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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죽음의 문턱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 안선국

작성년도 : 2001년 60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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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 안선국

 

 

서해의 모진 풍랑을 헤치며 사선을 넘어 꿈에도 그리던 자유의 땅에 도착한지도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간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일생 일대의 중요한 시기였으며,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의미있는 나날이었다.

 

19509월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한 나는 15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오랜 기간 무역부문에 종사해오다 19975월 두가족 14명을 이끌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한국에 도착해 가장 놀란 것은 거리에 고층빌딩이 빼곡이 들어서 있고 승용차들이 끊임없이 줄을 지어 달리고 있는 상상할 수 없는 한국의 발전상이었다. 북한에서 알고 있던 것과는 큰 차이가 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러한 충격속에서 우리 가족의 서울생활은 시작되었다.

 

여섯 식구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가족들과 앞으로의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낯 설고 물 설은 이 땅에서 아는 사람 하나없이 살아가려니 두려움만 쌓여갔다. 그러나 어찌하랴! 자기운면의 주인은 자기 자신인 것을 나는 새로운 환경에 두려움 반 기대감 반으로 이 사회 적응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각종 강연회의 안보강사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북한실상을 알리는데 열심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한 제화공장 사원으로 취직하여 그런대로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와 주위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심리적 안정도 찾게 되었다.

 

몇 개월 뒤 나는 조그마한 카센타에 취직했다. 원래부터 기계와 전자 관련분야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인지 곧 일이 맡겨졌다. 일을하는 도중 정비업무가 북한과 다른 것을 알게 되었는데 북한은 자동차를 정비할 때 부품 재생 및 조정이 기본인데 비해 여기서는 정비의 대부분이 부품교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낭비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남과 북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비관련 용어도 새로 공부하면서 일을 배워나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내가 일하고 있던 카센타에도 그 여파가 미치면서 나는 월급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사장님과 주위분들은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 더 큰 정비업체로 옮길 것을 권유하셨다. 내가 회사를 옮기고자 했으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내가 일하는 대신 다른 한 사람이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차마 그런 비양심적인 일은 할 수 가 없어 거절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뇌출혈 증세로 쓰러지고 말았다. 급히 인근 병원에 입원하여 뇌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다행히 성공적인 수술과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 덕분인지 보름 남짓 입원 치료후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이후 약 3개월간 집에서 안정을 하고 나니 거의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건강을 되찾고 보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끝에 제약회사 홍보팀 영업사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처음 영업사원들이 판매망 확보와 고객관리를 위해 펼치는 온갖 서비스의 방법과 그 행태를 보고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해야하는 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영업이 무엇인지를 조금 알 만하니까 내가 여기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점이 자꾸 생겼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이 탈북자라는 신분으로 소비자들에게 동정심을 불러 일으켜 구매를 호소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역할에 대해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오래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럭저럭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기간은 내 스스로 한국에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 애쓴 시간이었고 조금은 희망이 이루어지는 듯한 시기였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음식 전문점인 압록강 2천리를 개업했다. 북한에서 수입해온 자연산 원료로 아내와 함께 직접 주방에서 북한식 국수, 만두와 순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북한의 자연산 원료로 북한 사람이 북한 비법으로 만든 무공해 건강음식이라고 광고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이 닥쳐왔다. 투자를 약속했던 분들의 자금이 여의치 않아 자금조달이 어렵게 되면서 영업수익으로 근근이 운영해 나가다 보니 적자 운영이 계속되었다. 자금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건물주와 월세로 지불하는 임대료를 전세로 바꾸기로 합의하고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은행에서 1억원을 대출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건물주가 임대료를 전세로 바꿀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다. 표면적으로는 전세권을 설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전세전환에 따른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일로 엄청난 마음고생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아무래도 건강에 이상이 생긴 듯하여 병원진단을 받아보니 소세포성 폐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만약 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내와 아이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참으로 암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사선을 넘어 여기까지 온 내가 아니던가

 

완치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죽음의 문 앞을 오가면서 1년동안 항암치료를 받았다. 주위분들로부터 경제적 심리적 도움을 받으며 강인한 정신으로 병마와 싸워나갔다. 그러다 보니 다른 환자들에 비해 육체적으로 매우 쇠약해져서 제대로 운신조차 못했지만 죽어도 암을 죽이고 죽는다는 각오로 치료를 받은 결과 거의 완치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은 혹시라도 있을지도 모르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꾸준히 병세를 관찰하면서 치료를 계속하고 있는 상태이다

 

병세가 호전되니까 또 일 욕심이 나서 집안에 가만 있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작년 7월부터 압록강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북한의 농산물을 수입하여 국내시장에 판매를 중계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다만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적극적으로는 하지 못하고 있지만 폐암이 완전히 내몸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 온 몸을 바쳐 사업에 주력해 볼 계획이다. 자유와 기회의 땅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후회없이 살아가는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그리고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변함없이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화합에 조그마한 노력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가지면서 열심히 살아보련다.

 

20011월 안선국

 

 

2004-11-18 00:23:47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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