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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의 선택에 대한 찬가 - 안찬일

작성년도 : 2004년 49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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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부모형제를 버리고 사선을 넘어 왔는가"

지금으로부터 꼭 20년전 현재처럼 북한이 기아에 허덕이지 않던 시절 군사분계선을 넘어 이 땅에 온 나에게 많은 이들은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다. 미지의 세계에 도착하여 환희와 기쁨을 누려 보기도 전에 나는 깊은 마음의 갈등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사람들의 말대로 나는 부모형제를 폭압의 형틀에 내 맡긴채 왔으니 그런 정신적 학대 쯤은 가혹하게 받아 마땅한 놈이었다. 그리고 휴전선을 넘을 때만해도 나에게 기대감이란 그저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전부였다.

결코 떳떳하지도, 뭐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은 나의 과거에 대한 반추는 고향에서 부터 시작된다. 내 고향은 압록강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르는 평북 의주, 임진왜란때 선조임금이 피난생활을 한 바로 그곳이다. 6.25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7월 나는 초급당 간부로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상처는 컸지만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별로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고 다섯 살 때부터는 유치원에 의무적으로 다녔는데 매일 우유를 한컵씩 받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1967년 북한에서 최후의 권력투쟁으로 일컬어지는 의 숙청으로 박금철, 이효순 등이 물러나면서 꽤나 진급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말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 당시 북한의 중앙 및 지방 당 간부 2/3정도가 숙청되었으니 아버지의 내리막길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해방직후 공산당에 먼저 들지 않고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김두봉의 신민당에 먼저 들었고 그래서 언제나 당으로부터 고운 시선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우리가족의 성분이 원래 나쁜 것은 결코 아니기에 나는 고등학교 졸업후 대학추천을 받았고 그래서 신의주농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보다는 혁명가를 꿈꾸던 영웅사관을 실현하고자 군에 입대하기 위해 중도에 대학을 포기하고 전문학교로 옮겨 바로 군대에 입대하였다. 대학생은 군대에 갈 수 없지만 전문학교 이하의 학생은 군대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시 부활되었다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권력의 성골집단인 백두산줄기가 아닌 자들이 신분상승을 위한 탈출구는 군대로가 빠른 시간안에 노동당원이 되는 것이었다.

군 입대 만 4년만인 1974년 나는 그토록 소망하던 노동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정치군과(장교)이 되려는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당조직에 군관학교 입학추천을 강력히 제기하였다. 나는 군입대 얼마후부터 청년동맹 위원장으로서 나름대로 충성을 바쳐왔기에 군관학교 추천은 무난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아버지의 과거 경력은 내가 군관이 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는 나에게 정치지도원은 "반드시 김일성종합대학에 추천해 주겠으니 너무 상심해 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내가 속했던 최전방의 민경부대는 비무장지대 안에서 근무하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제대시 대학 및 안전부 등 나름대로 북한에서 괜찮은 곳으로 보내주기에 대학추천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나는 공부하는 것이 싫어 군복을 입지 않았는가?

이 때부터 나는 머리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과연 충성하면 한 것만큼 대우해 준다는 노동당의 말은 옳은 것인가. 노동자,농민이 주인이라는 나라에서 간부들은 꼭대기에서부터 줄줄이 세습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사회주의인가?

제대를 얼마 남겨둔 1979년 5월 나는 정치지도원으로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통보를 정식으로 받았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죽어도 대학은 안 갈테니 두고 보라며 이를 갈았다. 9년동안 군대에서 청춘을 다 소진했는데 이제 무슨 힘으로 또다시 대학에가 6년이상 공부하란 말인가? 특히 북한 대학은 남한 대학과는 달리 군대와 다를바 없는 제2의 용광로였다. 마침 1년전인 1978년 8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선배1명이 김일성종합대학의 교복을 입은채 부대에 나타났는데 그 모습은 한마디로 꼴불견, 즉 교복입은 청년이 아니라 교복걸친 노인이었다. 이상은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나 모두 사실이다.

내가 지금 남쪽으로 오게된 동기중에는 1973년 1월, 군복무중 어머님이 돌아갔는데 13일이 지나서야 휴가를 보내주어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못한 천추의 한도 한 몫 하고 있다. 아마도 어머님이 그대로 살아 계셨다면 내 입장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1979년 7월 26일 새벽 드디어 나는 30발이 장전된 한 자루의 자동보총을 들고 내가 군복을 입고 9년의 청춘을 바쳐온 서부전선의 한 고지. 아니 내 혈육 전부가 살고 있는 북한을 버리기 위해 남쪽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한 2-3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비상 싸이렌이 울 리는 것이었다. 순간 나의 심장은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이미 나의 바지가랭이는 전부 젖어 있었고 얼굴은 상기되다 못해 불덩어리처럼 활활타고 있었다. 이대로 남쪽으로 달릴까, 아니면 돌아서 고지로 올라갈까 그 찰나에 내가 생각한 것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탈출자가 이미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땅으로 가 있어도 무조건 중무기를 발사해서라도 사살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나는 머리속으로 변명을 떠올리며 고지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대장 강종량 소좌는 대뜸 "야! 너 바지가랭이가 왜 젖었어하며 다그쳐 물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체하며 저기 노루가 뛰어가서 잡으려다 그랬습니다라고 둘러댔는데 다행히 비상은 사단장이 자의적으로 걸은 것이고 나의 도망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부득불 그날 저녁 그렇게 공포를 안겨주던 비무장지대 그 전인미답의 지뢰밭을 가로질러 나는 월남을 강행했고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탈출이 반드시 새벽이나 저녁이어야 하는 것은 그때 약 20여분 동안만 3,300V의 고압선 전기 철조망 스위치를 내리기 때문이다.

이튿날 새벽인 7월27일, 나는 국군 장병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남쪽 사람들과 첫대면을 가졌고, 불과 몇시간 안에 여기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후 결혼을 하고 두 아들까지 두었지만 나의 삶이 행복할수록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러던중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지식이 곧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렇게도 배척하던 대학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줄곧 쫓던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실사구시의 참다운 인행행로를 선택하는 순간이었다. 1984년 3월 나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생이 되었는데 그 당시 내 나이 만 30이었다. 북한에서 맞닥뜨린 두 번의 대학공부 기회를 박차고 여기 서울에서 다시 제발로 대학문을 걸어 들어가는 나의 발걸음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머리에 대한 열등감만은 아닐 것이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과연 끝을 볼 수 있을까라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강의교재는 영어 아니면 한문이 잔뜩 쓰여진 골치 아픈 것들이었고 교수님들 역시 영어를 많이 섞어가며 강의하기를 경쟁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런대로 첫 학기는 넘겼지만 두 번째 학기에서 F학점이 3개가 나와 학사경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나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였다. 그런데 알아본즉 시험성적이 나빠서라기보다 결석으로 인해 학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 1년 전부터 집에서 영어를 개인지도 받았고 또 암기능력이 어느정도 있어 시험예상 문제를 달달 외우다 보니 그런대로 시험성적은 봐줄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방출장이나 방송국 출현이 잦다 보니 결석이 많았고 그것이 성적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포기라는 단어가 뇌리를 계속해서 때렸지만 집사람은 강경했다. "당신은 과연 통일후에 무슨 낯으로 가족들 앞에 나서겠는가라며 계속하도록 종용했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땅에 뿌리 내리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을 거야 다음 학기부터 나는 도시락을 싸들고 등교하기 시작했고 도서관에 자리잡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벼랑을 기어오르듯 하기를 4년, 1988년 2월 나는 영예로운 졸업을 할 수 있어고 그해 9월 다시 대학원에 입학하여 2년반만에 정치학 석사의 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나에게는 긴 터널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남북한의 두 체제를 경험한 소중한 자산을 잘 활용하여 계속 공부하여 통일에 이바지하는 통일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가슴속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1990년 5월 나는 다시 건국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과정에 응시하였는데 천만다행으로 합격하게 되었다. 전주 출장을 마치고 고속터미널에서 전화를 통해 교수님으로부터 합격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서울로 올라오는 2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곁의 사람들은 내가 흘리는 그 눈물의 사연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저 사람 실연당해서 저러나"하고 나름대로 묻고 답하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사과정의 수업은 기존의 학사,석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수업은 전부 원서로 진행됐고 리포트는 보통 1주일에 한편이 넘었다. 박사과정의 첫 학기부터 빠지기 시작한 머리는 2년을 넘기면서 대머리로 변하기 시작했고 집사람의 살뜰한 보살핌도 나의 혼돈스러운 머리를 정리시켜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혼돈과 집념속에 버티기를 7년, 나는 드디어 박사의 전반적 과정을 이수하고 논문을 작성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집사람은 직장생활에 바쁜 나를 대신하여 국회도서관과 각 대학 도서관을 비롯하여 여기 저기를 뛰어다니며 논문과 자료를 복사해 물어 들이고 나는 나대로 분석과 수정을 거듭하며 논문을 완성해 나갔다.

지도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의 정성어린 지도와 엄격한 질타는 바로 내 논문이 제 기한내에 통과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1997년 8월22일, 나는 많은 언론사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건국대학교 강당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휴전이후 지금껏 1천여명의 탈북귀순자가 있지만 박사학위를 받기는 내가 처음이라서 취재경쟁은 뜨거웠던 것 같다. 1998년 1월 내 박사학위의 논문은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정치학회를 통해 우수논문으로 소개되었고 그에 앞서 나는 나의 논문을 수정,발전시켜 「주체사상의 종언」이란 첫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다니엘 벨의「이데올로기의 종언」야코블레프의「공산주의 종언」에 이은 나의 「주체사상의 종언」은 최후의 이데올로기국가 북한에서 수령 절대주의 내지는 봉건주의로 전락한 주체사상을 정치문화적 각도에서 분석한 것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념의 포로가 되어 방황하던 내가 사실상 북한 사회주의의 종언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주체사상의 종언을 펴낸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둠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죽음의 언덕을 넘어 운명의 강을 건넌 나에게 이제 선택의 후회란 없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남쪽의 제도와 이념, 그것을 북한이란 비민주적이고 반인민적인 제도와 비교할 수 있기에 더욱 사관이 뚜렷해졌다고 나는 자부한다. 나는 나의 노력들을 통해, 그리고 쟁취한 나름대로의 성과들을 통해 남쪽이야말로 기회의 땅이라고 소리치고 싶다.

올해 1학기부터 나는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북한의 정치와 사회」란 과목을 맡아 대학강단에도 서게 되었다.

이제 나는 통일전문가로서 한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작지만 힘찬 발걸음은 통일의 문이 열 리는 그날까지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별로 세운 것도 없기에 무너질 것도 없는 북한 사회에서 오늘도 온갖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나의 가족들, 저 북녘에 남겨진 모습들은 다름아닌 7천만 민족에게 가서는 안될 길임을 계시하는 신의 충고임을 강조하면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들 모두가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동포이기에 그들을 구원하는데 미력한 힘이나마 기여하기 위한 나의 노력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 안찬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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