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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입국하여 1년

작성년도 : 2008년 64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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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하여 1

- 미소천사

 

 

하나원에 있으면서 지금 탈북자들 이미지가 나쁘다또는 중국에서 그렇게 열심히 살던 탈북자들이 한국에 입국하기만 하면 정부에서나 누가 해주기 바라며 취업하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등등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빈 몸으로 중국에 숨어들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취직부터하고 자신스스로 생활을 개척했던 수년의 생활을 떠올리며 그때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힘든 일은 혼자 다 떠 맡아하며 소처럼 일해 온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이 좋은 세상에서 왜 못살아가랴. 이것이 내 결심 이였고 이렇게 열심히 살면 언제든지 진로가 열리고 비전이 있는 생활을 꾸려갈 수 있으리라 마음을 다졌다.

 

하지만 내 앞에 가로막은 장애는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편견도 아니었고 내안에 있는 거지 근성도 아니었으며 하나님을 믿어온 집사로서의 사명감 때문은 더욱 아니었다.

 

한국사회는 너무도 좋은 사회였고 탈북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나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나는 누구에게 의지하려고 생각도 안했고 북한사람 누구나 그러하듯이 쓸데없이 자존심은 강해서 누구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나를 동정하는 것이 싫어서 쓸데없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든 사람들과 인연을 끊었다.

 

지난날은 이제 나에게 없었다.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철리만을 맘에 새기고 자기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시작하였다

 

헌데 나를 잡아당기는 아주 치명적이고 가슴 아픈 이유가 앞에 가로막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년 동안 쫒기며 뜯기며 노예보다 더한 피난민 수배생활을 해온 후유증이 악마처럼 나의 온몸을 괴롭히고 덮쳐들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제 지난일과 완전히 인연을 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참 어이없게도 지나간 나날이 나의 앞날에 진한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야 숨어살던 시효기간이 끝났나부다 안심하고 긴 숨을 내쉬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매일 매일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오면서 긴장되고 토할 듯 메슥거리고 조금만 새로운 일에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흥분 하군 하였다. 남들이 보기에 몹시 들떠있는 듯 한 인상을 줄 것 같아 애써 맘을 가라앉히자고 못 먹는 커피도 마셔보고 비타나 주스, 차종류도 이것저것 그때그때 바꾸며 마셔보고 약국에서 진정제를 사먹어도 소용없었다.

 

늘 기운이 없고 눈앞이 까맣게 보이지 않았고 컴퓨터검색도 하기 힘들었고 밤에는 북한 꿈과 중국에서 경찰이 달려드는 꿈을 꾸고 소스라쳐 놀라서 가위눌려서 가슴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남한에서 살지만 밤에는 북한에서 사는 듯 집요하게 밤잠을 설치게 했다. 출근 했다가는 구실을 대고 병원과 집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아직은 30대 중반이라 생각도 할 수 없는 갱년기가 빨리 오는가 의심이되여서 부인과에 진찰을 받아보았지만 이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원에서 함께 지녔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서 이곳의 물이 맞지 않을까요? 아니면 공기가 나쁠까요? 북한에서나 중국에 있을 때 이렇게 무력하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몽롱 할 때가 많고 기억력이 없고 식당에서 써빙하는데 주문 받은 것도 자꾸 잊어먹어서 일에서 지장이 많아요. 언니는 그런 증상 없나요?”

 

전화를 받고 보니 그럴법한 일이여서 아는 북한친구들에게 증상을 얘기해보았다. 이미 전에 이곳에 와서 전도사가 된 한 친구는 메슥거리는 것은 스트레스 받으면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당신도 이곳에 와서 얼마정도 아팠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중국에 같이 있을 때 꽃 같던 그의 얼굴이 주름투성이가 되어 있고 찜질방에 가서보니 유난히 크고 예쁘던 그의 가슴이 많이 늘어졌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늙어버린 그의 모습이 단지 세월과 수고한 탓일까?. 그 나이의 남한태생 여성들과 비교할 때 현저하게 차이 나 보이는 그의 모습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이란 말인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물이나 공기, 지역의 바뀜 때문이라면 중국이나 외국에서 연수 온 외국인들의 경우는 사람마다 상황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모습이 달랐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탈북인들이 겪는 이 고통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고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느낄 수 없는 탈북 후유증 이였다.

 

나는 1998년 탈북 하여 2003년까지 중국에 숨어살았는데 늘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 내가 그들의 희망이 되여 주고 행복이 되어줄 날을 꿈꾸면서 열심히 두더지처럼 일만했다.

 

예술가의 집안에서 나서자랐고 북한에서는 나름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나는 10년 전이라 아주 젊었었기에 노래방이나 유흥업소의 유혹이 많은 중국 땅에서 자신을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곳에 놀러 가보지도 않았고 노예처럼 일만하였다.

 

위장신분증을 만들어 아슬아슬하게 잡혀갈 위험 때문에 내내 숨어살면서도 어리석게도 그 땅을 조국이라 생각하였고 돈을 많이 벌어서 언제든지 고향에 돌아가리라고 한국 보내주겠다고 길이 있다고 하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03년 친구들이 다 한국에 간다고 하여도 이 무지한 여자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애가 보고 싶어 북한으로 향했다.

 

브로커의 단단한 약속을 받고 5년 중 거의 일 년 번 돈을 주고 천국의 국경을 넘다의 여자애처럼 북한으로 향했다. 만약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오는 사람을 조금 조사나 하고 놔주겠지 하고 맘을 다잡고 들어가려다 체포된 나에게 조국은 감옥살이를 선물했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던 조국’, 꿈에서도 잊은 적 없는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상봉의 꿈은 이렇게 짓밟히고 지옥보다 더한 곳이 나를 맞았으며 하나님이 만드신 지옥도 그곳보다 나으리라...

 

4달 동안 보위부 조사를 받은 후 집결소에 이송되는 도중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되였고 기적적으로 북한을 탈출 하였지만 연길에서 중국 사람의 신고로 또다시 체포되어 도문수용소에 갇히었다.

 

좋은 옷에 열두 대문이 열린다고 중국에서 살면서 5년 동안 한 번도 잡힌 적 없었는데 남루한 옷차림에 가죽만 남은 야윈 몸둥아리, 그리고 겁에 질린 눈동자는 아무리 중국말을 유창하하여도 그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중국 사람이라고 우기다가 경찰에게 뺨을 호되게 얻어맞고 정신 잃고 쓰러졌는데 깨여나 보니 간수소의 병원 이였다. 어떤 사람은 8회나 잡혀갔다고 하더니 나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도문을 통해 또다시 북송 되였는데 이번에는 정말 살 가망이 없었다. 보위부, 집결소, 관리소(교화소), 안전부 등등으로 이관되며 3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나는 너무도 징그럽고 더러운 북한이라는 악마의 세상을 새롭게 알게 되였고 내가 다시 한 번 자유를 얻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 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더는 나 같은 희생양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아직 계속 우리 사랑하는 민족과 형제들이 이 같은 피눈물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글이 원하는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나의 감옥서신은 따로 적으려한다.

 

하늘의 도움으로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나게 된 2006, 몸은 여위다 못해 가죽이 질질 밀렸고 정상적일 때 50kg 이던 몸은 26kg 밖에 없었고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예쁘던 손과 발은 얼고 데고 썩어문드러졌으니 지금도 흉터투성이여서 부끄러워 손을 내놓지 못한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탈북에 성공하였고 중국에 숨어 살면서 고무풍선처럼 팅팅 부어오른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리고 일 년 전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다.

 

이제는 살았구나. 이제는 누구도 더는 나를 괴롭힐 수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오랜만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많이도 쏟아 내였다.

 

힘들게 얻어낸 것 이여서 자유는 너무도 소중했다. 그래서 잘살아보려고 무척이나 열심이다. 이제라도 좋은 사람 만나면 사랑도 열심히 해보고 싶었다. 희망은 무궁무진한 것이었고 언제나 즐거웠다. 그리고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러나 기뻐하기는 일렀다. 이제 다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해 보아도 참 안됐다.

 

남달리 좋은 취직을 했지만 출근을 하지 못하여 잘리기 직전이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 일어나 앉을 맥도 없다. 게다가 보위부에서 쪼그리고 앉았던 무릎은 이제 더는 걸을 수 없이 시큰 거렸다.

 

그렇게 바라던 자유를 찾았는데 이 좋은 곳에서 기쁨을 누려 볼 사이도 없이 병마가 찾아왔다고 생각 했을 때 너무도 아쉬웠다. 너무너무 맘이 아파서 숨도 쉴 수 없었고 나 자신이 너무너무 슬프고 가련하고 불쌍해서 서럽게 울었다. 눈물은 맥없이 줄줄줄 나의 얼굴을 적시고 베개를 적시군하였다.

 

자살한 선배 탈북자들이 떠올랐다. 중국에 두고 온 자식이 그리워서 울다가 자살을 선택한 탈북여성도 떠오르고 이런저런 모습들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제구실 못하여 남에게 얹히거나 앓아눕게 되면 그때는 동정 받고 살고 싶지 않고 신세가 가련하여 나도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현실적으로 닥쳐온 몸의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 내 몸이 넘 불쌍하였다. 세월을 잘못 만났는지 주인을 잘못만나서 고생하는 내 몸뚱아리... 너무도 혹사당하고 무시당하고 고통당한 것이 내가 아닌 남인 것처럼 내 몸에 미안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었다. 북한의 인권상황이 극도에 달하였고 사랑하는 자식과 가족들이 독재의 사슬에 묶이었는데 앞으로 우리 탈북인들의 역사의 증인이 되여야 하는데 여기까지 와서 죽기는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였다.

 

이럴 때 탈북자동지회 사이트는 나에게 큰 힘이 돼 주었다.

어느 날인가 탈북자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란 글이 눈에 띄었다.

 

그래, 어떻게 찾은 자유인데 죽지 말고 살아서 빨리 우리 북한사람들도 나 같은 고생을 더는 하지 않고 민주주의 하에서 잘사는 날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그리고 통일된 기쁨도 누려야 할 것이 아닌가하고...

 

그러기위해선 지금의 이 고통의 순간을 희락으로 역전시키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내 몸에게 사과하였다. 하늘이 내게 이쁘고 튼튼한 몸을 주셨는데 잘난 척하고 타고난 건강인데 하면서 열심히 번다면서 너무도 혹사시켰던 지난날을 회계하고 지금부터라도 잘 챙기고 아름답게 가꾸리라 맘 다짐 하였다.

 

그리고 몸에 관련하여 한 가지 한 가지 풀어 나갔다. 밥을 조금도 못 먹으니 거식증이 생겨서 먹을 것 만 보아도 토하고 싶었다. 메슥거리는 현상에 대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스트레스성위염으로 오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하였다.

 

온갖 서적과 인터넷을 검색하였지만 뭐 별로 도움이 되질 못했다. 신장이 나빠서 당분과 수분이 머물지 못하고 몸에서 빠져나가고 나쁜 독성이 몸 안에 구석구석 배여 있단다. 한의원에서는 세포가 실타래처럼 둥글둥글 뭉쳐있어서 신경이 차단되고 꼬집어도 제살 같지 않은 거라고 신경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하기야 소금을 씹어도 사탕을 씹어도 차돌을 입에 넣고 굴리는 것처럼 치아에 닿으며 딸그닥거리는 소리밖에는 짠맛도 단맛도 못 느끼면서 살의 감각부터 찾으려하니 한심하긴 하다.

 

우선 이까짓 아무것도 아니라고 맘을 편하게 먹었다. 먼저 5% 소금물을 끓여서 깨끗이 빈속에 한술씩 떠 마시면서 3일을 보냈다. 누워서 쉬면서 몸이 좀 편해진 다음 사과, , 생강에다 산청을 넣어 색갈이 이쁘도록 성심으로 달여서 따스한 차와 냉차로 아침저녁 번갈아 마셨다.

 

죽어도 싫어하던 죽을 잣죽, 전복죽, 팟죽으로 매일 바꾸면서 신경 써 쑤어서 다른 사람 환자 간호하듯 위를 놀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를 위해 이렇게 배려한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참아야하고 힘들게 일해야 하고 남을 먼저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거 밖에는 몰랐던 내가 나를 위해서 투자하게 시작하였다. 매일같이 한강변을 한걸음한걸음 걸어 나가 운동기구에 매달리기 시작한 이후로 시간이 갈수록 좋아져갔다.

 

조금 나아지자 한의원에 가서 보약을 지어먹었다. 먹는 것은 양이 작은 대신 제일 고급하고 내 몸에 좋다는 것으로 골라 먹었고 산해진미를 골고루 섭취하였고 일단 일을 접고 우리나라의 공기 좋고 즐거울 수 있다는 곳은 어디든 떠났다.

 

꽁꽁 닫혀있던 맘의 문을 열고 남한친구들과 농담도 하였고 힘들어서 물먹은 솜처럼 나른한 내 몸에게 타협하여 양해를 구하며 스스로에게 재미있고 아름다운 곳을 구경시키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워낙 노래를 잘 불렀지만 .이제는 잊은 지 오랬던 노래실력을 떠올리고 노래방도 찾아서 가끔 노래도 불러보았다. 웃기는 영화를 골라서 영화관에 가고 실컷 웃는 시간이나마 아픔을 잊는 노력을 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될수록 아픈 티를 내지 않았고 늘 괜찮은 양 미소를 띠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절대로 무리하지 않았다.

 

나는 좀 더 솔직해 지려고 노력했고 친구들과 같이 있어도 자기에게 만큼은 충실하려고 힘들면 들어가 쉬겠다고 당당히 말할 줄도 알게 되었다.

 

기적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내 몸은 시간이 흐를수록 호전 되여 갔다.

 

꼭 일 년이 걸렸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난 아주 딴사람이 되여 버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놀란다.

 

너무 보기 좋아요

 

그들이 들려주는 이 한마디 인사는 나를 정말 기쁘게 해준다. 쉬였던 일도 다시 시작했다.

 

내가 입국해서 일 년이 글을 쓰는 것은 심심해서나 잘난 척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하나는 서두에 쓴 것처럼 우리 탈북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폭을 좀 넓혀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중국동포나 외국인들 한국에 오면 빚지고 와서 셋방살이 하면서 하루도 놀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고 빚 다 갚고 중국 돌아가면 큰집 쓰고 잘사는데 너희 탈북자들 정부에서 임대주택 좋은 거주고 정착금 주어서 잘살게 해주면 중국에선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한국 와서 놀고 자빠져있는 탈북자 많다.” 는 얘기 너무 신물 나게 들었다.

 

그들은 외국인이다. 그들도 여기서 몸이 망가지게 일하다가 자기들 나라 돌아가면 여기서 좋은 시절 다보내고 우리처럼은 아니더라도 많이들 앓는다고 가게 하나씩 해놓고 쉰다고 한다.

 

그들과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우린 조국에 돌아왔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생명을 위협당하며 학대와 천대를 받으며 숨어서 하루도 마음 놓지 못하고 살아온 누적된 피로가 중국이나 외국사람들의 그것과는 비교 할 수도 없는 골병으로 우리 몸에 깃들었다.

 

간단히 생각하면 어떤 긴장하거나 힘든 일 하든지 충격 받으면 몸살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인데 수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모두들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도 다행일정도로 병자가 대다수이다.

 

또 하나 이런 얘기도 들었다. “60년 전 전쟁으로 인하여 갈라진 북한 실향민들은 남에서 열심히 살아서 다 부자가 되였는데 지금 오는 탈북자들 너무 인상이 안 좋다.” ...

 

우리는 그들의 후예들이다. 남한사람들과 똑같은 이 땅에서 나서 자랐고 우리의 몸에는 똑같은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민족성은 같다고 본다.

 

탈북인들을 참고 좋은 눈으로 지켜보며 기다려 주신다면 시간이 약이 되어서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이고 자기들의 진로를 서서히 찾아가게 될 것이고 벌써 잘 정착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신변노출이 문제가 되여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분도 많다고 본다.

 

그리고 나처럼 아프신 분들과 처음 들어오시는 분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

 

외롭고 아프고 힘들 때 당황하지 말고 낙심 말고 마음을 비우고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진단하여 해결책을 찾고 당신에게 시간을 주고 배려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면 행복은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건강하면 돈은 얼마든지 벌수 있고 평생 버는 것인데 서두르지 말고 마음의 부자가 먼저 되여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여러분! 당신도 열심히 사랑하고 우리나라도 열심히 사랑하여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보란 듯이 신나게 한번 살아보자!!!

 

2008312일 미소천사

 

 

2008-03-15 17:07:09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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