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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공기업 사원이 되기까지 - 장동혁

작성년도 : 2004년 552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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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사원이 되기까지

- 장동혁

 

 

공기업 사원이 되기까지

 

프롤로그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한 꿈이 있습니다. 나비 리본을 매고 노래하는 유치원생부터 무병장수를 꿈꾸는 백발의 노인들까지 모두들 크고 작은 꿈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 꿈이 크든 작든, 어떤 사람에게는 평범하고 흔한 일상의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을 다바쳐 피나는 노력을 해야 이룰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생사의 갈림길에 나섰다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한줌의 흙이 되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꽃다운 청춘도 있을 것입니다. 오직 그들만의 아름다운 꿈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 채....

 

저 역시 그들처럼 내 나름대로의 자그마한 꿈을 찾아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어 자유를 찾아오는데 성공하였으며 이제는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첫 걸음

 

북한과 중국에서의 잊지 못할 사연들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정부가 마련해 준 정착지 임대아파트에 짐을 푼 지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하나원을 나온 첫 날, 자유를 찾아 왔다고 하지만 정작 아무도 없는 썰렁한 빈집에서, 하나원 수료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가방 두개와 이불 보따리를 바라보며 긴긴밤을 보낼 때의 모습은 지금 다시 떠올리기 조차 싫은 모습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익히느라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소한 거리환경과 용어들은 여전히 큰 부담으로 느껴졌고 처음엔 도대체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취직을 하려면 직업교육을 받아야 할텐데 무엇부터 배워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사회에 나온 지 한 달쯤 지나면서 주위에서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느 물류회사의 용역직을 소개해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급하다고 돈 몇 푼 빨리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을 먼저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확실한 기술이야말로 한국사회에서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는 원동력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새 삶을 위한 몸부림

 

그래서 내린 결정이 컴퓨터를 우선 배우자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구경조차 못해보았지만, 한국에서는 컴퓨터를 모르면 도저히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다방면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원은 탈북자들이 주로 등록하는 '워드 프로세서''정보처리산업기사' 같은 과정 대신 오로지 '컴퓨터 정비''네트워크 관리사'를 양성하는 컴퓨터 정비학원이었습니다.

 

학원에 등록한 후 처음 한달 가량은 생소한 용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탐색기가 뭐죠?"라는 간단한 질문에서부터 엉뚱하고 까다로운 질문들에 성의껏 답변해주시느라 애쓰셨던 강사님들과 따뜻한 동료 수강생들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34개월이 지난 뒤에는 그동안 배운 내용을 현장에서 빨리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장 선생님을 찾아가 부탁을 드렸습니다.

 

"원장 선생님! 앞으로 강사님들이 외부에 컴퓨터 설치나 수리하러 나갈 때 저도 좀 데리고 나가주십시오. 기술을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니 쉬는 날 여부와 상관없이 일감이 생기면 우선 고려해주십시오. 돈은 안받아도 좋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흔쾌히 응해주셨고 그 뒤 저는 많은 현장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 학원에서 책으로만 배웠던 내용과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는 실전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하나둘 겪어나가면서 저도 모르게 자신감이 조금씩 생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부터는 아르바이트 비용도 받으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수업을 받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온 지 5개월 째 되던 어느 날, 학원 부원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혁씨! 그 동안 일하는 모습을 쭉 지켜봐왔는데... 우리 학원에서 일 좀 해줄 수 없겠어요?"

 

첫 직장의 제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렇게 받았지만 이제 나도 한국사회의 떳떳한 직장인이 되는구나 생각하니 스스로가 무척 대견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홀홀단신 북에서 와서 대한민국의 어엿한 직장인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컴퓨터 학원 기술지원팀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매일같이 다니던 길이며 학원이었지만 수강생이 아니라 직원으로서 출근을 하게되자 출근길의 만원버스도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제가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강사님 옆에서 보조역할만 하면 되었기에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정식직원이 되면서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다 보니 그전에는 생각지 못한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언어의 차이였습니다.

 

컴퓨터 수리를 하려고 다른 회사 사무실이나 가정집을 찾아가면 어눌한 억양으로 인해 나의 출신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조선족이냐고 물어봐도 "", 강원도에서 왔느냐고 물어봐도 "예 맞습니다" 하면서 아무런 대꾸없이 일하다보면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그때 그 사람들이 제가 입국한지 1년도 안되는 탈북자인줄 알았더라면 계속해서 컴퓨터 수리를 맡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컴퓨터 수리 수요가 많이 줄어들게 되자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하나원을 나와 컴퓨터 학원에서의 아르바이트와 그 연장선인 컴퓨터 수리업무 밖에 경험하지 못한 저로서는 또 다른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사장님께 저의 결심을 말씀드렸더니 사장님은 섭섭해하시면서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서 고생한다"시며 극구 만류하셨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저의 결심은 이미 굳어진 것이라고 다시 말씀드렸더니, 정 그렇다면 힘들 때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라고 하면서도 못내 섭섭해하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서의 첫 직장생활은 6개월만에 끝나버렸습니다.

 

 

눈높이 취업

 

그후 34개월은 아르바이트도 하고 자격증 준비도 하면서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했지만 취직이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장님 말씀처럼 회사를 그만둔 것이 후회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옛 직장을 찾아갈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북한에서의 자격과 경력이 인정되어 오래 전부터 준비해오던 '화학기사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고, 운전면허증을 제외하고는 달리 내밀 것이 없었던 저에게 '화학기사자격증'은 저에게 '자신감'이라는 천군만마의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더더욱 구직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지다가 취업박람회나 취직설명회가 개최된다는 광고가 나오면 열일을 제쳐두고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훌륭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도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마당에 저와 같은 탈북자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소득의 직장을 구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일자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제가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충분히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눈높이'를 낮추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노동부 고용안정 센터로부터 일당 4만원의 임시직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보수는 높지 않지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리서치 회사'의 현장조사 요원이라, 사회경험이 일천한 저로서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올해 여름은 왜 그리도 덥던지.... 숨막힐 듯한 무더위와 차량들이 내뿜는 매연 속에서 이 회사 저 회사 찾아다니며 조사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리도 익숙치 않은데다 골목골목 들어앉은 회사들을 힘겹게 찾아가면 회사에서는 경기도 안좋은데 무슨 조사냐며 문전박대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여기서 그만두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참으며 이겨냈습니다.

 

매일 아침 지하철과 자전거를 번갈아 타고 근로현장에서 일하는 한국의 평범한 직장인들을 만나 이야기할 때면 때로는 나도 어엿한 한국의 샐러리맨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뿌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자신감을 쌓아가던 어느 날, 새로 모집된 조사원들의 OJT(현장교육)를 맡게되었습니다. OJT교육이라 해봐야 조사원들과 하루종일 같이 다니면서 현장조사 요령을 알려주는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저로서는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올랐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너무 대견해서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몇 개월 뒤면 없어질 계약직이었기에 계약기간이 끝난 후를 대비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1년 전쯤 탈북자 취업박람회에서 만났던 북한이탈주민후원회분들의 도움으로 공기업 특채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북에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였던 만큼 한국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취직시험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유를 찾아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면접시험을 보던 날, 생각보다 까다로왔던 질문들로 불합격을 예상하면서도 막상 발표날이 가까와질수록 떨리는 마음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생각보다 빨리 합격통지 전화를 받았을 때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자격을 가진 한국의 젊은이들이 취직을 못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 북에서 왔다는 이유로 이미 많은 혜택을 받은 제가 남들이 선망하는 공기업의 사원이 되고보니 왠지 대한민국에 빚을 진 듯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렇게 모든 분들의 축하를 받으며 이전에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신입사원 연수원에 입소하였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자유를 찾아 처음 하나원에 입소할 때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또 다른 시작이었으며 희망의 싹틔움이었습니다.

 

 

에필로그

 

처음 수기를 쓰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남보다 특히 나은 것도 없는 제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나싶어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탈북 동료들의 정착에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주위분들의 설득에 어렵게 승낙을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처음 하나원을 나와 구직활동을 할 때에는 첫 월급이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이고 나중에 과연 내게 어떤 도움이 될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의 초년병 일수 밖에 없는 우리 탈북 동포들에게 직장에서의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삶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소한 경험이 쌓이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심감이 생기고 그러한 자심감은 머나먼 인생항로에 있어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매일 아침 붐비는 출근길의 행렬 속에 양복을 입고 서 있는 제 모습이 아직은 낯설기만 합니다.

 

"내가 오늘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바랬던 내일이었다"

 

요즘 제가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되새기는 말입니다. 오늘 그토록 힘들게 보냈던 직장에서의 하루는 그런 날을 꿈꾸며 생사의 갈림길에 나섰다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한줌의 흙이 되버린 꽃다운 청춘들이 그토록 바랬던 하루였던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200412월 장 동 혁

 

 

2005-01-27 12:24:23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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