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야수들이였다 - 조영철
작성년도 :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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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전 북한군 교관출신으로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감옥과 교화서등을 거쳐 극적으로 탈출해 자유대한에 안긴 생생한 증언자의 말을 올린다.
1998년 7월1일 함경북도 온성군 남산다리 밑에서 나의 형 조성철을 비롯한 6명이 공개처형 당했다. 이 사건은 ‘안기부간첩단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공개처형은 대개 경제범에 국한되고 정치범은 비밀처형하는 것이 관례인데 보위부에서 직접 공개처형을 집행하기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나도 함께 체포됐으나 극적으로 처형을 면했다.
현장목격자들에 의하면 나의 형은 ‘악질 두목’ 으로 간주돼 무차별 사격을 받아 상체가 거의 없어질 정도로 잔인하게 공개처형 됐다고 한다. 함께 공개처형 당한 사람들은 형의 친구들인 림춘삼(43) 천익선(33) 윤창만(35) 김용수(33) 와, 가족들과 함께 탈북하려다 실패한 정광(33)이다. 이들의 죄목은 “남조선 안기부와 손 잡고 탈북자를 남조선으로 넘기고 밀수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도와준 탈북자중에는 주체사상탑 설계에 참여했던 장인숙(60)씨 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 가족 탈출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둘째 아들 정광씨의 가족까지 탈출을 시키려다 정광씨가 보위부에 체포되는 바람에 우리도 모두 붙잡히게 됐다. 정광씨는 아내에게 탈북을 설득하다가 아내의 신고로 보위부에 체포됐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우리와 함께 밀수를 했던 먼친척벌 되는 조선족인 조원철은 도문시에서 보위원들에게 납치돼 북한 보위부로 끌려와서는 어디론가 행방불명 됐다.
형과 나는 저녁 9시쯤 온성군 남양노동자구의 집에 있다가 보위부 요원들에게 붙잡혀 온성군 보위부 감방에 끌려갔다. 997년 9월 30일이었다. 온성군 보위부건물은 ㄷ 자형에 10여개의 감방과 취조실 등이 있었다. 독방은 1평 남짓이고, 일반 감방은 5~6평정도 됐다. 예심실(취조실)에는 형틀과 각목, 쇠갈구리, 가죽채찍, 쇠줄, 바께즈 등이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벽에는 피가 묻어 있어 들어서는 순간부터 소름이 끼쳤다.
나와 형은 감옥에 들어온 첫날부터 무차별적인 고문을 받았다. 특히 형은 ‘두목’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가혹했다. 뱃심 좋고 입 무겁기로 소문난 형이라 모든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형의 두 팔 두 다리가 각목에 낀 채 관절이 뽑혀나갔고 총 개머리판에 맞아 앞 이빨이 모두 부러졌다. 형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 졌다. 나에게도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 옷을 모두 벗기고 의자에 앉혔다. 두 팔과 다리를 꽁꽁 묶힌 채 전기고문이 가해졌다. 몇 차례 전기투입으로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이어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일주일간 잠을 못잔 채 각목으로 맞았다. 거꾸로 매달린 채 매를 맞으며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에게 안기부 돈은 얼마나 받았는지 무슨 간첩임무를 받았는지 대라고 매일 고문을 가했다.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할수록 고문은 더 심해졌다. 나중에는 화장실 변기에 코를 박고 밤을 지새는 고문까지 받고 나니 거의 죽기 직전까지 됐다.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보위원이 내리치는 쇠 갈구리에 머리를 맞고 즉사하는 모습과 팔다리 관절을 꺾는 모습 등이었다. 고문 받다 죽으면 그날로 끌어내다 어딘가에 묻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내가 기억하기로도 수십 명은 족히 된다.
나를 제외한 6명은 감옥에서 끌려나갔다. 이때 마지막으로 형의 얼굴을 봤다. 입 부분이 완전히 만신창이 돼 있었다. 이빨은 다 부러졌고 척추가 부러지고 팔다리가 너덜거리는 채로 양옆에는 보위원이 떠받들고 있었다. “너만은 꼭 살아서 부모님을 모셔라”는 게 형의 마지막 말이었다. 형은 나에 대한 혐의까지 모두 뒤집어 썼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공개처형 당했다.
그후 나는 함경북도에 있는 정거리 제12교화소로 이송됐다. 나에게도 이미 내부적으로는 총살 승인이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총살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위부 10개월 간의 고문과 교화소의 강제노동으로 몸무게가 87kg에서 46kg이 됐다. 그나마 몸에 붙은 살은 퉁퉁 부어있었다. 교화소에서 예비 사망판정을 받았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정이었다. 집에서 부모님이 들것을 가지고 나를 실으러 왔다. 일어서지도 못한 채 달구지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3개월 간 대소변을 받아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결국 나를 걷게 만들었다. 형의 복수를 위해 보위부감방을 날려버리겠다고 친구에게 한마디 한 것이 또 보위부에 보고돼 다시 체포되기 직전에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 왕청 연길 등에서 4차례나 보위부추적조와 맞닥뜨렸다. 다행히 특수부대에서 배운 무술이 나를 구해주었다. 중국과 동남아국가를 거쳐 대한민국 품에 안겼다.
보위부 감옥과 취조실에서 자행되는 천인공노할 고문과 살인행위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견딜 수 없다. 또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무참하게 죽은 형과 그의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이룰 수 없다
--- 조영철 ---
1998년 7월1일 함경북도 온성군 남산다리 밑에서 나의 형 조성철을 비롯한 6명이 공개처형 당했다. 이 사건은 ‘안기부간첩단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공개처형은 대개 경제범에 국한되고 정치범은 비밀처형하는 것이 관례인데 보위부에서 직접 공개처형을 집행하기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나도 함께 체포됐으나 극적으로 처형을 면했다.
현장목격자들에 의하면 나의 형은 ‘악질 두목’ 으로 간주돼 무차별 사격을 받아 상체가 거의 없어질 정도로 잔인하게 공개처형 됐다고 한다. 함께 공개처형 당한 사람들은 형의 친구들인 림춘삼(43) 천익선(33) 윤창만(35) 김용수(33) 와, 가족들과 함께 탈북하려다 실패한 정광(33)이다. 이들의 죄목은 “남조선 안기부와 손 잡고 탈북자를 남조선으로 넘기고 밀수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도와준 탈북자중에는 주체사상탑 설계에 참여했던 장인숙(60)씨 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 가족 탈출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둘째 아들 정광씨의 가족까지 탈출을 시키려다 정광씨가 보위부에 체포되는 바람에 우리도 모두 붙잡히게 됐다. 정광씨는 아내에게 탈북을 설득하다가 아내의 신고로 보위부에 체포됐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우리와 함께 밀수를 했던 먼친척벌 되는 조선족인 조원철은 도문시에서 보위원들에게 납치돼 북한 보위부로 끌려와서는 어디론가 행방불명 됐다.
형과 나는 저녁 9시쯤 온성군 남양노동자구의 집에 있다가 보위부 요원들에게 붙잡혀 온성군 보위부 감방에 끌려갔다. 997년 9월 30일이었다. 온성군 보위부건물은 ㄷ 자형에 10여개의 감방과 취조실 등이 있었다. 독방은 1평 남짓이고, 일반 감방은 5~6평정도 됐다. 예심실(취조실)에는 형틀과 각목, 쇠갈구리, 가죽채찍, 쇠줄, 바께즈 등이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벽에는 피가 묻어 있어 들어서는 순간부터 소름이 끼쳤다.
나와 형은 감옥에 들어온 첫날부터 무차별적인 고문을 받았다. 특히 형은 ‘두목’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가혹했다. 뱃심 좋고 입 무겁기로 소문난 형이라 모든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형의 두 팔 두 다리가 각목에 낀 채 관절이 뽑혀나갔고 총 개머리판에 맞아 앞 이빨이 모두 부러졌다. 형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 졌다. 나에게도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 옷을 모두 벗기고 의자에 앉혔다. 두 팔과 다리를 꽁꽁 묶힌 채 전기고문이 가해졌다. 몇 차례 전기투입으로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이어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일주일간 잠을 못잔 채 각목으로 맞았다. 거꾸로 매달린 채 매를 맞으며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에게 안기부 돈은 얼마나 받았는지 무슨 간첩임무를 받았는지 대라고 매일 고문을 가했다.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할수록 고문은 더 심해졌다. 나중에는 화장실 변기에 코를 박고 밤을 지새는 고문까지 받고 나니 거의 죽기 직전까지 됐다.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보위원이 내리치는 쇠 갈구리에 머리를 맞고 즉사하는 모습과 팔다리 관절을 꺾는 모습 등이었다. 고문 받다 죽으면 그날로 끌어내다 어딘가에 묻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내가 기억하기로도 수십 명은 족히 된다.
나를 제외한 6명은 감옥에서 끌려나갔다. 이때 마지막으로 형의 얼굴을 봤다. 입 부분이 완전히 만신창이 돼 있었다. 이빨은 다 부러졌고 척추가 부러지고 팔다리가 너덜거리는 채로 양옆에는 보위원이 떠받들고 있었다. “너만은 꼭 살아서 부모님을 모셔라”는 게 형의 마지막 말이었다. 형은 나에 대한 혐의까지 모두 뒤집어 썼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공개처형 당했다.
그후 나는 함경북도에 있는 정거리 제12교화소로 이송됐다. 나에게도 이미 내부적으로는 총살 승인이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총살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위부 10개월 간의 고문과 교화소의 강제노동으로 몸무게가 87kg에서 46kg이 됐다. 그나마 몸에 붙은 살은 퉁퉁 부어있었다. 교화소에서 예비 사망판정을 받았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정이었다. 집에서 부모님이 들것을 가지고 나를 실으러 왔다. 일어서지도 못한 채 달구지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3개월 간 대소변을 받아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결국 나를 걷게 만들었다. 형의 복수를 위해 보위부감방을 날려버리겠다고 친구에게 한마디 한 것이 또 보위부에 보고돼 다시 체포되기 직전에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 왕청 연길 등에서 4차례나 보위부추적조와 맞닥뜨렸다. 다행히 특수부대에서 배운 무술이 나를 구해주었다. 중국과 동남아국가를 거쳐 대한민국 품에 안겼다.
보위부 감옥과 취조실에서 자행되는 천인공노할 고문과 살인행위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견딜 수 없다. 또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무참하게 죽은 형과 그의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이룰 수 없다
--- 조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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