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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너도 자유가 그리운게구나" - 한영진

작성년도 : 2005년 60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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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자유가 그리운게구나"

- 한영진

 

 

좌충우돌 한국정착기 - 한영진(데일리엔케이 기자)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대로 살아야지

 

항상 쓰는 글이지만 포커스를 어디에 둬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글을 쓰자니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펜 대신 자판을 두드리는 편리함이 있지만, 오히려 고급한 환경은 고뇌를 할애해야 하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따른다. 뭐니 뭐니 해도 독자들에게는 탈북자들의 남한정착생활과정을 담는 것이 감칠맛이 있어 보이기에 간단한 생활체험을 담는다.

 

얼마 전 어느 한 통일부 관계자를 만났는데, 탈북자들이 하나원을 나와 한 일년쯤은 그저 일 없이 논다고 한다. 물론 실제 통계숫자에 근거했는지는 몰라도 나도 반년은 그렇게 살았다.

 

밤에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고, 다음날 10시에 일어나고, 직업훈련학교는 오후 타임을 끊어놓고 밥을 먹고는 학교로 간다. 이런 생활이 반년쯤 지속되다 보니 이러한 악순환이 생활의 공허함을 낳고, 남한과 같은 무한경쟁사회에서 도저히 발 디딜 자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런 생활세태로부터 탈피하게 된 것이 아마 어느 한국사람을 만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는 강남에 한다 하는 병원의사이고 자기 집도 가지고 있는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에 보통 10시까지 학원에 나간다고 했다. 처음에는 외도하지 않냐고 아내가 의심했다고 했다. 그 후 아내도 학원에서 자기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남편을 보고는 이해하고 자기도 열심히 저녁시간에 미용을 배운다고 했다.

 

강남에 집도 있고 직업도 철밥통을 지고 있으면 누가 뭐래도 잘나가는 사람이지만, 그는 항상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무한경쟁사회에서 자기 개발을 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낙오자가 되고,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임대아파트에, 정부에서 지원해준 정착금에 연연하면서 과거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 한국사람과 놓고 보면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치부의 탐욕을 떠나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이 나도 무한경쟁시대인 남한에서 당당히 남한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우리 신문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10시까지 중국어 학원에 들어가 공부한다. 하루에 원고 A4용지 3장 분의 기사 두건을 써야 하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학원에 가서 90분 강의를 받자니, 피곤하고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다.

 

그래도 아침에 일찍 기상해서 배포된 신문을 죽 읽어보고, 오늘의 기사거리를 생각해야 하고, 머릿속에 글을 저장해야 한다. 여기에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저녁에 중국어 공부는 준비가 미비한 상태로 참가하곤 한다. 그래도 중국에서 TV 청취와 중국 신문독해는 막힘 없이 하던 터라 공부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이번 학원이 만료되는 날에는 시간을 잡아 HSK 8급에 도전할 생각이다.

 

열심히 살다 보면 자기가 돋보여 뿌듯해질 때가 있고, 또 생활의 한 측면이 소멸된다는 소외감이 밀려오곤 한다. 우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데 긍지감이 있고, 남한사람들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될 때 쾌감을 느낀다. 비록 지금은 박봉에 시달리며 생활이 어려워도 능력이 되고, 당당히 경쟁하게 될 때면 어디선가 ‘CALL’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진다.

 

소외감을 갖는 측면이라면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줄고, 술 마실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젠 친구들 얼굴 본지도 꽤 오래돼, 간혹 짠돌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지만 술 마시고 싶으면 전화 줘, 그러면 내가 한방 쏠게하고 자기위안에 그칠 뿐이다.

 

신문 신문이 어떻게 다를까

 

새벽 4시경일까, 잠을 자다 이상한 꿈덕분에 더 못 자고 답답해 밖에 나갔다. 우리 집은 13층인데, 밑을 보면 아찔하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별안간 열리더니 웬 아지미가 달려 나와 신문을 뿌리고 다시 타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신문 배달부들이다.

 

남한의 신문은 싸고 보기가 편리하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되어 젊은이들은 보지 않고 늙은이들만 본다고 하지만, 판매부수는 늘어나고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남한언론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사회에 독자적으로 한자리 굳혔다. 한달 구독료가 12,000, 두툼한 종이에 비하면 너무 싸다. 하루 신문값이 500원이면 종이 값, 기자월급, 출판인건비도 안 나와 장사가 안될 것 같다. 거기에 서비스로 1년 구독에 자전거까지 준다고 한다. 그러나 언론사들끼리 서로 반발이 일어나 올 4월 초부터 없어졌다고 한다.

 

언론이 독자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기업을 비판해도 아무 탈 없다. 북한 식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중요일간지 신문사에 다니고 있는 기자친구에게 물어보니 자기네 신문사 신문은 하루에 200만부 이상이 나간다고 한다. 매출을 대략 계산해보니, 10억이다. 그런데 200만부를 개인의 손에까지 다 들어가게 하자면 14억이 든다고 한다. 그럼 매일 4억씩 밑지고 들어간다. 4억씩이면 한 달에 백억 가까이 된다.

 

그럼 그 적자를 어디서 어떻게 메울까, 그래도 신문사 기자들은 월급도 잘 받고, 건물임대료도 밀리지 않고 잘 돌아간다. 이것이 언론의 장사이고, 마케팅전략인 것 같다.

 

나는 언론이 누구의 눈치를 보고, 지나치게 상업적 목적에 이용되는 것은 안 좋아 보인다. . 영리성 광고가 지면의 60%이상을 채우고, 실지 볼만한 내용은 별로인데, 본문 36, 경제신문, 광고 전단지까지 합하면 두툼하게 한 권 잘 된다.

 

한국신문의 목적은 멤버십확보에 둔다. 구독자가 많아야 광고 청탁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 신문은 가격이 형편없이 싸다. 싸서 많이 볼 것 같지만 대신 부수가 적어 일반 주민들이 못 본다. 예를 들어 은 보는 사람도 극히 제한되어있다. 남한에서 일반 시민들이 전화만 해도 볼 수 있지만, 북한은 당원이라도 세포비서나, 중견급 간부가 되어야 볼 수 있다. 을 보는 사람들은 간부에 속한다고 남녀가 처음 만나 이야기 할 때도 집에서 노동신문을 보는가?’고 묻는다. 본다고 하면 간부집 자식일 것이고, 안 본다면 백수의 자식으로 판별할 정도다.

 

90년대 중반 노동신문은 한차례의 위기를 겪었다. 노동신문지가 회수되지 않아(사람들이 담배말지로 이용) 매일 배포되지 않고, 3~4일 심지어 한 주일씩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신문의 목적은 아무래도 사상성이니, 어떤 내용으로 전개하는가가 문제다.

 

말 난 김에 한마디 하고 싶은데 종이의 질을 높여야 한다. 집권당의 기관지 치고 너무 권위가 없다. 노동신문 종이재질은 여기 동네신문보다도 못하다. 일년에 한번이나 배포되는 신년사지와 같은 노동신문이 여기 일간지의 종이와 같다.

 

한국사람들 진짜 시력이 안 좋은가

 

중국 심양에 있을 때 한국사람들을 몇 명 만나 본적이 있었다. 북한에서 적막한 도시만 보던 내 눈에 펼쳐진 심양의 거리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명멸하는 네온사인, 도로가운데서 음식을 파는 상인들, 장사를 위해 켜놓은 전깃불은 도시전체를 찬빛으로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내가 만났던 한국사람들은 중국사람들과도 약간씩 틀렸다.

 

단정한 면티차림의 살결이 뽀잇하고 머리는 흰 살이 들여다 보이게 짧게 깎았다. 열명 중 8명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어떤 것은 무테로 된 것이었고, 어떤 것은 아주 섬세하게 가공한 금테안경으로 보였다.

 

생신한 차림에 안경까지 쓰니 금상첨화였다. 중국에서도 안경문화가 발달되었다고 하지만,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거의가 다 도색한 가짜였다.

 

안경 쓴 모습이 하도 좋아 보여 중국에서만도 안경 두 개를 샀다. 무도수 안경을 사서 멋으로 끼고 다녔다. 그런데 얼마 안가 거추장스러워 안경을 벗어버렸다.

 

한국에 들어가면 멋있는 보호 안경을 하나 맞추리라 생각했다. 한국에 들어오니 안경 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어떤 집은 아들 딸 포함해 온 가족이 안경을 썼다. 안경 낀 사람들은 코등에 자리 난다고 몹시 시끄러워했다. 요즘은 안경을 안 쓰고 렌즈를 맞추어 넣는다고 한다.

 

주민들 대부분이 안경을 쓰지 않는 북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 무엇때문일가, 책을 너무 많이 보아서일까, 아님 유전성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누군가 공부를 많이 해 그렇다고 한다. 더구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컴퓨터를 많이 해 눈이 피로를 느낀다고 한다. 암튼 안경문화부터 북과 남은 다르다. 이제는 어릴 적부터 거추장스럽게 안경을 달고 다닐 어린이들이 걱정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남한으로 나온 탈북자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 봤으리라 생각한다. 또 통일이 되면 북한사람들이 가장 궁금한 문제도 안경궁금증일거라고 생각한다.

 

'공경 문화'

 

한국의 거리는 깨끗하다. 미화가 잘된 곳도 있지만, 사람들의 문명의식이 높다. 침을 함부로 뱉지 않고, 담배꽁초도 마구 버리지 않는다. 흡연장소가 따로 있어 길을 갈 때나, 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을 삼간다. 사람을 무안하게 마주 보거나, 면전에서 침을 뱉는 것 자체가 피해라고 생각한다.

 

암튼 물질적 풍요가 사람들의 도덕적 문화의 질을 제고시킨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본다. 개성이 존중되고 공경문화가 저 윗동네에도 빨리 전파되었으면 한다.

 

한편 한국사회의 내면을 보면 결국 인간이 사는 사회는 피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도 살면 살수록 그 진모습이 차츰 드러난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나눌 줄 모른다. 혹 지하철에 올라서도 애기 업은 엄마가 앞에 힘들게 서 있어도 자리를 양보할 줄 모른다.

 

어느 하루 지하철에서 목격한 일이다. 퇴근시간이라 지하철에 사람들이 넘쳤다. 겨우 비비고 들어섰는데, 종로5가역에서 늙은이들이 우르르 올랐다. 앞장선 늙은이가 노약자 좌석을 들러 보았지만, 자리는 없었다.

 

그러자 발길을 돌려 무작정 일반석 앞에 가 아가씨를 훑어 보는 것이다. 아무런 동정이 없자 요즘 애들은 도덕에 가물이 들었어? 어서 일어나지 못해!” 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황급히 쫓겨 일어난 아가씨는 쑥스러운 듯 얼굴만 발개져 다음 역에서 내리고 말았다. 아마 목적지는 아닌 듯싶은데,,,,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예의가 없다, 이 나라를 위해 땀 흘린 어른들에게 자리하나 양보할 줄 모른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주책없이 나이 값을 할 줄 모른다고 수군거린다.

 

늙은이들도 돼먹지 않았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느라고 힘들어, 업무스트레스 받아 힘들어 하는데,,,, 종로5가에 모이는 늙은이들은 할일 없어 말 사냥하는 노인들이다.”,,,

 

하루 종일 휴식을 하다가 늙었다는 이유로 자리를 내라고 하면 늙은이로서 체면이 서는 소린가? 차라리 좀 일찍 집에 가던가, 아니면 나오지 말고 집에서 휴식이나 할 것이지 하는 의론이 분분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 동양에서 젊은 학생이 유학 가서 겪은 첫 아침의 이야기다.

 

12층이나 되는 오피스텔로 한 늙은이가 신문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자 그 동양 학생은 공손히 배달 온 늙은이에게 미안합니다. 다음부터 괜히 걸음 하지 마세요, 내가 날라다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씩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너도 나이 먹으면 나 같은 늙은이가 될 텐데, 난 좀 먼저 나왔다 뿐이지 같은 사람이다) ,,,,,,,

 

유럽의 늙은이들의 생각은 동양의 늙은이와 생각하는 것이 확실히 다르다고 한다. 그 동양유학생의 공손한 소리에 (네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라는 선입견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너무 빨리 가는지,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기만 알고 사랑을 베풀려 하지 않는다. 승부욕이 강하고 질투가 강하고, 겉으로는 좋은 소리를 해도 속은 딴전이 있다. 하긴 자본주의 사회이니, 자기 것이 없으면 남의 것을 넘보는 것 자체가 피해자의 약탈의식이지,

 

또 젊은이들이 자리를 내주면 늙은이들은 고맙다는 소리한마디 없이 그냥 엉덩이를 부치고 앉아있는다. 최소한의 고맙다는 답례라도 보내야 옳은 나눔 문화가 아닐까

 

나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이번 한주일간 중국을 다녀왔다.

떠날때 여행비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마침 대표님이 출장비로 도와주셔서 원만히 여행을 다녀왔다. 국장님은 내가 중국에 들어갔다가 연행이라도 되면 국제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겠다고 하신다. 고마운 분들이다. 내가 납치되면 특종이긴 하지만 말이다.

 

요 먼저 나는 '공경문화'라는 자신의 소견을 남긴적이 있었다. 자기환경의 기준이랄가, 너무 비판적인 견해인지는 몰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대한민국국민이라는 자신심을 가져본적이 일찌기 없다.

 

이번 중국에 가보았을때 일이다.

중국인들은 한국사람들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무섭게 추격하는 중국의 GDP 9.5%성장에 나도 우려를 가지고 중국이 대한민국을 추월하는 날에는 인위적인 섬나라 대한민국이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나뿐이 아닌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이라고 본다면...별로 이상한것도 없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을 따라서자면 최소한 20년은 걸릴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이 추격하는 20년 동안이면 대한민국은 30년 앞서 가면 얼마든지 그 우려는 해소할수 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것은 우선 대한민국국민들의 우수한 문명 정신세계이다.

 

중국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택시기사들, 먼지 날리는 거리의 골목, 한푼이라도 벌기 위해 눈을 밝히는 사람들, 도심에 자리잡은 대형 기계공장들, 굴뚝에서 나오는 꺼먼 연기들,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나오는 매연, 골목마다 날리는 쓰레기들, 크윽~~~

 

중국의 상해가 대한민국의 서울과 버금간다고 하지만 중국의 전반적수준을 대한민국의 농촌마을 아스팔트 길처럼 닦기 까지는 20년이 소요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이번에 가서 달라진것을 보니 단지 내가 숨어살던 마을에 먼지날리던 도로가 포장이 되었다는것이다. 그것도 아스팔트가 아니고 시멘트포장으로 ..... 암튼 중국은 부정부패가 많아 엉망이다. 먼저 정신문명 개혁부터 해야 될것같다.

 

서울에 아무리 차가 많아 공기 나쁘고 밤에 하늘의 별이 안보인다고 하지만 도시구획도 잘되어 있고, 조용한 나라다.

내가 중국에서 숨어다닐때 우상으로 보았던 북한의 형- 중국이 그러한데, 그렇다면 북한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힐가?

오늘도 밤길을 걸으며 다시 생각해본다. 대한민국이 살만하다고......

 

인터넷과 나

 

나는 요즘 들어 인터넷문화가 이렇게 유력한줄 몰랐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 많다.

오프라인만이 효과적이라는 북한식 생각을 바꿔야 하는것이 대한민국정착의 중요한 측면인 것같다. 온라인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정보를 접하고, 남한사람들에게는 인터넷이 생활의 한부분이 되었다.

 

나도 인터넷을 통해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을 탈출했고, 지금은 한국에서 인터넷 업계에 종사하고 있으니, 나와 인터넷은 특별한 연분이랄까, 나는 지금도 내가 지금이라도 자유를 찾은것이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지금 내 나이는 한창 배울 나이가 아니고 한창 일할 나이다.

 

북한에 있었으면 당에 입당하겠다고 뛰어다니고, 당에 입당하면 간부들에게 잘 보여 출세하겠다고 무슨 찌그러진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욕설과 추궁, 반복과 짜증, 생각만해도 지금 나의 생활이 얼마나 보람있는지 모른다. 자기 계발을 위해 바쳐지는 삶이 보람차다.

 

나와 함께 나온 사람들속에는 인터넷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마주서서도 믿기 어려운데, 서로 보지 못하고 신뢰가 가는가고, 차라리 그림을 볼바에는 두발로 걸어다니며 품을 파는 편이 낫다는 거다. 그사람들은 예외없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두뇌감각이 무디어진 늙은 나이에 내가 대한민국땅을 밟았더라면 내가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을가?

 

인터넷신문사 기자로 입사할 때 종이신문 보는 사람이 인터넷 신문을 볼가? 사이버상의 내용을 얼마나 신뢰할가? 등등의 궁금한 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외로 보는 분들이 많았다. 김교수님을 비롯한 인권관련, 북한관련 권위있는 분들이 우리신문을 많이 본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씩 전화를 걸어오군 한다. 그때마다 좋은 글을 많이 써달라는 흔흔한 부탁을 받는다.

 

좋은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좋은일이 많아야 좋은 글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너도 자유가 그리운게구나

 

지난 3월 일요일에 쇼핑을 하기 위해 롯데마트를 찾은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사는 중계동은 상권이 좋은곳입니다. 집을 나서면 반경 500미터 안에 롯데마트, 2001아울렛, 건영옴니백화점, 롯데백화점, 까루프, 세이브죤 등 큰 상가만 해도 6개가 됩니다. 게다가 마들공원, 그린공원 등을 꼽자면 당연히 한국에서 집값이 가장 높은것 중에 꼽힐것입니다.

 

롯데 마트를 돌며 취미로 무얼 키울까, 물고기를 키워볼까, 화분을 키워볼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일 갔다가 들어오면 무언가 반겨줄만한 생명이 필요한데, 북한식으로 생각하면 문화정서생활이었습니다.

콘크리트 아파트의 돌냄새만 맡고 살자니,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무겁고, 일나가면 스트레스만 받으니 말이지요,,,,,

 

그래서 어쩌다 근교에 나가면 기분이 좋습니다. 땅에서 나서 땅으로 가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요.

기분이 좋고 해주는 음식이 너무, 너무, 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身土不二라고 하는지. 자연을 떠나 아스팔트를 걷고 아파트 돌집에서 살다보면 사람이 미쳐지는 이상한 징후가 감촉되곤 해서요. 우정 가까이 해보고 싶은것이 집안에 화초를 키우고 물고기를 키우고 하는 정서생활이었습니다.

 

뭘 살가고 두리번 거리는데, 어항안에 자라같은것이 신기해보였습니다. "자라를 좀 보여주세요"라고 하자 판매원은 "이건 자라가 아니라 거북이 입니다"라는 것이다. 아니, 거북이는 300년을 이상을 산다는 지구상의 좌상인데, 손톱만한게 참 깜찍하기도 했습니다. 판매원은 청거북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럼 거북이를 한번 키워보자) 이렇게 결심하고 한쌍에 2만원을 주고 샀습니다. 어항은 차츰 돈이 생기면 큰것으로 멋있는것으로 사기로 하고 먼저 거북이만 사가지고 총총 걸음으로 돌아왔지요.

 

먹이를 주고 하루 하루 커가는 모습만 지켜보았습니다. 처음에 손톱만 하던 거북이가 이내 500원짜리 동전만 해지더니, 3달후에는 탁구알 만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수컷으로 추정되는 거북이는 밖에 나가지 못해 계속 헛다리질을 하며 버둥댔습니다.

어느 하루 자고 일어나니, 그만 수컷이 실신해 죽어버렸습니다. 아마 밖에 나가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고 죽은것 같았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살아야 할 거북이가 조그만 삶의 공간- 어항에서 얼마나 속상하면 죽었을까, 시체를 거두면서 거북이와 다룰바 없는 나를 돌이켜 보기도 했습니다.

 

한마리밖에 남지 않은 거북이를 이젠 다시 죽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먹이도 열심히 주고 물도 새것으로 매일 갈아주게 되었습니다.

거북이도 생 돼지고기점을 아주 잘 먹었습니다. 깜박이는 눈을 보니, 귀엽기도 했습니다.

한참 바라보며 웃음을 찾고, 또 밖에 나가지 못해 바둥대는 거북이가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먹이도 잘 먹지 않고 거북이는 계속 헤엄치는 연습만 하고 나날이 여의어가더라고요. 앗차, 저것들도 자유가 그리워서 저러는구나. 나는 미처 그것을 풀어주지 못한것이 후회되기도 했습니다. 우리집에서 보이는 곳이 중랑천이고, 근데 거기는 오염되었거둔요.

 

그런데 930일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른다는 소식이 전해졌지요.

거북이를 맑은 청계천에 놔주자, 이렇게 생각하고 비닐에 싸가지고 지하철을 타고 청계천 복원기념식을 거행하던 청계천으로 가게 됐지요.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이 청계천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모두 도심속의 자연을 만끽하기 위해 즐거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개울에 발을 담구고 즐겨 웃는 아이들의 모습들.......

 

그걸 보니 고향 청천강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의 청계천보다 더 맑은 청천강을 생각하며 내가 얼마나 좋은 땅에서 태어났는가를 실감하게 된 기회이기도 했지요. 한가지 걱정스러운것은 거북이가 살기에는 먹이가 없을것 같고, 물살이 좀 빨라 보였습니다. 청계천 상류에 올라 거북이를 놔주었지요. 물살에 떠내려 가는 거북이가 상류로 거스르기 위해 안깐힘을 쓰기 시작했어요. 놔주고도 나는 차라리 떠밀려 한강을 거쳐, 바다로 나가기를 바란답니다. 바다로 나가 300, 500년 명이 닿을때까지,,,자유롭게 살기를 빌어봅니다.

 

200511월 한영진

 

 

2005-11-29 10:35:24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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