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탈북자
작성년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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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탈북자
- 김승철
아직은 남한생활이 엉성하기만 하던 때였다. 제 딴(깐)에는 그래도 더 나은 일을 해볼거라고 겁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어느날 수녀님에게서 북한실상에 대해 강연을 할 수 있겠냐는 전화를 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정착금만 까먹으며 어데서 쉬운 돈 벌이가 없나 하고 두리번 거리던 나는 수녀님의 제의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수녀님을 알게 된 것은 정부에서 주선한 탈북자 자매결연 모임에서였다. 나와 만난 수녀님은 어머니 같은 인자한 모습의 나이 드신 수녀님이었는데 고향이 원산이라며 친동생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셨다. 개인적으로는 수녀님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그 때가 첫 만남이었다. 처음으로 만난 나는 그 친절함에 대한 내 대답이랄지 나는 모임 끝에 있은 식사시간에 끝내 입안을 맴돌던 엉뚱한 질문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수녀님도 여자인데 어떻게 혼자서 살죠? 더구나 길거리나 가판대에 가면 성적 유혹이 가득한 신문 잡지와 초미니 스커트니 배꼽티니 하는 것이 눈을 자극하는데…… 여자는 여성으로서 당연히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야 하는 것이 아니예요?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어떻게 일생을 혼자서 살지요?"
속사포같은 내 질문이 쏟아졌다. 나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수녀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수녀들은 예수님과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셨다. 주변의 수녀님들도 빙그레 웃고 계셨다. 그후 수녀님이 사시는 곳에도 가보고 수녀원에도 가보았으나 이색적인 수녀님들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남한이라는,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자본주의에서 그런 천사같이 살 수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수녀님이 마산과 인접의 수녀원과 학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해오신 것이다.
수녀님과 함께 부산의 수녀님 동생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수녀가 되면 혈육의 인연도 다 끊고 수녀원에서만 생활하는 줄 알았는데 수녀님의 동생은 친절한 호인같은 분이었다.
다음날 강연을 위해 찾은 곳이 마산에 있는 장애인 복지관이었다. 장애인들과 복지관을 운영하는 수녀님들 앞에서 북한실상 강연을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비교적 조용하고 포근한 어머니 젓무덤같은 야산밑에 자리잡고 있는 장애인 복지관 건물은 보기에도 안정감을 주는 곳이었다.
먼저 시설을 둘러보았는데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시설과 재활시설, 휴식공간들이 훌륭히 갖추어져 있어 처음보는 나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고 있던 함흥에는 북한 유일의 교정기구(矯正器具)공장이 있었다. 전국의 지체 장애인들이 교정기구 공장안에 있는 여관에서 일정기간 투숙하며 의족과 의수를 맞추었다. 특히 휴전선의 지뢰에 다리를 잃은 군인들이 많았다. 내 사촌 여동생도 북한 함경남도의 어느한 광산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차 운전공으로 일하다가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한 공장에서 전국을 대상하다 보니 뇌물과 안면이 작용하고 나도 사촌동생 때문에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한적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에서는 장애인을 '불구' 또는 '병신'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 '불구'라는 말의 언어적 의미는 고칠수 없다는 의미인 반면에 '장애'는 극복할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 '불구자'라는 표현은 은근히 상대를 비하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북한에서 살면서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북한에서 인민학교 다닐 때 우리 아파트에는 아기때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아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동씨 성을 가진 동창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콘다'라고 부르며 놀음이나 구경갈때면 그를 빼놓으려 했다. 어쩌다 눈치라도 채면 그는 억척같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먼 동물원까지 따라오군 했다. 그는 운동장에서 축구라도 하면 문지기라도 서고 싶어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나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에이 병신인 주제에' 하고 미워했던 것이다.
마산 장애인 복지관을 보는 순간, 동씨성을 가진 동창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그는 불구가 된 다리를 고치려고 세 차례나 수술을 했으나 수술 후유증으로 허약해져 25살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후 이따금 죽은 그를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이땅에 자식둔 어머니의 마음이 한결같으리라. 나는 펄펄 뛰어다니면서도 불구였던 그를 위한 배려는 해본적이 없었다. 내 사촌동생도 군에서 복무하다 허리를 다친 상이군인 한테 시집을 갔었는데 그때 여행증 때문에 가보지는 못하고 미안했었다. 친구한테는 미안하지 않고 사촌동생한테는 미안했던 나였었다. 그런 과거가 있는 나였기에 장애인들을 보살피고 있는 수녀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애인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처녀인 수녀님들이 장애인들을 보살피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해 뭔가 알 것 같았다. 동씨 성을 가진 동창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리를 잃은 딸 때문에 걱정하시던 이모님의 얼굴도. 모두 제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러한 어머니가 수녀님이시라니……
자기희생정신, 봉사하는 마음, 성령으로 순결한 그 마음이 바로 세상살이의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하느님과 성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리라. 수녀님과의 첫날 대화에서 내 터무니 없었을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달았다. 인간이 인간다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스스로의 배움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어슴프레 느끼고 있었다.
장애인들을 북한실상을 이야기 하고난 자리에서 나는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휠채어를 탄 10대 말쯤 되어보이는 장애인이 나에게 싸인을 요청한 것이다. 94년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어떤 신문사 기자에게서 싸인을 요청받은 후 처음이었다. 그때는 취재의 가치가 있어서, 지금은 나의 무엇이 그에게 돋보였을가.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위험과 고난을 이겨내고 남한까지 온 것이 잘보일지는 몰라도 가족과 혈육을 북에 남겨두고 혼자 탈출한 것은 잘했다고 할 수 없다. 순간 당황했다. 비록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싸인을 요구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장애인이 탈북자에게 싸인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얼결에 볼펜과 수첩을 받아들었으나 쓸 것이 없었다. 뭣을 쓴단 말인가. 앞으로 나 같이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콘다라고 부르며 멸시했던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쓰고 싶었다. 하느님의 천사들인 수녀님과 같으신 분들만 만나서 용기있게 열심히 살라고 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써 줄수 있는 것은 내 이름 석자밖에 없었다. 그 외에 나에게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하고, 수녀님과 같이 순수한 아름다움의 가치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낯선 이방인에게조차 믿음과 존경의 싸인을 부탁해준 너의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겠노라고 굳게 결심하며 마음 속의 싸인을 해주었다.
1999년 3월 김승철 북한연구소 연구원
2004-11-18 00:05:57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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