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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지옥이었던 세상 - 푸른바다

작성년도 : 2006년 63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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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었던 세상

- 푸른바다

 

 

북한에서 최대의 식량난과 에너지난으로 최악의 붕괴위기를 맞았던 시기는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김일성의 사후에 들이닥친 식량난과 자연재해 동유럽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는 북한이라는 자그마한 독재국가를 붕괴위기로 몰아넣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폭압에 죽으면서 사상최대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때 그나마 김정일이 민심수습으로 내세웠던 것이 평양시민들만은 어느 정도의 배급과 공급을 주는 것이었다. 당시 북방지역의 국민들이 모두 아사위기에 처해있을 때도 평양근방의 사람들은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거지(꽃제비)들은 살길을 찾아 남쪽지방으로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평양지역의 배급도 지속되지 못하고 끊어짐과 동시에 상상할 수 없었던 아사와 에너지 위기가 들이닥쳤다.

 

가스와 석유로 에너지를 충족하던 평양시민들은 에너지난으로 인해 모란봉이나 만경대쪽에 위치한 공원들에 나가 마른나무 잎과 풀잎을 걷어와 대신했으며 집집마다 연탄을 때서 에너지와 난방을 보장하기 시작했다.

 

전기가 없어 주교통수단인 궤도전차와 무궤도전차(전기를 에너지로 사용하여 다니는 버스) 는 길가에 힘없이 서있었고 출퇴근시간이면 길거리는 그야말로 난리 법석이었다. 저마다 궤도전차를 먼저타려고 몸싸움을 벌리다가 깔려죽는 사람들이 다 있었으니 그 상황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주머니에 지갑과 비슷한 물건이 들어있으면 면도날에 옷을 째기가 일쑤였고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속담도, 하품하면 금이빨 뽑아간다 라는 새로운 속담으로 새롭게 태어날 정도였다.

 

또 물이 나오지 않아 아파트에서 사는 주민들의 고통은 끔찍했고 한 번 쓴 물은 다시정화해서 두 번 세 번 쓰고 마지막에는 화장실용으로 버려지곤 했다. 그나마도 물이 나오지 않아 볼일을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신문지에 용변을 보고 2030층높이에서 그것을 그대로 버리곤 했다. 당시 유행되던 말 중에 번대 맞아라.”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문지에 용변을 본 사람들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걸 버릴 때 외치는 소리란 뜻이었다.

 

아파트주변의 길거리는 늘 악취로 가득했고 낮은 층에서 사는 사람들은 여름에 문도 열어놓을 수가 없어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당하곤 했다. 그 더운 여름 전기가 없어 선풍기도 돌릴 수 없었으며 지하철이나 버스도 에어컨을 틀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름은 이들에게 있어서 그나마 행복한 계절이었다. 겨울은 평양시민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시기였고 이때는 정말 젊은이들도 참기 힘든 추위와 고통이 찾아왔다. 평양시의 대부분 주택들은 온수난방이라고 하는 시스템에 의하여 난방을 보장받고 있었다.

 

평양시화력발전소와 동평양화력발전소 등에서 나오는 온수(즉 석탄을 때서 나오는 수증기로 터빈을 돌리고 남는 뜨거운 물)로 난방을 보장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력난과 수송수단의 부족으로 발전소들은 거의 멎어있는 상태였고 난방관이 삭거나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국은 냉수를 그 관에다 쏘아댔다.

 

난방도 보장되지 않는 그 추운겨울 관으로 흘러드는 냉수는 양말을 두어 켤레나 신고 슬리퍼를 신고도 바닥에 5분 이상 서있지 못하게 만들었고 집 전체를 그야말로 자연 냉장고로 만들어버렸다. 나이 드신 늙은이들은 너무도 추워 솜옷을 입고 이불을 덮고 겨울 신을 신고 침대에서 주무셨으며 또 가지가지의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었다.

 

플라스틱 물통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고 마개를 꼭 닫아놓으면 그 열기가 새벽까지도 갔었고 출근시간에 세수를 할 수 있는 따뜻한 물도 될 수 있었다. 당시 마누라는 끼고 안자도 물통을 끼고 잔다.’라는 말이 유행될 정도였으니 그 추위와 고통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고통은 고층건물에서 사는 사람들일수록 더 심했다. 엘리베이터는 다니지도 않았고 20, 30층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높은 계단을 한 치 한 치 톺아 오르며 살아갔다. 고층건물서 사시는 노인네들은 아침에 내려오셔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녁때에나 집으로 올라가셨고 젊은이들인 우리도 상당히 힘든 운동이었다.

 

아무리 추웠어도 10층까지만 올라가면 추위를 모르고 20층을 올라가면 윗단추를 풀어헤치며 30층을 올라가면 땀으로 미역을 감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환희의 진땀도 집에 들어가 5분만 있으면 무서운 오한으로 찾아와 사람들을 괴롭히곤 했다.

 

교통난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의 늙으신 분들이 모두 겨울이면 지방의 친척이나 자식들 집으로 피서를 가는 시절이었다. 그나마 연탄이나 나무를 때서라도 난방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시골이 그들에겐 너무도 천국과 같은 세상이었던 것이다.

 

출근시간을 맞춰 지하철이나 궤도전차를 타고 떠났는데 절반도 가지 못해 정전으로 멈춰 선다. “금방 오겠지 금방 전기가 오면 떠나겠지라는 무모한 기대로 거기에 서 있다 보면 출근시간은커녕 점심밥도 그 안에서 먹어야하는 판이 된다. 배차시간은 길어서 사람들은 엄청나게 몰려서있고 그러다 한대라도 도착하는 순간이면 그때는 난리도 아니다.

 

얼마 전 지하철노조원들의 파업으로 지하철운행이 지연되고 있을 때 나는 그때당시의 느낌을 다시 한 번 받을 수가 있었다. 엄청나게 밀린 사람들이 모두 지하철에 탔을 때 내 뒤에 서있는 처녀의 앞가슴이 내 등에 밀착 되여 어쩔 줄을 모를 때 나는 새삼스럽게 평양의 지하철역에 서있는 느낌에 멍해졌었다.

 

하긴 열차도 너무도 연착이 되고 다니지 않아서 평양에서 청진까지 5일이나 7일을 걸려 도착할 정도였으니 그때의 상황은 과히 처참하고 끔찍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열차 안에서 볼일을 볼 수가 없어 그 자리에 앉아서 해결할 정도였고 그나마 그 자리마저 못 차지한 사람들은 그 위험한 열차지붕에 매달려 다녔다.

 

조금만 졸면 가족의 생사가 달린 자그마한 쌀 배낭이 어디론가 없어져버리고 한순간만 손을 놓으면 열차지붕위에서 공중부양을 하며 날아가는 참사를 면할 수가 없었던 세월! 살인과 강도 강탈이 대낮에, 그것도 한나라의 수도라고 자처하는 평양시내의 곳곳에서 일어나던 지옥 같던 세상. 평양의 상징이라고 자처하는 주체사상탑의 봉화대불꽃이 전력난으로 며칠씩 꺼져있고 로동당 간부들이 사는 특정지역만 겨우 가로등불빛을 보장하는 그 시절, 사람들은 무척이나 강해졌고 인내심이 많아졌고 억척스러운 인간들로 변해갔다.

교통난에 그들은 모두 자전거라는 대용품으로 반응했고 식량난에는 풀뿌리와 나무줄기로 살아갔다.

 

그 시절 법은 자체의 사명을 잃었고 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은 모두 비리와 비법의 화신으로 전락해갔다. 강도, 도둑은 판을 쳐 밤에 잠가 놓고 자는 키를 부스고 들어와 말짱 거두어가는 판이었고 좀 늦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는 야구 빠따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아침에야 깨어나 빈손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세월이었다.

 

당시 일본산 중고자전거가 유행이었는데 그 값은 당시 서민들에게 있어서 거금이었다. 그러니 그자전거를 빼앗거나 도둑질하여 팔면 그들에게는 횡재인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자전거를 17대나 강탈하고 결국은 총살까지 당한 사람도 있었다. 17대래야 한국 돈 10만원 값도 안가는 액수이지만 그 돈 때문에 그는 목숨을 잃었다.

 

추석이나 설 명절, 교통수단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척들과 조상들의 묘소를 찾는 것을 포기했고 그나마 묘소를 돌볼 사람이 없어 어쩔 수가 없는 사람들은 자동차 적재함에서 위태로운 길을 떠나야했다.

 

그 당시의 평양의 모습은 이렇듯 참혹했다. 수도라 불리던 평양마저 이 정도였으니 다른 곳이야 더 말해 뭘 하랴. 그때 당시 지방 사람들은 평양을 천국처럼 여겼다. 이렇게 험악하고 끔찍한 도시도 지방에 비하면 천국이었던 것이다.

 

그 험하고 무너져가던 시절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정치선전과 공포정치였다. 당시 북한당국은 소란했던 민심을 가라앉히려고 최대의 공포정치를 펼쳤는데 그때 죄 아닌 죄로 공개처형을 당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이 몇 천인지 모른다.

 

라디오와 TV의 아나운서들은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이깁니다.”라고 몇 천 번을 외웠고 남한의 발전모습과 자유로운 모습을 막으려고 피눈이 되여 날뛰었다. 북한의 TV 채널이 3개였었는데 그나마 지방은 1채널밖엔 볼 수가 없었다.

 

남한의 TV 전파를 막는다고 남한TV전파가 들어올 수 있는 채널을 모두 막아버렸고 집집마다 TV에 봉인 딱지를 붙여 감시하였다. 그래서 늘 불만이었던 사람들의 말이 보고 싶어도 전기가 와야 보는 거 아닌가.”고 그렇게 볼 거 없고 변태적인 TV라면 오히려 보여주면서 교양하는 게 옳지 않느냐고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상황은 변한 것이 없고 사람들의 사고수준은 점점 발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차 그 세뇌교육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으며 구두 닦고 깡통 차고 쓰레기장 뒤지는 남조선 어린이들이란 말을 더는 믿지 않게 되었다.

 

사실 초등학교시절 내가 배운 교재에 있던 남조선 거지소년에 대한 글은 지금 모두 없어졌다.

진실을 결코 가릴 수는 없었고 뻔한 사실을 눈감고 아웅해봤자 먹히지 않을 것을 이들도 알기 때문이다.

진실은 가릴 수가 없으며 진실로 인하여 김정일 망할 날은 멀지않았다.

 

2006828일 푸른 바다

 

 

2006-08-29 17:19:52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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