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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南탈북자 北아들에게 - 이주일

작성년도 : 2006년 66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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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아들에게

- 이주일

 

 

우린 감옥 면회실에서 만날 순 없다

민주화되는 그날 떳떳이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이 밤, 아버지는 북에 있는 너의 생각이 간절해 침대를 박차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쓴다.

 

금강산에서는 28년 전 김정일이 납치했던 메구미씨의 남편 김영남씨와 남한에 있는 가족들의 상봉이 눈물겹게 안겨온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면회가 당장 취소될 듯한 위압감 때문일까? 그 눈물겨운 상봉시간들이 아슬아슬하게만 느껴지는구나. 만약 김영남씨가 "내가 납치된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유골이 묻혀 있는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는 진심의 말이 나왔더라면 김영남씨 가족은 곧바로 정치범 수용소로 갔을 것이다. 또 김씨의 어머니가 "이 납치범들아! 내 아들을 고향에 데려가겠다."는 말만 나왔어도 면회는 즉각 취소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아, 제발 우리 상봉은 김정일 정권 하의 거대한 감옥에서, 금강산의 감시받는 면회실에서는 상봉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게 이 아버지의 소원이다.

 

당원이 되어 결혼식도 당창건 기념일

 

며칠 후면 74일이다. 10년 전쯤, 199774일은 너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이란다. 이 날은 이 아버지의 생일이기도 하고, 남과 북이 7.4공동성명을 발표한 날이기도 하다. 매우 의미 있고 또 슬픈 날이란다.

 

4살 난 너를 꼭 껴안고 눈물 흘리던 그 날, 이 아버지가 어디로 떠나는지도 모르는 너의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걱정 말고 어서 떠날 길을 가게나!” 만약 그때 너의 어머니가 집에 있었더라면 나를 부둥켜안고 놓아주질 않았을지 모르겠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너무도 위험한 길이었기 때문이란다. 이 아버지는 너에게 약속했다. 여섯 달 전에 꼭 돌아온다고…….

 

아들아! 너는 기억조차 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너의 어머니가 보관한 아버지의 '노동당원증'을 보여주며 너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기억을 상기시켰을지 모르겠다.

처녀 시절 너의 어머니는 고사총(고사 기관총) 중대 정치지도원(정치장교)이었단다. 멋스러운 군복차림에 반짝거리는 각띠와 군화를 신고 이 아버지의 앞에 나타났을 때는 정말 내가 땅에 잦아드는 듯한 느낌이었단다. 너의 어머니는 인정받는 떳떳한 노동당원이였고, 어엿한 정치군관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10년 동안 대학공부나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당원 '3대혁명 소조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너의 어머니는 이 아버지를 따랐단다. 그저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큰 힘을 주었단다. 3대혁명 소조원 활동기간에 꼭 노동당에 입당하라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도 1010일 조선노동당창건 기념일에 맞췄다.

 

당시 3대혁명 소조원들이 노동당에 입당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김정일이 노동당원들의 질적 양성을 요구하며 인민군대와 3대혁명 소조원들의 입당뽄트(TO)를 대폭 줄였기 때문이란다. 이 아버지가 입당을 하고 대학에 돌아왔을 때, 전국 각지에 파견되었던 3대혁명소조원 300명 중 입당한 사람은 아버지 한 명뿐이었다.

 

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당증을 펼쳐들고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단다. 아버지는 너의 어머니에게 나는 조선노동당의 당원이지, 김정일 개인의 당원이 아니다고 외쳤단다. 그 말이 나오자 어머니는 내 입을 손으로 막으며 그러다 정치범으로 잡혀가요라고 말했단다.

 

네가 태어나던 날 잊지 못해

 

 

[북한에서 찍은 필자의 가족사진]

원래 아버지는 중국에서 6개월을 넘기지 않고 너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중 국경의 삼엄한 경비로 그 시간을 넘기게 되었다.

 

노동당 규약에는 6개월간 당생활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 자동 출당된다. 출당은 곧 반당행위이며, 엄격한 처벌이 가해진다.또 그동안 행적을 조사하면 중국에 갔다는 사실이 들통 날 것은 당연했단다. 그렇게 되면 이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너와 너의 어머니까지 산골오지로 추방되는 것은 명백했단다. 그래서 그동안 벌어놓았던 달러를 너의 어머니에게 전달되도록 지인에게 부탁하고 오랜 고민 끝에 중국을 떠났다.

 

한국에 와서 너의 어머니 재혼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아버지는 괴로웠다. 너의 어머니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야 할일을 못한 지난날들이 너무도 후회스러웠기 때문이란다. 혹시 남편을 잘못 만나 너의 어머니가 고생하지 않을까, 또 네가 구박이라도 받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단다.

 

아버지는 너의 어머니와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바로 다음날 함경북도 배치지로 떠나야 했고 1년에 한번 있는 휴가마저 연구에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직장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집단배치' 되었기에 또 너와 떨어져 살아야 했단다.

 

그래도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쁜 일이 있었다. 네가 태어난 219, 그날은 아버지가 함경북도에서 당중앙위원회가 주최하는 과학기술토론회에 참가하라는 지시를 받고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던 중이었다. 아버지는 열차에서 목적지를 바꿔 너의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열차 안전원들에게 단속되었지만 통행증에 목적지가 '당중앙위원회'로 밝혀져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 날 너의 어머니를 만나는 순간, 만삭의 너의 어머니는 너무도 감격한 탓에 곧바로 진통을 겪으며 너를 낳았단다. 젖이 나오지 않아 빽빽 울어대는 너를 안고 진땀을 흘렸지만 너무도 큰 보람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그대로 평양에 갔더라면 네가 태어나는 것도 볼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후 평양에 갔을 때는 이미 토론회가 끝나 상급 당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지만 마음은 기뻤단다.

 

밝고 푸른 하늘 아래 당당히 만나자

 

이 아버지의 소원은 오직 하나, 북한이 민주화되는 그날 너를 만나고 싶은 것뿐이다. 아들아! 이러한 바람이 어찌 우리들뿐이겠느냐? 남한에 살고 있는 8천여 명의 탈북자들과 1천만 이산가족들의 진정한 소원이란다. 그들은 모두 감옥에서 잠깐 면회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금강산 면회실 만남을 진정한 가족상봉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단다. 물론 김정일 독재정권이 존재하는 한, 그 꿈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보고 싶은 아들아!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라. 우리가 만날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남녘에서, 너는 북녘에서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서로 노력하자.

 

사랑하는 아들아.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을 보니 오늘 따라 유난히 네가 보고 싶구나. 그러나 아들아, 우리는 저렇게 만나지는 말자. 북한이 민주화 되어 김정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밝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당당히 만나자.

 

2006629일 남녘에서 아버지가.

 

이주일 탈북인권운동가

 

 

2006-07-03 16:52:5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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