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판알에서 IT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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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판알에서 IT까지
주판알에서 IT까지
나의 인생을 돌아보게 한 하루
지난 6월 14일 나는 서울 삼성코엑스에서 열린 제18회 정보문화의 달 기념식에서 제17회 「정보화 유공자상」을 받았다. 사실 내가 한 일에 비하면 너무나 큰 상이었다.
「정보화 유공자상」은 국가와 사회의 정보화 확산에 노력하고 정보격차 해소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에 주는 상이다. 내가 상을 받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의외의 통보였다. 또 처음 수상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상을 내가 잘못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막상 기념식장에 도착해서야 이 상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다. 수상자들이 오랜 시간동안 지역·세대·계층간 정보격차 해소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 새삼 느꼈다.
그날 나는 상의 의미를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지난 40년의 인생을 돌아보았고 아울러 앞으로 이곳에서 뿌리 내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바로 정보소외계층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주판과 컴퓨터
2001년 10월 입국하여 2002년 사회에 정착하기까지 그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3국을 경유해 대한민국에 입국하기까지 모진 고초를 이겨내야 했던 다른 많은 탈북자들과는 달리 나는 애들 아빠가 먼저 입국했기에 탈북 후 수월하게 입국할 수 있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찾아온 낯선 땅, 대한민국은 나에게 너무나 생소한 곳이었다. 이곳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또한 북한에서의 경력이 이곳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낯선 세상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했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두 아들이었다. 이 아이들이 내 인생의 전부이자 희망이었고 내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 그 자체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전공을 살려 이곳 생활에 정착하고 싶었다. 북한에서는 주판만 잘 다루어도 문제가 없었지만 대한민국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주판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일을 컴퓨터로 처리하다보니 우선 컴퓨터를 배워야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하루 일과를 컴퓨터 수업을 들으며 보냈다. 또 밤에는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며 밤낮으로 컴퓨터에 매달렸다. 그렇게 공부한지 1년만에 워드프로세서 1급, 인터넷정보검색사 2급, 전산회계운용사, 컴퓨터활용능력 2급 등 4개의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 자격증은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실력을 조금만 더 쌓으면 직장도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회계부분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보니 내가 원하는 일자리를 쉽사리 얻을 수는 없었다.
실망이 크긴 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이왕 시작한 김에 남들보다 나 자신을 특화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좀 더 공부할 생각으로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운영하는「새터민들을 위한 IT 전문교육과정」을 이수했다.
나의 노력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할 수 있었다. 이후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의 과장님 소개로 2003년 8월부터 강사 지원단에 배속되어 강의를 시작하였다.
마음을 트면 가까운 거리
나는 그동안 강사생활을 하면서 탈북자를 포함해 일반인들에게도 컴퓨터를 가르쳤다.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나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가 컴퓨터를 잘 다루리라 생각했는데 30대 중반의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컴맹이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고 놀라웠다.
지금은 많이 편해졌지만 처음에는 대한민국 사람들 앞에 서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어르신들과 주부, 그리고 장애인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교육하다보니 강의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말투나 억양 때문에 이해 못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는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컴퓨터 교육이다 보니 강의시간에 쓰는 용어들이 한정되어 의사소통에는 별 무리 없었다.
하루는 어느 수강생이 내가 북한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는지 나에게 조선족이냐고 물어왔다. 탈북자라는 사실을 사전에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에게 탈북자라는 선입견을 줘 나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보다 컴퓨터 강사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수강생들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질문을 받고는 많이 당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자칫 나의 어설픈 거짓말이 강사에 대한 신뢰도 상실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실대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오히려 나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집으로 초대해 식사까지 대접했다. 나도 모르게 대한민국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경직되었는데 지금은 마음을 툭 터놓고 지낼 수 있게 되어 강의를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이제는 대한민국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구나 하는 긍지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대한민국 사람을 사귀게 된 것도 나에게는 더 없이 큰 선물이었고 행복이었다.
언니의 마음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그래도 내가 항상 마음속 깊이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처지의 우리 탈북 동료들이다. 비록 같은 처지의 탈북자라 한들 내가 어찌 그들의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들의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를 갖고 있는 우리 언니 동생이기에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이 삶에 대한 애착과 열의가 없으면 때론 인상을 써가며 언성을 높여 다그칠 때도 있다.
나와 같은 40대의 주부들은 배움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나는 지난 나의 삶의 발자취를 들려주곤 한다. 나도 나이 40에 시작한 컴퓨터 공부고 특별히 머리가 좋거나 생활에 여유가 있어 시작한 공부가 아니라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던지 대한민국에서 뿌리를 내려 살기 위해서는 컴퓨터는 기본중에 기본이다. 컴맹은 마치 한글을 터득하지 못한 것에 비유될 정도로 컴퓨터를 모르고서는 취직은 둘째치고 살아가는데 있어 여간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요즘과 같이 정보가 곧 가치인 세상에서 컴퓨터를 모르고서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된다. 결국 우리 탈북 동료들은 정보화 사회에서 쇠퇴될 것이고 이는 곧 경제적 낙후로 이어져 삶의 질은 끝없이 추락할 것이다.
열정과 희망을 품고
현재 나는 「한빛종합사회복지관」에서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IT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매 기수 자격증 취득률이 90%를 넘는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이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던지 그들의 취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흥겹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된 후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중에서 가장 큰 행복은 배움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낮에는 복지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밤에는 공인중개사 학원에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공인중개사 시험준비를 한다. 단순히 자격증을 몇 개 더 취득한다는 의미보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열정만큼은 잠재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땅, 처음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후회 그리고 서러움에 복받쳐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지금은 날이 갈수록 내가 정말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나의 존재가치를 일깨우고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아이들. 우리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의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다만 내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하면 나는 잠시도 편히 지낼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한단계 더 성장하고 도약하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2005년 8월 허금희 씀.
2005-08-25 11:05:25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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