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등대 - 최현실
작성년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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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살얼음판을 건너며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우리가족 16명이 남한에 도착한지도 어언 3년이 흘렀다. 과거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선조들의 뼈가 묻혀 있고 내가 자라난 고향 땅 북한, 그러나 그 고향은 아직도 따뜻한 향수로 다가서기 보다는 아픔을 더해주는 피눈물의 땅으로 기억된다.
나의 아버지는 8.15 해방후 조만식 선생님과 함께 일하시다 북한현실에 좌절하여 46년 12월 월남하셨다. 뒤이어 어머니도 아버지를 찾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고향인 평안남도 강동군에 9살난 나와 6살 남동생을 두고 젖먹이만 업고 월남하셨다. 그러던중 6.25 전쟁이 터졌고 나와 동생은 부모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포탄속을 헤치며 황해도 해주까지 갔다. 그러나 다리가 파괴되어 부모님이 계시는 남한을 지척에 둔 채 고향으로 되돌아가야만 했고, 전쟁이 끝난후 다시는 부모님을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득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던 그때의 절망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불행은 또 다시 찾아왔다. 의지할 데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던 남동생마저 스무살 되던 60년경 친구와 남한방송을 듣다가 보위부에 적발되어 끌려간 후 행방불명되었던 것이 다. 그후 40년이 다 됐으나 아직도 생사조차 알 수 없다. 분단 50년의 세월은 내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후 평양에서 가족을 이루어 살던 나는 1976년 월남자 가족이라는 사실이 탄로나 온 가족과 함꼐 함경북도 회령시 벽성리라는 심심산골로 추방되었다. 그곳에 추방된 사람들은 대부분 월남자 가족과 자본가출신자들의 후손들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는데...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 날 구멍이 있다던가? 1992년 뜻밖에도 미국에 계신 부모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연락 이 되자 부모님은 방북을 희망했지만 북한당국은 정치적 월남자라며 고향방문을 막았다. 북한땅에서는 살아생전 부모님을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얼마나 좌절했던지..
그러던 1996년 7월 노구의 몸을 이끌고 어머니가 중국에 오셔서 은밀히 연락을 하셨 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보니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으나 기회를 놓치면 평생 한을 풀 수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어머니와 감격의 상봉을 하였다. 수십년 세 월 이별의 한이 맺힌 어머니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오랜동안 목놓아 울었다. 어머니 는 나에게 "어미를 용서해라, 면목없이 너를 찾아왔다"며 말씀을 잇지 못하고 통곡하 셨다. 어머니를 만난 그해 10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탈출하다 잡혀 죽더라도 시도라도 해보자는 비장한 각오로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남편과 철없는 5명의 손주 들, 출산을 2개월 앞둔 딸등 가족 15명을 이끌고 살엄음이 낀 두만강을 건넜다.
마침내 중국땅 강 기슭에 닿아 안도의 숨을 돌렸으나 미처 연락이 안돼 북에 두고 온 맏딸이 눈앞에 어른거려 가슴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내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나면서 하셨을 그 말, "죽지 말고 살아서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가슴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 다. 45일 간의 탈북행로는 순간순간마다 목숨걸고 걸음마다 눈물을 뿌렸던 너무도 고 통스러웠던 여정이었다.
1996년 12월, 우여곡절끝에 우리는 남한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문밖으로 서울상공을 내려다 보며 온 가족이 흐느껴 울었다. 자동차를 타면 불과 몇시간 안에 닿을 곳을 왜 목숨걸고 남의 나라 땅으로 멀리 돌아와야 했는지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남한사람들 과 똑같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며 참다운 인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남한에 온지 얼 마 안된 시점에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가하여 주어진 권리를 행사 해 보았다. 내손으로 내 나라의 대통령을 뽑았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온 국민들이 IMF극복을 위해 스스로 금모으기 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 상을 받았다. 순수한 애국정신과 미덕은 입으로만 인간존중을 외치는 북한에 있는 것 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의 존엄과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이곳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헬기와 배 등 최신장비를 갖춘 119구조대 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처럼 평범한 국민들의 생명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물론 적응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루 아침에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어도 보고 알 수 없고 듣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족은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하나 하나 배우고 익히면서 각자 능력에 맞는 일을 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애들도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남한에서 태어난 손자 대한이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비록 가난하지만 목숨걸고 자유를 찾아온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조국통일을 위해 성실한 노력으로 작은 힘이나마 이바지하고 싶은 것이 우리가족의 희망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권리를 안겨 준 내 조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1999년 10월 최현실
나의 아버지는 8.15 해방후 조만식 선생님과 함께 일하시다 북한현실에 좌절하여 46년 12월 월남하셨다. 뒤이어 어머니도 아버지를 찾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고향인 평안남도 강동군에 9살난 나와 6살 남동생을 두고 젖먹이만 업고 월남하셨다. 그러던중 6.25 전쟁이 터졌고 나와 동생은 부모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포탄속을 헤치며 황해도 해주까지 갔다. 그러나 다리가 파괴되어 부모님이 계시는 남한을 지척에 둔 채 고향으로 되돌아가야만 했고, 전쟁이 끝난후 다시는 부모님을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득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던 그때의 절망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불행은 또 다시 찾아왔다. 의지할 데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던 남동생마저 스무살 되던 60년경 친구와 남한방송을 듣다가 보위부에 적발되어 끌려간 후 행방불명되었던 것이 다. 그후 40년이 다 됐으나 아직도 생사조차 알 수 없다. 분단 50년의 세월은 내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후 평양에서 가족을 이루어 살던 나는 1976년 월남자 가족이라는 사실이 탄로나 온 가족과 함꼐 함경북도 회령시 벽성리라는 심심산골로 추방되었다. 그곳에 추방된 사람들은 대부분 월남자 가족과 자본가출신자들의 후손들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는데...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 날 구멍이 있다던가? 1992년 뜻밖에도 미국에 계신 부모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연락 이 되자 부모님은 방북을 희망했지만 북한당국은 정치적 월남자라며 고향방문을 막았다. 북한땅에서는 살아생전 부모님을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얼마나 좌절했던지..
그러던 1996년 7월 노구의 몸을 이끌고 어머니가 중국에 오셔서 은밀히 연락을 하셨 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보니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으나 기회를 놓치면 평생 한을 풀 수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어머니와 감격의 상봉을 하였다. 수십년 세 월 이별의 한이 맺힌 어머니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오랜동안 목놓아 울었다. 어머니 는 나에게 "어미를 용서해라, 면목없이 너를 찾아왔다"며 말씀을 잇지 못하고 통곡하 셨다. 어머니를 만난 그해 10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탈출하다 잡혀 죽더라도 시도라도 해보자는 비장한 각오로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남편과 철없는 5명의 손주 들, 출산을 2개월 앞둔 딸등 가족 15명을 이끌고 살엄음이 낀 두만강을 건넜다.
마침내 중국땅 강 기슭에 닿아 안도의 숨을 돌렸으나 미처 연락이 안돼 북에 두고 온 맏딸이 눈앞에 어른거려 가슴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내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나면서 하셨을 그 말, "죽지 말고 살아서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가슴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 다. 45일 간의 탈북행로는 순간순간마다 목숨걸고 걸음마다 눈물을 뿌렸던 너무도 고 통스러웠던 여정이었다.
1996년 12월, 우여곡절끝에 우리는 남한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문밖으로 서울상공을 내려다 보며 온 가족이 흐느껴 울었다. 자동차를 타면 불과 몇시간 안에 닿을 곳을 왜 목숨걸고 남의 나라 땅으로 멀리 돌아와야 했는지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남한사람들 과 똑같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며 참다운 인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남한에 온지 얼 마 안된 시점에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가하여 주어진 권리를 행사 해 보았다. 내손으로 내 나라의 대통령을 뽑았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온 국민들이 IMF극복을 위해 스스로 금모으기 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 상을 받았다. 순수한 애국정신과 미덕은 입으로만 인간존중을 외치는 북한에 있는 것 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의 존엄과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이곳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헬기와 배 등 최신장비를 갖춘 119구조대 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처럼 평범한 국민들의 생명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물론 적응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루 아침에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어도 보고 알 수 없고 듣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족은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하나 하나 배우고 익히면서 각자 능력에 맞는 일을 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애들도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남한에서 태어난 손자 대한이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비록 가난하지만 목숨걸고 자유를 찾아온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조국통일을 위해 성실한 노력으로 작은 힘이나마 이바지하고 싶은 것이 우리가족의 희망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권리를 안겨 준 내 조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1999년 10월 최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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