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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강제북송-나의 가족 이야기

작성년도 : 2020년 1,16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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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북송-나의 가족 이야기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은 언제 봐도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향긋한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의 봄꽃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개나리꽃과 벚꽃입니다. 창문을 열면 아름답게 활짝 핀 봄꽃의 향기가 코를 찌를 듯합니다.

 

아름답고 향기 그윽한 한 송이 꽃의 향을 맡으면서도, 때로는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또 좋은 옷을 입으면서도 천국 같은 이곳 한국생활이 인제는 9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지만 아직도 저는 가슴에 남아 있는 아픈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고향은 평양입니다. 평양에서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출발하면 이곳 서울까지 길게 5시간이면 올 거리를 저는 6년이란 긴 세월을 거쳐 2003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6년이란 시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있으나 저에게는 너무도 길고 험한 세월 이었습니다. 6년이란 세월,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 너무도 이른 어린 나이에 상처투성이만을 안고 이곳 한국으로 오는 몇 시간 안 되는 비행기에서 북한에서의 받은 세뇌 교육 때문에 조금 착잡했습니다.

 

하지만 친척 하나 없는 물설고 낯 설은 이곳 한국에 와서 너무도 열심히 잘 적응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늬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저는 이곳 한국에 와서 부자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딸 두 명 아들 한명 저를 포함한 우리 식구4명이 왔지만 인제는 두 사위도 생겼고 두 손자도 생겼고 이제 9월이면 또 한명의 손자가 생깁니다.

 

북한에서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고 영화나 화보의 그림한장에서 눈요기로나 볼 수 있었던 행복한 새 삶을 살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국민들에게 항상 감사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북한계급 교양 자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하면 행복 할수록 지난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어찌 보면 제 생활에 딱 맞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의 행복한 새 삶에서 어떻게 지난 과거, 능력 없는 부모가 된 탓에 금쪽같은 내 아들에게 풀독을 먹여 다 죽게 했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을 수 없게 가슴 아픈 상처를 줬고 북한에 강제 북송되어 짐승보다도 못한 수모와 받은 멸시에 대해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1997년 큰딸을 찾아 16살의 어린 작은 딸에게 의지해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그야 말로 두만강은 우리 탈북자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피눈물이 흐르는 원한이 사무친 피눈물의 강입니다.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다가 힘이 없어 세찬 물살에 떠내려 죽은 이들도 있고 두만강을 넘다가 북한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이도 있고 두만강을 넘다가 빠른 물살에 떠내러 가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살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두만강을 어린 딸과 함께 빠른 물살에 밀려가면서도 우리 모녀를 살려 달라고 하늘 땅 할아버지를 애 타게 불렀고, 겨우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며 두만강을 건너 왔지만 우리를 기다린 것은 인신매매꾼들이었습니다.

 

살을 베이는 듯한 차디찬 물속에서 나온 우리 모녀는 금방 가을한 논밭에 들어섰습니다. 뾰족뾰족한 벼 뿌리에 발이 찔러 발바닥에서는 선지피가 흘렀고 온 몸이 얼어 걷지 못하는 어린 딸의 귀뺨을 때려가며 불이 켜 져 있는 어느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집 주인이 바로 인신매매꾼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모녀는 그들을 통해 결국에는 팔려 가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1998년부터는 북한에서 탈북여성들을 강제 송환해 함흥 오로군에 수용소를 만들어 가두었고 공개 총살을 진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만강을 넘는 북한 여성들의 수가 적어지자 중국에는 인신매매꾼 보다도 더 한층 악랄한 납치 꾼들이 생겨났습니다. 납치 꾼들은 중국에 이미 팔려 와서 살고 있는 북한 탈북여성들을 사람들이 곤히 잠자는 야밤에 납치 해다가 다시 길림이나 산둥 성 내 몽고 쪽에 비싼 값으로 팔아먹는 놈들이었습니다.

 

19997월에 저는 작은딸과 함께 하루 종일 밭에 나가 밭일을 하고 힘든 몸으로 저녁에 한국드라마를 시청하던 중 불의에 침입해 들어온 납치군 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됐고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는 팔려 가지 않겠다는 말다툼하는 과정에 옆집의 신고로 공안에 잡혀 화룡 변방대로 끌려갔습니다.

 

도주한 납치공범들을 잡기위해 한 달이라는 기간을 딸과 함께 화룡 변방대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쪽잠에 들었다가 아주 작은 울음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일어나 보니 저보다 나이가 3살 위인 고향이 무산인데 딸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중국 한족 집에 팔려 갔는데 딸과 함께 있으면 둘이 다 잡혀 강제 송환 되기 때문에 딸은 다른 마을에 보냈다고 합니다.

 

그 언니는 나이 많은 한족과 함께 하루 종일 두부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농사 삯일도 하면 살다가 그만 공안에 잡혔다고 했습니다. 변방대 에서는 딸이 살고 있는 곳을 대라고 매일 밤마다 불러내다가 고무 몽둥이로 때렸다고 합니다. 저에게 옷을 벗겨 보여 주었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고무 몽둥이로 맞은 온 몸에는 살색이라고는 얼굴 부위만 내놓고는 잔등과 엉덩이, 그리고 어깨며 온 몸이 말할 수 없이 석탄 색깔보다도 더 했습니다. 뭐라 할 말문이 막히고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변방 대에 한 달 동안 수감되어 있는 기간 너무도 1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탈북여성들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습니다.

 

화룡 변방대 구류장에 수감되는 탈북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북한으로 강제 북송하는데 한 번에 때로는 10명도 넘었습니다. 청진이 고향인 한 남자는 한 가장의 가장이었는데 두 다리 없는 장애를 가진 아내를 등에 없고 1살 된 막내 딸애는 앞에 업고 영양실조에 걸려 똥물을 질질 싸는 3살짜리 5살 짜리 아들은 양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너 화룡의 높은 숲속에 숨어서 살았는데 변방대 수색에 걸려 끌려 왔었습니다.

 

그 가족이 북한으로 강제 송환 되여 가는 날 우리는 웃고 울었습니다. 5살짜리 아들이 그래도 집안의 맏이라고 7월의 무더운 여름인데도 겨울 솜옷과 내의를 입고 또 입고 그 작그마한 몸 조차가늠 할 수 없게 있는 옷을 모두 껴입고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땀 흘리지 말고 그 겨울옷을 벗으라고 말했더니 꼬맹이는 옷을 버리지 않고 모두 입고 가야 북한에 가면 그 옷을 팔아서 빵이라도 사먹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고 엉뚱한 말을 해 우리는 울고 웃었습니다.

 

변방구류장의 수감 생활에서 저는 나라 없고 부모 없는 설음과 돈 없는 설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똑똑히 체험했을 뿐 두 눈을 뜨고도 세상을 볼 수 없고 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 돼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 상황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저는 1999810일 드디어 두 손에 족쇄를 채운 채 북한 함북도 무산군 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보위부에서는 우선 온 몸을 발가벗기고는 두 팔을 앞으로 펴 들게 하고는 앉았다 일어섰다 반복 50번 소위 뽐프 훈련을 시키고는 엎디게 하고 매 사람의 항문을 검열했습니다. 어린 딸 앞이라 저는 옷을 벗지 않겠다고 했으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옷 혼솔과 신발창과 발바닥 머리카락을 샅샅이 이 잡듯 검열 했습니다 아기가 찬 기저귀를 펼쳐 보기도 하고 여성들의 생리대 까지 모두 벗겨 검열했습니다. 후에 알게 됐지만 탈북자들이 강제 송환 되어 북한으로 가면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돈을 먹고나 항문과 여자들인 경우에는 자궁에 돈을 감추고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 중에는 임신 6개월 된 임산부도 있었고 이제 태여 난지 겨우 2개월 된 아기와 아기를 출산한지 100일도 안된 아기 엄마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고문을 받는 동안 세상 물정모르는 아기는 엄마의 배속에서의 웃던 웃음 그대로 쌕쌕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인정사정없는 보위부 종합 지도원 놈은 중국 놈의 씨를 받아 가지고 왔다면서 아기의 얼굴에 두꺼운 책으로 사정없이 내리 쳤습니다. 금방 아기의 얼굴은 새까맣게 죽어 한동안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임산부에게도 한 족씨를 받아 왔다고 그의 배를 발로 찼습니다.

 

이런 고문을 마치고는 첫 심문이 남조선에 가려고 도강 했는가, 아님 중국에서 남조선 사람을 만난 적 있는가, 아니면 중국에서 교회 학습을 받았는지를 여러 번 반복해 조사 하고 또 조사 했습니다. 조사를 마치고는 군 안전부로 넘겼습니다. 군 안전부에서도 이와 똑같은 조사를 받고는 다시 군 노동 단련대로 갔습니다.

 

단련대에 도착 하면 대열 훈련을 뻑 차게 시킵니다. 제가 대열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 담담 안전원은 18살 난 저의 딸을 독방으로 불러 놓고 나이와 정확한 집주소를 대라는 트집으로 무작정 나무 각자로 한 시간 동안이나 때렸습니다. 얼굴이 퉁퉁 붓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온 딸을 보는 순간 저는 온몸에 분노의 전율이 흘렀습니다.

 

나 자신을 가늠 하지 못한 채 단 숨에 담당 안전원을 찾아가 나는 주재원 동지도 자식을 가진 부모인데 자식이라는 것은 부모가 어떻게 운전 하는가에 따라 움직이게 돼 있고 당연히 엄마인 내가있는데 왜 어린 딸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는가고 했습니다.

 

주재원은 재수 없다고 제 얼굴에 침을 뱉고는 나갔습니다. 다음 날부터 저와 딸은 낮에는 고욕 같은 강제 노동을 해야 하고 밤에는 밖으로는 쇠를 잠그고 변을 볼 수 있는 바꿰쯔 하나 들여 놓은 작은 방에서 50명이 함께 자야 했습니다. 이가 너무 많아 쭈그리고 쪽잠을 자곤 했습니다. 쪽잠이 아니라 앉아서 졸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일 만에 딸은 산에 나무 하러 갔고 저는 배추 영양 단지를 심으로 갔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는 탈출을 시도해 성공했습니다.

 

제가 살아야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 중국과 북한과 두 나라 사이에 흩어져 있는 내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이 제 머리에 꽉 차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내가 살아야만 이 내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는 죽을 각오로 죽을 각오를 하고 딸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 했습니다. 퉁퉁 부운 다리를 끌고 두만 강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8월의 장마철이라 변한 강물깊이를 계산 못하고 뛰어 들다 보니 그만 키가 넘는 물살에 떠내려간다는 생각만을 남긴 채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옆에는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 수심이 찬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여기에 누워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 어르신은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옆집 청년이 건져 줬다고 했습니다.

 

8월이면 중국에는 한창 논에 시약을 뿌리는 철입니다. 하여 그 청년은 논에서 시약을 뿌리고 있었는데 분명 사람이 두만강 물에 뛰어 들어 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올라오지 않자 무심결에 시약 통을 벗어 던지고 보았더니 물살에 정신없이 떠내려가는 저를 보게 됐고 생각할 사이 없이 구해 줬다고 합니다.

 

너무도 고맙고 감사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모르는 중국조선족 청년에 의해 새 생명을 다시 찾게 됐습니다. 단련대에 있던 딸애는 그해 11월에 나왔고 다시 죽을 각오로 두만강을 넘어 엄마를 찾아 왔습니다. 다시는 우리 헤어 지지말자고 했건만 그 이듬해인 2000년 에 두 번째로 강제 북송됐습니다.

 

새벽3시 쯤 한참 피곤에 몰려 자고 있는데 난데없는 개 울음소리에 놀라자고 있는 딸애를 깨워 뒤 창문으로 나갔습니다. 집 주변을 포위한 납치꾼들에게 화룡까지 끌려가게 됐고 납치꾼들은 우리를 길림에 있는 사람들에게 팔아넘기고는 다시 길목을 지키다가 우리모녀를 다시 납치해 두 번 팔아먹으려 하다가 두 패가 싸우는 사이에 옆 사람의 신고에 의해 화룡 파출소에 잡히게 됐고 변방대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그때 납치 꾼들이 야밤에 달려들어 소리치면 죽인다고 제 가슴에 칼을 댔었는데 아직도 그 칼 자리 흔적이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함북도 무산군 보위부로 강제 북송되어 갔었고 보위부에서는 우리들에게 강제로 옷을 벗게 하고는 꼭 같은 뽐프 훈련과 항문 검사를 했습니다.

 

한창 심문을 받느라 무릎을 끌고 땅바닥에 앉아 있는 저에게 보위부 지도원은 뜬금없이 야 이 간나! 저 의자가 무슨 의자인지 알아?’ 영문을 모르는 저는 순진하게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종합지도원은 제 남동생이 그 걸상에 앉아 조사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군에서 갓 제대 되어 온 남동생은 이 누나를 찾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 이곳 남한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는 죄의 누명으로 무산군 보위부 스파이한테 걸려 두만강을 건넜는데 바짓가랑이에 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쇠고랑에 채워져 어느 정치범 수용소로 갔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한국 상표가 붙은 핸드백이 있었습니다. 그 핸드백으로 인해 8일간 보위부 구류장에서 심사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전해에 한 번 강제 송환된 경험이 있다 보니 돈을 먹었습니다. 일주일간 돈을 뺏기게 될까 두려워 보위부에서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심한 변비로 배 아픔을 호소하자 보위부간수는 설사약 세 번 먹을 량을 한 번에 먹게 했습니다.

 

사실 300위안을 먹었는데 100위안은 변과 함께 흘러갔고 200위안을 건졌습니다. 감옥에 함께 있던 한 친구가 종합 지도원에게 신고 했습니다. 종합지도원은 야 이간 나,,,개도 안 먹는 돈을 먹었어? 남조선 핸드백은 어디서 났어?’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주먹으로 제 얼굴을 때렸는데 그 만 제 앞 이가 두 대 부러 졌습니다. 아침이면 기상 동작과 함께 줄을 서서 화장실을 보고는 다시 한 사람씩 주머니 검사를 받곤 합니다.

 

이런 검사와 조사를 받고 다시 안전부에 넘어 갔었고 군 안전부에서 하루 밤 동안 똑 같은 검사와 조사를 받고는 단련대로 이송해 갔습니다. 단련대에서 7일 만에 다시 청진 집결소로 이송됐습니다. 청진 집결소에서 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겨우 3평이나 될까 말까 하는 작은 방에 20명씩 있게 했고 낮에는 고욕 같은 일을 해 야했고 밤에는 빈대와 이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그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저녁에 해가 지면 감옥 안은 캄캄해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빈대 새끼들이 몸에 붙어 발가락 짬과 배꼽 안과 손가락 짬에서 피를 빨아 먹었고 가려워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기상 소리와 함께 옷을 벗어 털면 보리알 같은 이와 빈대들이 후득 후득 팥알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감옥 안에 작은 창문이 있는데 매일 밤 저는 딸과 함께 그 창문에 박쥐처럼 매달려 자 곤했습니다. 어른 손바닥보다도 작은 창문틀에 오른쪽에는 내가 매달려 자고 왼쪽에는 딸이 매달려 자 곤했는데 빈대와 모기에게 물리는 것보다 모기한테 물리는 게 조금은 낳은 것 같았습니다.

 

떨어질까 창문 쇠살창에 팔을 끼고 그야 말로 박쥐같았습니다. 낮에 안전부 부업 밭에 나가 비료도 주고 영양 단지를 빚기도 하고 가을배추도 심었는데 저는 옆에 있는 오이 밭에서 뛰어 들어 날쌘 동작으로 오이를 따서는 배 속에 감추어 저녁에 감옥안에 들어가서는 비닐 봉지에 손으로 꺾어 넣어 창문에 매달아 놓으면 여름이라 김치처럼 새콤하게 익혔습니다.

 

여름이라 생활 형편이 매우 열악한 탓에 피부병과 대장염이 많이 발생합니다. 시큼한 오이김치를 식초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허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채 여물지 않은 강냉이를 딸에게 강제로 먹이기도 했습니다. 아편을 가을한 밭에서는 아편 씨를 주워 먹었고 풀 뽑기 작업을 하게 되면 풀을 뜯어다가 봉지에 넣어 해 볕에 삭혀 먹기도 하고 호박 줄을 걷는 날이면 생호박을 먹기 도하고 그야 말로 손에 닥치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먹어야 생존을 유지 할 수있습니다.

 

단련대나 집결소에서 준다는 밥은 전쟁준비로 2호 창고에 저장 했다가 썩은 밀가루에 돼지 호박을 썰어 넣고 끓인 죽이었습니다. 밀가루 썩은 악취냄새에 그 야말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입에 넣으면 토하고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평양으로 이송되어 가던 도중 청진역에서 딸과 함께 탈출을 시도 했고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비록 탈출에 성공은 했지만 생소한 청진역이라 갈 곳이 없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뛰고 또 뛰어 달렸지만 결국에는 집결소 정문 앞이었습니다. 집결소 뒤쪽 아파트 남의 집 복도에서 쭈그리고 앉아 아침 통근 열차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통근 열차가 서기 바쁘게 저는 딸의 손목을 잡고 뛰다가 그만 돌에 걸쳐 넘어졌습니다.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아팠지만 언제 살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집결소 주변이라 아침 출근 하는 안전원들의 눈과 아침 일찍 일을 하러 나오는 집결소 수감자들의 눈에 뜨이는 것이 두려워 서였습니다.

 

통근 열차 마감 역인 수송 역에서 내린 저는 딸과 함께 수성 역에서부터 함북도 무산 까지 도보로 걸었습니다. 산을 타기도 하고 작은 오솔길을 걷기도 하고 정말 초행길이라 힘들고 무서웠지만 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무슨 운명인지 남들은 단 한번에 성공을 했지만 저는 3번이나 두만강을 건너게 됐습니다.

 

그 당시 북한 당국에서는 강제 송환해 가는 탈북자 한 사람당 러시아에서 벌목해 들여오는 나무 2립방씩 중국공안에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나무가 모자라 화목 감을 주었는데 워낙 땔감이 흔한 중국에서는 싫다고 했습니다.

 

2000년에는 한 사람당 100달러씩 중국공안에 주 었고 중국에서는 달러를 받아 가며 탈북자들을 강제 북송했고 북한은 돈을 주어 가면서까지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 해 무고한 자기 인민들을 정치 범 수용소와 감옥으로 보내고 공개 총살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꿈속에서도 악몽을 꾸고 있습니다. 불이 번쩍 이는 철창살에 남동생이 매달려 타들어 가는 모습, 그리고 제가 아이들을 찾아 등에 업고 두만강과 중국국경 선을 넘지 못해 애타 하는 모습들이 자주 꿈속에 나타납니다. 그러한 악몽 속에서 깨여 보면 온몸은 식을 땀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탈북자 강제 북송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 해 왔으며 북한 당국은 2300만 주민들을 울타리 없는 감옥에 가두어 인권과 자유를 박탈하고 인민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어도 눈 섶 까닥 하지 않고 전쟁 준비에만 몰두 하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북한 주민들 뿐 아니라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과 같은 전쟁도 아닌 평화로운 시기에 어뢰로 46명의 젊은 장병들을 죽게 했고 시 퍼런 대낮에 연평도 주민들에게 폭탄을 퍼부어 죄 없고 무고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과 장병들을 죽게 하고 금강산 관광 박왕자 여사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김정일이 죽으면 조금이라도 변화가 되어 주민들의 생활 은 낳아 질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또 김정 일이 죽으면 고향에 한 번 가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었건만 세상 물정 모르는 햇내기 김정은이 제 할아비 생일에 수억 달러가 드는 로켓을 발사 한다고 합니다. 오늘도 전쟁 미치광이처럼 미쳐 날치고 있는 김정은이 인민들의 심판을 받을 날은 얼마 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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