 전에 대패 좀 빌려달라니까 다짜고짜 안된다는 거야. 군대가 빌려 가면 대패 날 싹 다 배린 다나. 그런 새끼들에겐 인민군대의 본때를 보여주어야 된단 말이야. 내말 틀려?!”보충 형 도둑질6년차 나도 부분대장이 되어 제법 대원들을 거느린 하사관이 되었다. 대원 일곱 명을 거느린 부분대장으로써 제법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문제’가 발생했다.토요행군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기재 점검을 하는데 분대의 막내 허철이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뭐야, 문제 있어?” 그러는 나에게 허철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부분대장 동지, 제 무기에 소제대가 없어졌습니다. 행군하다가 어디서 흘린 것 같은데” “뭐야!?”한바탕 욕을 퍼 부은 나는 허철이를 포함한 대원 3명과 함께 방금 걸었던 행군 노정을 되짚어 갔다. 행군이 주로 평지에서 진행되고 한 5리 정도 과수원 길을 지나쳤으니까 소제대는 아마 과수원의 어느 나뭇가지에 걸려 있으리라.하지만 허철이가 잃어버린 무기 소제대는 과수원 길을 포함한 행군 길 전 노정을 흩고 또 흩어도 나타나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새벽녘 중대로 돌아오는 길에 허철이에게 명령하는 수밖에 없었다.“보충해!”그리하여 허철이가 훔친 소제대는 분대와 분대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전 중대에 도둑놈을 양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형형색색의 도둑질사병생활 10년여에 못해본 도둑질이 없고 경험해 보지 못한 도둑질이 없을 정도다.해마다 농촌지원에 나가서 군인들이 해 먹는 ‘콩청대’. 이는 ‘공개형 도둑질’에 해당한다.어느해 가을 ‘도토리 작업’(식량대용으로 도토리를 따는 작업)때는 개인별 과제가 너무 아름차(1인당 하루에 30키로 그램의 도토리를 따오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다) 중대 전원이 학생들이 따온 도토리를 훔쳤던 ‘집단형 도둑질’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한번은 우리 소대가 독립임무를 받고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소속 감나무 밭을 지키려 나갔던 적이 있었다.10만 정보나 되는 감나무 밭의 귤 감 모두가 우리 것이 되고 말았다. 소대장은 소대장대로 대원들을 시켜 감나무 밭을 작살냈고 어린 전사들조차 제 몫을 챙기기에 감나무를 흔들어 댔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었으니 이런 경우는 ‘파렴치형’에 해당되는 경우다.노동당 입당과 상급학교 진학, 승진을 위한 도둑질도 있다. ‘입당형 도둑질’은 주로 중대정치지도원의 부인이 타깃이 되는 고로 농장탈곡장이나 개인집에서 옥수수나 쌀을 훔쳐 가져다 바치는 경우다.상급학교(제대 후 대학추천을 뜻함)진학을 위한 ‘진학형 도둑질’에는 주로 민간인들의 돼지가 희생양이 된다.더하여 군관들이 주로 이용하는 ‘승진형 도둑질’은 그 비중에 따라 소대와 중대, 대대 군인 전체가 동원되어 제법 통 큰 작전이 벌어지기도 하지 않았던가.암묵적인 도둑질내가 군단선전대 작가로 임명되어 부대로 배치 받은지 꼭 1년이 되던 어느 여름이었다. 나보다 6년이나 선배인 선전대 대장과 작곡가가 약속이나 한 듯이 상기된 얼굴로 내 방에 들어서는 것이었다.당시 나는 선전대 작가 겸 세포비서를 겸하고 있어 입당문제나 공연준비로 배우들과 군관들이 때 없이 방문을 두드렸지만 이렇게 지휘관들이 동시에 들어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었다.궁금해 하는 나에게 선전대 대장이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아무래도 세포비서를 맡고 있는 작가동무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이야기인데...”사연인즉 “선전대 악기가 국산제다 보니 아무리 기량훈련을 강조해도 효과가 없고... 악기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공연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방법이 있습니까?”“있지”라고 말꼭지를 뗀 선전대장의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자신의 고향인 개성학생소년궁전에 재일교포가 기증한 일본산 악기(야마하)가 있는데 그걸 가져다가 공연활동에 이용하자는 것이었다.“악기를 훔쳐 오자고요?!” “이사람 왜 이렇게 흥분하면서 그래?! 누굴 도둑놈으로 알아? 소년궁전 애들이 일제 악기가 아까워서 사용도 안하고 보관만 하고 있으니까...우리가 잠시 가져다가 공연활동에 활용하자는 거야. 왜? 안 돼?!”상황이 이쯤 전개되면 세포비서가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누구 개인이 먹자는 것이 아니라 선전대 공연을 위한 것이라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한단 말인가.결국 개성이 고향인 선전대 대장과 악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작곡가, 그리고 때마침 선전대에 손풍금 강습 차 나와 있던 정찰대대의 정찰병 다섯 명이 군용트럭을 몰고 개성으로 갔고, 개성학생소년궁정의 일제 악기를 싹쓸이 해 돌아왔다.보기만 해도 눈부신 일제 악기들 속에는 나서 처음 보는 전자바이올린과 2차원 오르간, 구색을 겸비한 드럼세트까지 정말 없는 것 없었고 어떤 악기들은 손때하나 묻지 않은 새것들임을 은연중에 자랑하고 있었다.그렇게 ‘잠시 가져온’ 악기들의 출처를 군단 내 관련 지휘관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선전부 담당 지도원은 물론 군단선전부장과 정치부장, 지어는 군단정치위원까지 은근히 선전대장과 작곡가를 칭찬하는 눈치였다.“들키지만 않으면 영웅”이라는 인민군대의 실정이 그대로 투영된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그런데 그때로부터 3년 후, 군단선전대에 총정치국 신소처리과 간부들과 중앙당 지도원들이 들이 닥쳤다. 누군가의 투서에 의해 이름 하여 ‘악기 사건’이 신고 됐고 주역이었던 선전대장이며 작곡가가 출당 제대라는 지상 최대의 처벌까지 받게 되었다.불명예 제대된 선전대장의 대리임무를 수행하게 된 나도 한동안 부대 정치부를 들락거려야 하는 신세에 처했고, 겨우 세포비서로서의 책임을 면했다 싶던 순간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부대 전체 지휘관들과 심지어 내가 거느리고 있던 선전대 배우들까지 문제의 ‘신소편지’를 쓴 장본인으로 나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왠지 주변사람들의 눈치가 이상했다 싶던 때었음으로 그러한 내막을 밝히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선전대 대장자리가 탐나 총정치국에 신소편지를 썼다”는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 있었고 사건 이튿날부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열한 인간으로 낙인 되어 있었다.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나의 처지는 더더욱 비참해 지고 있었다. 평소에 “군단에 단 한명 뿐인 작가”라고 그토록 나를 치켜세우던 정치위원으로부터 선전부장에 이르기까지, 지어는 내가 입당보증을 준 선전대 배우들조차 대놓고 나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엎친 데 덮친다고 2년 전 남쪽에 있는 삼촌들을 찾겠다고 중국 조선족을 통해 보냈던 편지문제까지 새롭게 불거지고 있었다. 당시 내가 데리고 있던 서버 작가(창작조원)의 고향이 새별이어서 그의 조선족 친척을 통해(남조선으로)편지를 주고받은 적 있는데 보위부에서 이 사건을 새롭게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그러한 소식을 친구였던 보위지도원으로부터 듣는 순간 그나마 품고 있던 미련마저 송두리째 날아가고 말았다. 평소 이용할 대로 이용하다가 문제가 터지자 덮어두었던 문제까지 끄집어내어 나를 흔들어대는 지휘관들의 처사에 환멸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에필로그나는 탈북을 결심했고, 결심한 이튿날 부대를 떠났다. 부대를 떠나던 전, 마지막으로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평소와 달리 근무성원들까지 모이라는 나의 지시에 마지못해 교양실 책상에 모여 앉은 대원들...그 마지막 ‘정치상학’시간에 나는 “영웅은 되지 못할망정 도둑놈은 되지 말자”는 부제목으로 상학(북한군 내의 정치학습)을 진행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대원들에게 16년의 군 복무를 통해 내가 경험했던 도둑질들을 모두 나열했고 근간에 벌어진 ‘악기사건’을 개괄했다.인민군대에 만연한 도둑질도 도둑질이거니와 군대와 인민, 그리고 군인들 사이에 발생하는 후과와 폐해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곁들였다. 그리고 이런 말로 끝을 맺었던 것 같다.“이제 헤어질 때가 된 것 같다. 너희들과 마주서서 이야기 할 기회가 다시 있을지 모르겠지만 작가로서 이말 만은 남기고 싶다. 도둑질 한 사람보다 도둑놈을 고발했더라는 사람을 더 경멸하고 있는 너희들의 마음에...경의를 표한다. 증오의 대상을 잘못 선택했더라고 뉘우칠 날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지금의 내 심정은 그 누구도 용서할 것 같지가 않구나. 잘들 있어라.”당시 우리부대(선전대)가 평양-향산간 고속도도로 건설장에 나가 있었고 부대 지휘관들은 신계에 위치한 본부대로 들락날락 하던 실정이어서 나의 마지막 발언을 부대로 들어가면서 남긴 이야기쯤으로 들은 사람들도 있었을 터, 하지만 나는 그 길로 북중 국경지역인 혜산으로 향했고 3년간의 기나긴 노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의 입국에 골인했다.그러한 나에게 탈북동기를 묻는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껏 자자구구한 사연을 설명할 길이 없어 그 땅에 환멸을 느껴서 탈북 했노라고 말하곤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이글을 빌어 탈북동기란에 한 단락 더 적어 놓고자 한다.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하는 그 사회에서 사람은커녕 짐승이 되기가 십상이어서 나는 탈북 했노라고.
2012년 5월 이성우
2012-11-25 18:33:28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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