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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아버지생각 - 김길선

작성년도 : 1999년 586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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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생각

- 김길선

 

 

무릇 딸자식은 어머니편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예외입니다.

저는 이날 이때까지 우리 어머니가 생 질색하시는 술주정까지도 포함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분을 이해하고 위로해줄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찍어 자부하면서 아버지를 받들어 왔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일에서나 가타부타 없이 아버지를 지지 대변해 나서는 저에게 "노동당에서 되라는 는 걸써 되고 투철한 가 되었다."고 자랑반, 심술반의 욕설을 곧잘 하였습니다. 은 저의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늘 저를 보고 하고 아쉬움과 대견함이 뒤섞인 칭찬을 하셨으며 제가 어른이 되가는데 따라 크게 의지하시었습니다.

우리 5형제중 중학교 졸업 당시까지도 병이 나면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병원 출입을 한 자식은 막내도 아닌 맏이인 저입니다.

아버지는 외형부터도 키가 크고 헐끔하게 잘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형제들은 튀어나게 체소하신 어머니를 닮아서 하나같이 키가 작고 가무잡잡합니다.

이런 연고로해서 어머니가 제일 싫어하신 것은 한창시절의 아버지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오롱이조롱이 우리 형제를 쪼르르 세워놓고 낙심천만한 표정으로 "종자는 참 좋은 종자인데 연단씨가 망쳐놨다"고 건주정을 부리시는 것이었습니다.(연단: 어머니 아명)

우리 아버지는 술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오랜 음주생활을 지켜보면서 날로 측은하게 여긴 것은 아버지가 50대 이전에는 취기가 오르면 노래도 즐겨 부르고 말씀도 곧잘 하셨는데 그 후부터는 점차 자주 우시고 말씀이 적어지신 것입니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해가 다르게 쇠잔해 가시는 모습을 대하면서 저는 인생이란 과연 일장춘몽 이구나하는 아쉬움과 허무감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1932년에 함경북도 나진에서 쌍둥이 형제로 태어나셨습니다. 일제시대에 조부모님을 따라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신 아버지는 9살 때 벌써 소를 몰고 밭갈이를 하며 조선이 지척인 개산툰에서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시었습니다.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졌을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18세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중국공산당의 항미원조 보가위국호소에 따라 중국인민지원군 탐지기부대에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탐지기부대가 무슨 부대인지, 아버지는 전쟁 전기간 국방군이나 미군의 콧등도 보지 못했답니다.

전후 부대와 함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제대배낭을 메고 할빈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자습을 한 실력으로 할빈 공업대학에 입학하여 "분석화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서로 대학동창생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551월에 결혼하셨습니다.

언젠가 아버지는 역시 술을 마시고 취기가 잔뜩 오른 상태에서 어머니와의 결혼 담을 묻는 저에게 "네 엄마가 머리가 빨리 돌고 엉치가 가벼워서 데리고 살게 되었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대학졸업 후 에서 일하다가 1964년초에 북조선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투쟁을 하였던 아버지의 누님 내외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연줄로 아버지도 즉시 조선인민군 군관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군내 정치보위부에서 조선인민군 대좌로까지 승진하시었다가 1989년에 제대되었습니다.

미제의 가슴팎에 복수의 총창을 박는 심정으로!,한손엔 총을, 다른 한손엔 낫과 마치를!이라는 호전적인 주민의식 속에서 자란 저는 군관복을 입으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남다른 긍지를 느끼며 자존심을 키워 왔습니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은 제 또래 아이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저의 학생시절에 학교에서 조직하는 학부형 회의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하신 사실 하나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학부형 회의에 아버지들이 참가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들은 집에서 낮잠을 자면서도 집안 일을 도맡아 하느라고 늘 바쁜 어머니들을 우격다짐으로 학부형 회의에 떠밀어 보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자식들의 성화에 못 견디어 어쩌다가 학부형 회의에 가보면 거의가 아주머니들 아니면 꼬부랑 할머니들만 주른히 앉아 있으니 가부장적 위신을 중히 여기는 북한의 아버지들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학부형 회의에 즐겨 참가하셨습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이 부탁하신 일들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고 수단껏 풀어주시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열성을 보고 선생님들은 9살에 귀국해서 늦게야 한어를 배운탓에 학업 성적이 겨우 보통수준이었던 저에게 계속 최우등을 주어서 진급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과 관심은 우리 5형제중 저에게만 행해지는 일변적인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이에 대해 항의를 하러들면 아버지는 "맏자식만 잘되면 그 밑의 것들은 저절로 일이 잘돼!"하고 그분만의 논리로 일축해 버리곤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자식들이 다 자라서 당시 일정한 직위에 있은 아버지에게 직업문제를 의논하러들면 단마디로 "네 능력으로 해결해라!"아니면, "국가에서 보내주는데로 가라!"고 결론을 주시었습니다. 오늘날 시집, 장가를 간 동생들은 어쩌다가 아버지와 마주하는 술상에서 날로 어려워지는 생활형편을 두고 "아버지가 힘이 있을 때 다른 아버지들처럼 재산도 좀 모으고 우리를 먹을 알 있는 직업에 밀어 넣어 주셨더라면...하고 은근히 아버지를 원망하려 들곤 합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정의와 양심은 살아서 "그런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다!"고 자신의 처사를 정당화하곤 하십니다.

제가 아버지의 진정한 아픔을 알게 된 것은 탈북하기 일년전 추방지에서 평양으로 가만히 새여 들어가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햇볕에 타고 굶주려서 사람 꼴이 아닌 모습으로 딸자식과 함께 나타난 저를 보고 너무나 기가차서 술을 마시고는 그냥 우시었습니다.

아버지는 깊은 밤 저를 불러 앉히고 당신께서 30여년의 헌신적 군관복무 기간에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받은 한바가지나 되는 훈장과 메달을 앞에 쫘르르 쏟아 놓으며 탄식에 젖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받은 대가이다. 그런데 이 훈장을 다 털어 주겠대도 쌀 한키로 내놓을 사람이 없구나..."

우리 아버지의 뼈 저리는 아픔은 그 말씀속에 있었습니다.

인생의 4/4분기에 와서 감수한 그 허무한 마음에 그렇게도 정성을 쏟아 부은 이 딸의 추방과 탈북으로 아픔과 고통이 더 무거워 지셨을 우리 아버지.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서서 보고싶고 또 보고싶은 아버지를 그려보느라면 멀리 어디선가 아버지의 분명한 아픔이 저의 가슴에 와 닿곤 합니다. 그것은 나무람도 원망도 아닌 저를 향한 기원과 구원의 호소입니다. 지금도 서울시내를 거닐다가 저의 아버지 나이의 늙은이 아닌 늙은분들을 대할때면 저는 어두운 마음으로 반성하곤 합니다.

 

제가 아버지의 소원을 플어드린 것이 있다면 환갑상을 차려드린 것도 아니요, 19897월에 제수단껏 우리 아버지를 제2자연과학원 대표단에 망라시켜서 중국과 마카오를 여행시킨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것이 외국 여행인데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인가고 의아해 할 수도 있는데 북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돈에 팔촌까지도 조사하는 신원확인, 업무확인, 여행목적 확인으로부터 시작해서 홍문까지도 보여주어야 하는 신체검사, 적성연령여부 등 그야말로 열두 대문을 거쳐야 들어가는 옛말속의 보물궁전처럼 거의 한달동안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김정일의 까지 받아야 여권을 쥐게 됩니다. 서민들은 돈이 한 마대가 있어도 꿈을 못 꾸는것이 외국 여행입니다. 게다가 그때 저의 아버지는 이미 군에서 연령 제대되어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만족스럽게 치른 김정일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연이어 모든 부, 위원회, 단위들에서 외국의 연줄들을 찾아내어 교류를 활발히 벌이고 외화벌이도 할 데 대한 혁신적인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사돈간이 되는 중국 북경의 동방경제기술개발공사총 이사의 연줄로 아버지를 제2자연과학원 원장에게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외국의 힘있는 줄들을 잡지 못해 적극 수소문하던 원장은 우리 아버지를 불시에 제2자연과학원 대표단에 망라시켜 북경을 거쳐 마카오까지 보름간이나 함께 동행했습니다.

1964년에 북조선으로 들어간 후로 25년만에 처음으로 나라밖을 벗어 나온 아버지는 비행기를 타고 중국의 수도 북경과 유명한 마카오를 여행한 것을 두고두고 자랑하시었습니다. 그 일은 철통같이 폐쇄된 북조선에서 제가 우리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제일 큰 기쁨이고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준 제일 큰 슬픔은 무엇일까.

제가 탈북으로부터 한국으로 이어진 15개월이라는 방황의 길에서 속이 타서 술을 마실때마다 자주 떠올리고 가슴을 허빈 것은 저의 가족이 추방령을 받고 친정집에서 평양의 마지막 밤을 보내던 날, 하늘같이 받들던 아버지에게 난생 처음 통곡을 하며 밸 풀이를 한 일입니다.

그날 저는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고 밥을 좀 먹으라고 따라준 술 한 고뿌를 맹물처럼 들이키고는 저의 일을 두고 "이제 보위부가 몇 년동안은 감시를 하니 발언을 특별히 주의하고 사람을 잘 사귀라"는 등을 안타깝게 훈시하는 아버지를 향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아버지까지도 그러는가"고 악을 쓰며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때 억장을 뿜어내듯 깊은 한숨을 쉬며 슬퍼하시던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지으라고 해서 진 죄도 아닌데, 아버지의 잘못은 정녕 하나도 없었는데 저는 북한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가뜩이나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께 퍼부었던 것입니다.

이 시각도 저는 울먹이며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게 된 진의도는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지혜와 과학의 힘으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런 희한한 사건이 제에게서도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아버지가 우리 가족이 19978월 탈북하기 며칠전과 19991월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날 밤에 저의 꿈에 나타나셔서 제가 갈 길과 맞닿을 일들을 하나하나 똑똑히 예언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의 꿈속 예언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현실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과 관심은 이처럼 시간과 공간까지도 초월한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아버지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어는 서로 생사여부조차 모르고 있어도 푸른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사랑하던 이 딸을 굽어보시며 걸어간 가시 길을 헛되이 하지 말고, 통일을 위해, 민족을 위해 뜻 있는 일을 하라고 축복을 뿌려주고 계십니다.

복잡하고 긴장한 하루일과를 마치고 깊은 밤 침상에 들때마다 저는 항상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나 뵈올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귀를 기울여 어린 시절에 듣던 아버지의 구수하면서도 취기 어린 노래 소리를 가려내며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어데선가 석쉠한 아버지의 노래 가락이 자장가처럼 들려옵니다.

눈이 내린다.

흰 눈이 내린다.

 

1999년 김길선

 

 

2004-11-18 00:02:3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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