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삶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였습니다 - 아침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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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삶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였습니다
- 아침이슬
제가 북한에서 바라보는 중국은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빨강 파란 노랑색들로 형형색색을 이루는 거리와 건물들의 반짝이는 불빛의 조화는 아름다운 천국의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저희 쪽에는 1년 12달이 가도록 전기 불을 볼 수 있는 날짜와 시간이 얼마 안 되지만 강 건너편 저쪽에선 매일 밤 반짝이는 불빛이 마냥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았습니다. 저희는 그때 몇 해째 전기 공급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하였습니다.
간혹 가다 하루에 몇 시간 공급이 될 때도 있었고, 저녁이면 집에 불이 없어 컴컴한데서 손더듬이로 일해야 하였습니다. 멀쑥한 시래기 죽물도 저녁이 늦어 어두워지면 내입에 들어가는지 남의 입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저녁 시간만큼은 불을 보려고 석유등이나 디젤유로 등을 만들고, 아니면 소나무 옹이를 잘게 쪼개어 거기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었습니다. 때로는 다 꿰져서 너덜너덜한 신발짝을 주어다 고무를 뜯어 짤게 쪼개어 거기에 불을 붙여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1시간만 불을 켜놓으면 콧구멍은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됩니다. 그것도 다행이었죠.
이러다보니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은 한마디로 어둠을 모르는 낙원으로 보였습니다. 저도 거기에 가면 꼭 천국의 행복에 도취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북에서 그처럼 부럽고 황홀하게 바라본 중국은 저에게서 절대로 천국이 아니었고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불빛 속에 감춰진 인간들의 추악함은 그야말로 저를 경악케 하였습니다. 1998년6월4일 검푸른 두만강을 북한 경비대 군인들의 추격을 받으며 건너 중국 땅을 밟은 저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그것은 그저 잠시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두만강 연선 중국 내 주민들(조선족 교포)중 일부, 돈에 눈이 어두워 인간의 양심을 팔아먹은 자들이 강변을 지키고 있다가 강을 건너오는 북한의 여성들을 강제로 붙잡아다 팔았습니다. 연변 내 조선족한테 팔 때에는 기혼여성은 2000~3000, 미혼여성은 4000~5000위안(중국인민페)씩 팔고, 내륙지방의 한족들한테 팔 때에는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얼마를 받느냐는 한마디로 말하여 자기들의 능력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뱃속에 아이를 갖고 (5~6개월)탈북하였는 데, 당시 한 몇 달만 돈을 벌면 고향에 가서 아이도 낳고 그럭저럭 먹고 살기도 괜찮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탈북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을 건너자마자 인신매매하는 인간쓰레기 같은 조선족 교포들한테 같이 탈북 한 친구와 같이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뿐이 아니고 저의 친구도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저희를 강제로 끌어다 빈집에 가두어두고 자기들이 교대해가면서 우리를 지켰습니다. 저희는 울며불며 사정하였습니다. 저희를 놓아 달라고...
나쁜 짓 안하고 돈만 벌어 고향에 도로 가야 한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지만 그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우리가 자꾸 시끄럽게 굴면 중국공안에 고발해 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를 밖에 불러내다 차에 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였더니 어느 골목골목을 돌고 돌아 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산부인과 병원에 데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저희더러 아이를 지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울며불며 사정하고 하라는 대로 다하겠으니 아이는 못 지운다고 하자 "죽겠냐 아니면 살겠냐. 시키는 대로 하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자기 한목숨이 아까워 아직 이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한 불쌍한 어린 생명을 죽여야만 하였고 태어나지도 못한 자식한테 평생을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애를 지우고와서 한 며칠 지나 출혈량이 작아지니 (그것도 주인 여자한테 시켜 저희 보고 물어보았음)저희보고 하는 소리가 "너희 오늘부터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게 되였다. 가서 살아보고 좋으면 살고 마음에 안 들면 연락해라. 그러면 더 좋은 남자를 소개 시켜 줄게. 그리고 시집갔었다 하지 말고 아직 처녀라 해라.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순결을 잃어서 피가 나온다 해라" 이렇게 뇌까리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팔려간 집의 남자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장애인이고 거기에 성장장애와 성격도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또한 15년 차이가 되였습니다. 제가 그 집에 들어가 너무 서러워 밥도 못 먹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자 저를 때리면서 썩어지지 않고 살겠으면 조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를 팔아먹은 그자들이 와서 저보고 재미가 좋으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다른데 안 간다고 하니 네가 싫으면 그만두라"하고는 씽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밤에 자는데 갑자기 중국 공안이 집에 쳐들어왔습니다. 꼼짝도 못하고 붙잡혀 가보니 공안이 아니고 저를 그 집에 팔아먹은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보고 이죽거리면서 하는 말이 한족로반(술집 사장)이 네사진보고 너하고 살겠다고 하니 그쪽에 가면 부잣집이고 사장 마누라가 되어 잘살겠으니 팔자를 고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차타고 길림으로 가서 역에 내려 기회를 봐 탈출하는데 성공 하였지만 어디에도 저를 오라는 곳은 없었습니다.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다 마침 한식당에 들어가서 머물게 되였습니다. 말이 안 통하여 손짓 몸짓 다해 가며 겨우 찾은 거처 지였습니다.
이후 같은 민족이 사는 고장이 그리워 연변으로 나왔는데 거기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교포들의 대접에 아연 질색 하였습니다. 중국 땅에서 흘린 저의 눈물이 한평생 제가 흘려야할 눈물 중에 80%가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론 좋은 사람도 만나 도움도 받았지만 우리 탈북자들을 업신여기고 개, 돼지보다 못하게 취급한 그들을 생각하면 너무 너무 치가 떨립니다. 제가 북한에서 그토록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중국은 저에게 하나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령을 잘못 만난 민족의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하였는데 백성이 주권이 없고 무너져가는 사회의 배경 속에서 이국땅의 방황은 저를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그냥 하루하루 먹고 자고 하는 것으로 목숨이나 지키는데 급급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도 중국 땅에서 수많은 우리 탈북자들이 쓰러져가는 생명의 빛을 잡고 서럽게, 서럽게 울고 있습니다. 수많은 탈북여성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팔려가 아이를 낳고 살지만 며느리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다만 씨받이일 뿐입니다. 거기에 태여 난 자식들 또한 엄마처럼 국적도 취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국적도 아니요 중국국적도 아니요 국제고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들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있습니다. 불쌍한 우리 형제들을 안전하고 인권이 보장된 사회에서 살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으련만. 정부에서도 중국 정부의 눈치만 보지 말고 탈북자 문제에서 강경하게 맞서 주었으면 좋으련만...
정치계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못하겠지... 하지만 무식한 저로서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오직 파도 사나운 망망대해에서 외롭게 이리 저리 떠밀리고 찢기고 사는 우리 형제들을 빨리 구원하여 주었으면... 정부에서는 왜 그렇게 안하는지 야속하게만 생각됩니다.
2005년 10월 25일 아침이슬
2005-10-26 11:28:18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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