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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연구원이 되기까지 - 최단

작성년도 : 2003년 606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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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이 되기까지

- 최단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렇게 시작하는 동요가 들릴 때면 아득하게나마 유년시절을 보냈던 내 고향 산과 들, 시냇물이 생각나곤 한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잠시나마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마도 남한에 정착하며 나름대로 생활의 여유로움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함경북도 한 고을에서 태어나 무럭무럭 성장하던 나는 가족들의 정치범 선고와 동시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다행이 어머니의 적극적인 교육열 덕분에 전문대학에서 자동차관련 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사회에서 난 아무리 잘살려고 발버둥쳐도 한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치범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극심한 식량난은 날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이었다. 98년 중국으로 탈출한후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 입국하여 지금은 가족들과 오순도순 모여 내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다.

 

난 남한사회에 정착하며 아직까지는 그리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조그만 전자회사에서 성실히 근무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이렇듯 평범히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는 것 또한 작은 성공일 수 있기에 부족하지만 나의 정착생활을 여러분께 소개해 보려고 한다.

 

어설픈 주차관리원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뭐라도 빨리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에 주차관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출구에서 요금을 정산하는 일이었는데, 이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컴퓨터를 모르니 주차증을 기계에 넣고 요금을 정산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자동차 종류에 따라 대형, 중형, 소형별로 차등을 두어 요금을 받았는데 차 모양만 보고서는 무슨 차종인지 몰라 매번 실수를 저지르기 일쑤였다. 경차의 경우에는 주차요금의 50%를 할인해 주는데 주차요금을 잘못 계산해 손님이 항의하는 일도 여러번 있었다.

 

주차장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느낀 것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제였다. 아주 간단한 일로만 생각했던 주차관리원 아르바이트도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으니 앞으로 직장생활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던 것이다. 남한은 아는 것이 능력이고 힘인 사회였다. 내가 적응해야 할 대한민국은 능력대로 대우받고 일한만큼 보상해주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열심히 배우자라는 굳은 결의를 마음속에 다졌다. 물론 그때당시 구체적인 계획까지는 세우지 못했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은 항상 내 목을 태우고 있었다.

 

직장생활과 진학,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얼마간 많은 고민을 했다. 무슨 공부를 해야 할까하는 것과 어느 대학에 가야하는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4년제 대학에 가는 것도 고려해 보았지만 이미 내 나이가 서른에 가까운데 4년을 투자해 공부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았다. 빨리 공부를 마치고 취직을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진주전문대 자동차 전자과에 입학했다. 북한에서도 자동차 관련 공부를 했지만 남한에서 별 쓸모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동차 기술중에서도 전자기술을 습득해 보고 싶었다. 요즘 자동차는 많은 부분이 전자기기에 의해 운영되고 통제된다. 이 분야를 공부해 두면 여러모로 취업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입학을 앞두고 자동차 정비공장에 취직했다. 사장님께 자동차학과에 다닌다고 말씀드렸더니 열심히 배우면서 일해보라고 하시며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나를 흔쾌히 받아 주셨다. 내가 자동차 정비공장에 취직한 것은 학교에서 배운 기술을 실제로 응용해보기 위해서 였다. 물론 빠듯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기도 했다.

 

남한에서 자동차정비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선배들이 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배워 나가기 시작했고 간단한 작업은 혼자 하기도 했다. 정비공장에서 일했던 것은 내게 큰 자신감을 가져다 준 계기였다. 고장난 차를 겨우겨우 몰고 와서는 수리를 의뢰했던 고객들이 말끔히 정비된 차를 밝은 표정으로 찾아갈 때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경쾌한 시동소리처럼 내 기분도 그렇게 우렁차고 힘차게 느껴졌다.

 

C학점에서 A학점으로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낮에는 하루종일 기름때를 묻혀가며 일하고, 야간에 강의를 듣자면 몰려오는 잠을 쫓느라 교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대체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의내용도 내겐 어렵게 느껴졌다. 기술용어가 북한과는 너무 달라 용어를 이해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나 많이 걸렸다. 첫학기에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랴 직장에 다니랴 마음만 바빴지 생활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였는지 첫 중간고사를 치른 결과 성적이 평균 C학점으로 나왔다.

 

사실 그때당시 C학점이 어느 정도 점수인지도 잘 몰랐다. 교수님께 찾아가 여쭈어 봤더니 보통보다는 조금 낮은 수준이라고 말씀하셨다. 위로하시려고 그랬는지 다음 학기에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왠지 모르게 너무나도 창피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는 안되겠다는 반성과 함께, 공부를 할거라면 제대로 하자라고 마음속으로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그후로부터 손에서 책을 놓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책을 봤다.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퇴근후 무건운 눈꺼풀을 비비며 책상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몸도 피곤하고, 때로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도 과연 좋은 직장에 취직해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요즘 보도들을 보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그럴법도 했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은 쓰기 마련이려니.... 이렇게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런 꾸준한 노력 덕분에 졸업할 때가 되어서는 중간고사 평점을 A학점으로 올릴 수 있었다. 또한 자동차정비 관련 자격증 두 개를 취득할 수 있었다.

 

연구원이 되다!

 

대학을 졸업한 후 경기도 안산에 있는 ()아성프라텍에 입사했다. 우리 회사는 플라스틱 제품과 전자부품을 생산한다. 나는 회사 기술연구소에서 자동차에 들어가는 각종 전자부품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입사초기에는 연구소에서 시키는 일만 묵묵히 했다. 대학에서 배운 기술로는 선배들의 연구과정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구소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 지면서 담당하는 업무가 많아지고 그에 따른 책임감도 느껴졌다. 스스로 뭔가를 개발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가지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영어를 더 공부해야 할 것같다. 관련분야의 전공서적들도 꾸준히 봐야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수준에 뒤쳐지지 않을 것이다. 할 일이 많다. 지금까지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계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상쾌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출근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만물이 생동하는 듯한 활기찬 거리, 출근길 안파들, 햇살에 부딪히는 나뭇잎들.... 모두가 날 즐겁게 해주는 풍경들이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직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경쾌하다. 남한에 정착하며 힘든 일도 많았지만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작지만 소중한 나의 행복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야겠다.

 

2003.9 최 단 씀

 

 

2004-11-19 20:52:42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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