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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40년간의 생이별 - 김원형

작성년도 : 2004년 53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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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서의 일가 이산

북조선은 봉건적인 신분 국가이다. 지난날에 지주였거나 한국전쟁때 가족 중 남쪽으로 간 사람이 있는 집안은 북조선에서는 도저히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도록 돼 있다. 그런 사람들은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10세가 채 되기도 전에 양친과 생이별한 후로 적대계층 인간이라고 해서 줄곧 차별을 당해야 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전쟁중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에게는 따뜻한 보살핌이 있는 법인데, 북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그 부모가 지주였다는 이유로 아무런 죄가 없는 고아에게 벌이 줄곧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쌍둥이 아우와 헤어진 것은 폭격의 와중에서였다.

아버지는 전쟁전에 이미 남하하고 집에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내형과 나 그리고 쌍둥이 아우를 데리고 고향 순안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폭격을 당하게 됐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손을 잡고 어떻게 해서든지 남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포와 혼란 속에서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폭격이 끝나자 나는 어머니와 형제를 찾아 헤맸는데 터널 안에서 우연히 형을 만나게 됐다. 그러나 다른 가족은 영영 찾을 수 없었다. 이럴 때 아이들은 살던 집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형과 나는 순안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쌍둥이 아우만을 데리고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향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양친과 아우의 소식을 모른 채 딴 인생 길을 걷게 됐다.

꿈같은 만남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나는 부모형제가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설사 살아 있다고 해도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다 죽은 것으로 생각하는 게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랬던 게 이별한지 40년만에 기적적으로 이산가족을 찾게 된 것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미국에 살던 이모의 고향방문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모에게 고향에 가면 꼭 나를 찾도록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의 어머니와 쌍둥이 아우가 미국에 살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듬해(1990년) 6월에 어머니와 아우는 고향방문단에 끼어 나를 찾아 왔다. 뉴욕을 떠나 북경경유로 신의주에 온 어머니와 아우의 손을 잡고 나는 한없이 울었다. 그때 어머니는 일흔이 넘는 나이였다. 그런 분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아들을 찾아 온 것이다. 대개 이럴 때 사람들은 온갖 사연을 털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북조선에서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복수의 감시자가 해외교포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40년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만남도 손을 붙잡고 울기만 할 뿐 이렇다 할 감정표현은 하지 못했다.

한밤중이 돼서 감시자들이 돌아간 다음에야 우리는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감시자들이 옆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는 계속 피곤하다는 말만을 했는데, 그들이 돌아가자 『그 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았느냐?』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저는 괜찮았지만 어머님은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남쪽으로 내려간 어머니와 아우는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길을 떠났고, 지금은 뉴욕에서 자리잡고 지낸다. 그 동안에 겪은 고생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어머니는 똑 같은 고생이지만 내가 겪은 고생은 훨씬 지독했으리라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간 것을 보면 남한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이겠지?』

『형님, 한때 남한도 살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발전했답니다. 자가용 승용차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이니까요. 생활수준도 미국을 따라 잡을 만큼 높아졌어요.』

아우는 나지막한 말소리로 남한의 발전상, 사회주의권의 붕괴 등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가까스로 억제하면서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아우의 얘기를 듣고 나자 내 마음 한구석에 잠자고 있던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꿈틀거렸다. 내가 탈출을 처음 생각한 것은 1976년이었다. 그 때 나는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환경은 이만저만 열악한 게 아니었다.

김정일의 등장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의 수는 해마다 증가해 1976년에는 절정에 달해 약 2만 명이 일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대부분은 나처럼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실상의 추방이었다. 소련의 스탈린이 「계급적 원수」를 시베리아로 추방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김정일도 「계급적 원수」를 시베리아로 추방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 경우에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스탈린은 「계급적 원수」의 시베리아 추방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지만, 김정일은 그 일을 이용해 소련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얻어내려고 했다.

이처럼 이른바 적대계층 출신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게 된 것은 김정일이 정치에 간여하게 되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때까지는 차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징벌이나 다름이 없는 차별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내 경우만 해도 인민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또 복무기간중 출신성분 때문에 박해를 당한 경험도 없다.

그랬던 게 김정일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게 바뀌게 됐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도 나는 혹한지역으로 쫓겨갔을 뿐 아니라, 연일 추위에 떨면서 지정된 분량의 나무를 벌채해야 했다. 손발이 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머리카락에도 고드름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그런 추위 속에서 나는 감각이 없어진 손을 쉴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벌레만도 못한 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주위에는 감시하는 눈이 번득이고 있어서 노동자들은 말도 제대로 못한 채 기진맥진할 때까지 나무를 벌채하기만 했다. 커다란 나무가 서서히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라리 저 나무에 깔려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 김원형 ---
 
장래가 없는 북조선생활

시베리아생활은 바깥 세상에 대한 나의 눈을 뜨게 했다. 귀국한 다음에도 더 있어보았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는 편인데도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쟁 때문에 인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성년이 됐다. 그래서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야간학교에 들어가 의무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런 관계로 자식들만은 고등교육을 기어코 받게 하고 싶었다.

그러니 자식들의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됐을 때 내가 얼마나 화났겠는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을 때 뜻밖에도 어머니와 아우가 살 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듬해에는 40년만에 두 사람과 만나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아우에게서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됐으니 또 다시 탈출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화돼가는 탈출계획

어머니와 아우의 방문은 물질적으로도 나에게 큰 힘이 됐다. 그때 받은 외화의 일부를 뇌물로 써서 1994년 1월 나는 좋은 직장을 얻게 됐다.

인민군 총참모부 공병국 산하 제577부대 외화획득지도원이 바로 그 자리였다. 공병국에는 제25부라는 상거래전문 부서가 있는데 상좌(중령)급이 책임자이다. 그 밑에 신의주, 강계 등 네 곳에 상거래를 벌이는 기지가 있다. 내가 배치 받은 신의주기지는 주로 중국을 상대로 농산물을 팔아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 외화는 알미늄, 아연, 납 등 군용으로 쓰이는 물건을 사들이는 데 사용됐다.

원래 이런 일은 출신성분이 나쁜 사람에게는 절대로 맡겨지지 않는 다. 그러나 경제난과 함께 외화획득에 능력이 있는 자는 출신배경과는 상관없이 채용한다는 쪽으로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내게 이런 자리가 돌아온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 매력을 느낀 것은 합법적으로 외항선을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나는 육로로 중국을 가서 다시 남조선으로 가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알고 보니 위험성이 너무나 높은 방법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93년 나는 양강도 혜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 장백현으로 가는 루트를 탐색해 보았다. 두 번에 걸쳐서 현장을 답사하고 과연 온 가족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검토해 본 것이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는 그 전부터 혼자서 중국 땅으로 들어가 형편을 살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폭이 50미터에 불과한 것을 보았을 때 당장에 건너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저것을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육로 탈출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말았다. 강을 건너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 무렵 식량사정의 악화로 배급이 끊어지고 임금이 체불되는 사태가 각지에서 벌어지는 바람에 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는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북한 당국이 몰래 파견한 공작원에 의해 북한으로 잡혀오는 사람도 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잘못하면 우리 식구도 잡혀서 수용소로 갇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국 땅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서 은신처를 마련해 주지 않는 이상 중국 땅으로 덮어놓고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해가 바뀌자 양강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일대의 식량배급이 끊어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중국 땅으로 도피했다. 북한 당국은 서둘러서 도망자 색출을 중국측에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고 중국 공안당국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탈북자를 체포해 북한으로 송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소문을 듣고 나는 다른 탈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공병국 외화획득 지도원이라는 자리를 이용하면 배로 남조선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아들의 결혼

때마침 큰아들 희근이 장가들게 됐다. 상대는 그 동안 교제해온 서정심이라는 예쁘게 생긴 아가씨였다. 그녀의 부모는 일본태생의 귀국동포였다. 우리 집 역시 일가친척이 미국에 거주하는 집안으로, 출신성분이 좋지 않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장가든다고 해서 결혼식만 올리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들이 살 집을 마련해 주고 TV·냉장고 등 세간살이를 장만해 주어야 한다. 이런 일 저런 일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어느 새 결혼식 날 이 됐다.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 한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해산이 가깝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얼마 후 나는 손자를 팔에 안게 됐다. 남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해는 며느리도 얻고 손자도 태어난 나에게는 매우 좋은 해였다. 그러나 북조선 사람들에게는 굶주림과 절망이 시작된 「악운의 해」였다. 마침내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도에서 식량배급이 끊어졌고, 여름에는 홍수까지 겹쳐서 식량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해가 바뀌어도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지상의 낙원」이라고 하는 나라에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과 걸식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게 됐다.

식량배급이 끊어지면서 사람들은 연명하기에 바빴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모두가 식량조달에 혈안이 됐다. 교사들이 쉬는 바람에 학교수업은 부실해졌다. 나중에는 보위부원, 안전부원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사회 전반의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약품부족으로 한때 자취를 감춘 전염병이 다시 나돌았고, 어린이들은 집안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됐다. 며느리는 시댁 방문 이외에는 남수를 데리고 집안에만 머물렀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손자와 며느리를 포함한 온 식구를 데리고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폭정이 기아의 원인

한국으로 온 다음에야 안 일이지만, 북조선 당국은 기아의 원인을 2년간 계속된 천재에 기인한 농작물의 괴멸적 타격에 돌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온 세계로부터 식량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게 아니라 1996년에도 황해도에서 물난리가 나 논밭이 떠내려갔고, 유실된 집도 적지 않았다. 신의주시 부근에서도 마을 세 곳이 침수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폭우는 예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피해가 가장 큰 곳으로 알려진 황해도는 사실은 한국 서울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황해도와 한국의 경기도는 인접지역이다.

따라서 한국의 서울·인천에도 같은 분량의 비가 쏟아졌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북조선에서만 큰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북조선의 통치집단이 엉터리 시책을 반복해서 농지와 농민을 황폐화 시켰기 때문이다. 치밀한 조사와 연구도 없이 마구 나무를 찍어낸 다음 산지에 밭을 만들고, 수확량을 혁명적으로 늘인다고 하면서 벼를 밀집재배한 결과 땅이 지력(地力)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농민 역시 농사짓는 법을 잊어 버렸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어떻게 수습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논에는 해충이 득실거리는 데 뿌릴 농약이 없다. 싱싱한 채소를 소비지로 보내려 해도 수송 할 트럭이 없다. 그리고 트럭이 있다고 해도 개솔린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태에서 누가 농사를 지으려 하겠는가. 큰물이 나건 안 나건 북조선에서는 농업생산 향상의 가망이 아예 없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김정일은 농업제일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그 명령에 따라 학생·노동자가 농장에 투입됐다. 그러나 그들이 제대로 농산물을 돌볼 턱이 없는 일이 아닌가.

똑같이 옥수수를 심었다고 해도 수확량이 농민이 심은 것과 똑같을 수 없다. 차라리 심지 않은 것만도 못하다. 그러니 농업제일주의를 표방해 도시주민을 농촌지원에 동원해도 결과적으로는 땅과 사람만 피곤하게 만들뿐이다. 이제는 이런 뻔한 이치를 깨달을 때도 됐건만, 방향이 자꾸 빗나가고만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97년이 되자 일부 농장에 인민군이 투입됐다.『앞으로는 군대가 농사를 지으라』하고 김정일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하면 먹을 게 없어서 도망치거나 농사짓는 것을 포기하는 농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군부대는 농장을 접수하고 관리운영을 개시했다. 그들에게는 『책임지고 재배하고 수확물을 분배하라』는 지시가 하달돼 있었다. 농장관리위원장은 부대장이 맡고, 작업반장은 중대장·소대장이 맡아서, 다시 말해 총 대신에 삽을 잡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는 아무리 날씨가 좋다고 해도 농사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보위부 연구소는 곧 수용소

인민에게 공포감을 심어 놓으면 잘 복종하리라는 게 김정일이 생각인 것 같다. 수용소의 존재가 그의 이런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신의주시 충제리에 평안북도 수용소가 위치하고 있다. 도심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 속에 있는데 보위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이 수용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외회획득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던 한 사내가 이 곳에 수용당했기 때문이다. 같은 업무에 종사 한 관계로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가 중국으로 가면서 보위부의 사전승인을 받지 않은 게 문제가 됐다고 한다.

이런 일을 보고 나는 탈출계획을 여간 신중하게 세우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은 수용소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더욱 컸다. 북조선의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양식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약품·석탄·전기도 없었다. 게다가 식수 확보조차 어려웠다. 길거리를 걷다가 보면 뼈와 가죽만 남은 어린애들이 먹을 게 없나 하고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있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또 정거장 주변이나 장마당과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거지·부랑 아·매춘부·암달러상·건달패 등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사는 인종이 눈에 띄게 됐다.

북조선의 요즘 형편에 관해서는 아내나 아이들이 이미 말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 지금 북조선은 사람이 살 곳은 아니다.

식량난·물자난은 우리집 살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큰아들은 교원이면서도 학교에 거의 출근하지 않고 양식확보에 발벗고 나서게 됐다. 둘째 아들은 교원생활에 재미를 못 느끼고 그만둘 생각만 하고 있었다. 셋째 아들은 맹장수술 때 항생물질을 투여받지 못한 관계로 몸에 이상이 생겨서 국방체육단에 복귀하지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셋째는 체격도 좋고 공부도 잘해서 고등중학교시절에 항상 반에서 1, 2등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있는 게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해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해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평양 적십자병원으로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다. 걸리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기 저기에 뇌물을 쓰면 적십자병원에서 진찰을 받게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적십자병원에 과연 훌륭한 설비가 있느냐 하는 게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그런 큰 병원에서도 약품이 부족한 관계로 환자들은 자기 약품을 제힘으로 구해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탈출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아들의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큰딸 문제도 있었다. 혼기에 처한 큰딸을 북조선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여자가 북조선에서 아이를 낳고 살림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드는 일이 아니다. 식수도 여자가 들어 날라야 한다. 양식을 구하는 것도 전적으로 여자의 책임이다.

가장 힘드는 것은 신랑감을 구하는 일이다. 북조선에서는 성분이 같고 생활형편이 비슷한 집안끼리 혼사를 맺는 게 상식이 되고 있다. 그러니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재미 집안이나 재일 집안에서 골라야 하는 것이다. 재일 집안은 80년대까지는 생활이 괜찮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일본의 친척들도 지치게 됐고 또 세대가 바뀐 관계로 원조도 크게 줄어들고 있다. 신의주에서 보면 재일 가족의 형편은 중국에 친척이 있는 가족의 형편과 비슷했다. 아마 멀지 않아서 원조도 끊어질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큰딸을 그런 집안에 시집보낼 수가 없었다.

자식을 둔 사람으로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내 자식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장래였다. 그들 역시 우리들처럼 「적성분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먹고 살기에도 힘드는 판국에 적성분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갈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이겠는가.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한 끝에 나는 탈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구체적인 행동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 김원형 ---
 
아우의 도움으로

내가 남몰래 세우고 있던 탈출계획은 중국 배를 사서 해로로 한국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선장을 구하는 일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 사람도 우리와 함께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조선에서 그런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돈을 듬뿍 준다고 하면 선장으로 나설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함께 탈출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북조선과 같은 밀고사회에서 수용소행이 될 게 틀림없는 말을 함부로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방법이 최선의 선택인 것 같아서 나는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인 선장을 고용해서 한국으로 가는 방법도 검토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에서 배를 산 다음 북조선으로 가서 가족들을 배에 싣고 한국으로 향한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우리들을 하선시키고 나서 그 길로 중국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배는 우리를 실어다준 대가로 주어버리기로 하고 말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응할 중국인이 있을 것 같았다. 이 방법에는 이런 이점도 있다. 항해 도중에 북조선 경비정에게 검문 당해도 중국 배로 위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안선국 선장

어쨌든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다. 우리와 함께 북조선을 탈출할 만한 선장 또는 항해사를 물색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사람 하나가 있었다. 이름이 안선국이라고 하는 선장인데, 내 친구의 처남이었다. 10년 가까이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깊이 사귄 일은 없었다. 거리에서 만나면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정도의 사귐이었다. 나이는 나보다도 적어서 45, 6세 정도였다.
나는 먼저 내 친구와 술자리를 함께 하고 그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그 결과로 그는 북조선 사회에서는 좋은 성분 출신이고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원이고 제대군인이며 그의 가족 중에 6·25 전쟁 때 전사한 사람도 있었다. 월남자 가족이요 지주계급 출신이며 친미분자라는 나쁜 조건 세 가지나 겹친 나와는 매우 대조적인 사람이었다. 북조선탈출과 같은 일을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을 사람같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배급이 지연되면서 아이 셋과 노모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다는 얘기를 내 친구에게서 들었다. 나는 이 점을 물고 늘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의심을 받게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길에서 우연히 만나 기회를 이용해서 그에게 접근했다.

『오랫동안 못뵈었군요. 일전에 댁의 매제를 만났습니다.』
『아 그래요. 한동안 못뵈었는데 건강하시던가요?』
『네 건강하더군요. 그런데 좀 야윈 것 같았어요. 생활이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살기가 어렵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이지요. 저희 집은 양식을 구하는데 정신이 없을 지경이랍니다.』
『당신처럼 토대가 좋은 분들은 잘 지내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93년경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하고 안선국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들 같은 사람도 살기가 힘들다니…… 정말 형편이 나빠지기만 하는군요.』
『벌이가 될 만한 게 없습니까?』
외화획득 지도원이니 그런 것을 알지 않을까 해서 안선국씨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엘 가면 누에고치 값이 싸고, 어디서 나는 약초를 어디로 가져가면 중국산 보리와 바꿀 수 있다는 등의 얘기를 조금씩 해주면서 서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지금 형편으로는 신통한 게 없어요. 누구나 장사에 나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도 별로 이문이 남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신통한 벌이가 어디 없을까요?』
안선국씨는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별의별 일을 해보았지만 신통한 게 없어요. 무어가 있을 것 같은데…… 배를 이용하면 어떨까?』
『배라고요?』
『배를 이용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배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또 선장 노릇을 할 사람도 없고…….』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안 씨는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 전에 배를 조종한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랬던가요. 그러고 보니 당신의 매제에게서 들은 것 같군요. 만약에 제가 배를 구할 수 있다면 그때 나를 도와주시겠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탈출 청사진

나는 안씨와의 첫 접촉에서는 더 이상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고 감(感)만 잡은 다음 헤어졌다. 얘기를 해볼 여지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안씨와 합의를 보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장남과 차남에게 미리 탈출계획을 밝혀 준 다음 그들의 찬동을 얻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미국에 사는 아우에게 탈출 의사를 전하고 자금 지원을 받는 일이었다. 두 아들에게 내 계획을 미리 밝히려는 것은 그들도 이제 어른이 돼 사리판단을 할 수 있고, 또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들도 이해하고 협력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자 곧 나는 두 아들을 집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내 말을 잘 들어라. 실은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단다.』
북조선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방법을 모색중이라는 것을 털어놓았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함께 떠나겠습니다.』
두 아들은 매우 긴장된 얼굴로, 그러나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죽으나 사나 함께 떠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두 아들은 나의 의논 상대가 돼 탈출계획을 추진하게 됐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나는 미국에 사는 아우에게 연락을 취했다. 장사하는 동안에 가까워진 단동의 한 조선족 남자가 중개자 역할을 맡아주었다. 그는 장사차 신의주를 자주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우리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 일이 성사되면 후하게 사례한다는 조건으로 아우에게 전화를 걸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주었다.

『알았다. 최선을 다해 돕겠다.』
하는 대답이 아우에게서 왔다. 아우는 나를 만나기 위해 3월중에 북경에 오기로 했다. 단동에는 북조선 공작원들이 눈을 밝히고 있어서 우리는 북경에서 상봉하기로 한 것이다.

그 무렵 내 머리 속에는 탈출의 청사진이 대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배를 타고 신의주를 떠나 단동으로 향한다. 단동에서 조선족 친구를 만나 함께 북경으로 향한다. 아우를 만나 돈을 건네받은 다음 단동으로 돌아와서 배를 구입한다. 그 배를 타고 북조선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태운 다음 남조선으로 향한다. 이상과 같은 게 대체적인 계획이었다.

북경에 가서 아우를 만나는 일이나 중국에서 배를 사오는 일은 외화획득 지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또 단동에서 북경으로 가는 일도 조선족 친구가 길 안내를 맡기 때문에 언어·지리로 고생할 일이 없었다.

문제는 배를 조종해 줄 인물을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중국인 선장을 고용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남조선으로 갈 북조선 사람을 구하느냐가 문제였다. 중국인이라고 하지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을 구할 것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장남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때 나는 북조선 사람을 고를 경우를 대비해서 안선국씨를 이미 점 찍어놓았다는 점도 말해주었다. 그리고 중국인을 고용할 경우 배가 중국산이기 때문에 중국 배로 위장하기 쉽다는 점과 우리 가족을 한국으로 실어다 준 다음 배의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조건이라면 쉽게 희망자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말해주었다. 장남의 대답은 명쾌했다.

『북조선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 안선국씨를 설득할 수 있다면 최고이지요. 아무리 조선족이라고 해도 외국인은 믿을 수 없어요. 만약에 한국으로 가지 않고 중국의 어떤 해안에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지요? 그 곳이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물어볼 사람도 없을 게 아닙니까?』
장남이 중국 조선족을 불신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경지대에서 탈북자사냥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강을 건너 중국으로 숨어드는 북조선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조선족자치주 공안(경찰)의 단속이 강화되고 있는데, 잡혔을 경우 뇌물을 주면 슬그머니 풀어주고 뇌물을 안 주면 북조선 보위원에게 넘겨버린다는 것이다. 뇌물 금액은 자그마치 2천달러 내지 4천달러라고 한다. 탈북자들이 한동안 숨어 지낼 수 있는 돈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탈북자사냥에 혈안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셔요?』
『글쎄, 돈으로 고용 당한 사람과 돌아가면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사람과는 신용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떻게 안선국씨를 설득할 수 없을까요?』
『시도해 보자.』
그 날 이후로 나는 안선국씨를 우리 일에 끌어들이는 데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우리 한 번 큰돈을 벌어봅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안선국씨에 접근했다.

『일전에 얘기했던 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사는 아우가 돈을 대주기로 했답니다.』
『아우님이 돈을 대준다고요.』
안선국씨는 흥미있다는듯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
하고 나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3월에 아우가 북경으로 온다는 것, 그때 배를 살 수 있는 돈을 받기로 돼 있다는 것, 돌아가는 길에 배를 산다는 것 등을 말해주었다.

『당신이 함께 가준다면 큰 도움이 되겠소. 배를 북조선으로 가져와야 하니까요. 게다가 큰 돈을 들여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사야 할 게 아니요. 당신이 배를 보아준다면 안심이 되겠소. 그런 다음에 그 배로 큰돈을 벌어 봅시다.』
『좋은 말씀이오. 하지만 중국에는 어떻게 가지요?』
『그건 염려할 것 없소. 그 쪽에도 아는 사람이 있소.』
외화획득 지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하면 안선국씨의 여권과 업무명령서를 어렵지 않게 입수할 수 있다는 것과 중국으로 건너가면 조선족 친구가 길안내를 맡기로 돼 있다는 것 등을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보겠소.』
하고 쾌히 승락하는 것이었다.

허 탕

나는 손을 써서 해군 교도대를 통해 안선국씨의 여권과 업무명령서를 교부받았다. 공병국용으로 사들일 보리 3톤 중 1톤을 바치기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3월 17일 두 사람은 선천군 석하리를 떠나는 배를 타고 21일에 중국 단동에 도착, 조선족 친구와 상면했다.
『김선생이 무사히 중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 주면 아우님은 즉시 비행기로 오기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안씨와 함께 그 조선족 친구 집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다음날 미국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형님,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내일 비행기편으로 떠나겠습니다.』
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뉴욕을 23일에 떠나면 북경에는 24일에 도착하게 된다. 23일 저녁 나와 안씨 그리고 조선족 친구는 북경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처음으로 안씨에게 북조선탈출계획을 털어놓은 것은 중국으로 들어온지 수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안씨의 북조선생활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에 중국인의 풍요로운 생활을 목격하거나 내 아우에게서 한국의 번영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한국으로 가고싶은 생각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중국에 처음 와본 안씨는 상점마다 상품이 그득히 쌓여 있고 차량이 분주하게 오고가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음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이처럼 물자가 풍부한 중국도 국제사회에서는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지요. 연변의 조선족이 서울에 가면 그 발전상을 보고 넋을 잃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우리도 서울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안씨는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처럼 안씨의 속마음을 떠보고 있는데 뜻하지 않는 일로 탈출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아우를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 나와 탈출방법을 논의할 작정으로 온 것이지, 배를 살 돈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서두른 것 같았다. 조선족 친구를 사이에 두고 말이 오고갔는데, 아우가 내 계획에 전적으로 찬동한 것처럼 내가 속단해버린 것이다. 나는 내 실수를 깨닫고 아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우는 배를 이용한 탈출계획을 여러 방법중의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육로탈출에 비중을 두면서 온 가족이 중국으로 탈출, 한동안 잠복하다가 일시체류자격을 취득한 다음 합법적으로 러시아·홍콩을 경유해서 서울로 가는 게 좋겠다고 주장했다. 조선족 친구에 따르면 일인당 천오백달러 내지 3천달러만 있으면 일시체류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한다. 항공료까지 포함하면 이만저만 큰돈이 드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일시체류자격을 틀림없이 취득한다는 보장도 없다.

육로 탈출과 배를 이용한 탈출을 비교해볼 때 후자의 위험부담률이 훨씬 적다는 점을 나는 역설했다. 오랜 논의 끝에 아우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돈을 준비해서 4월 20일경에 다시 북경으로 오기로 하고 아우는 북경을 떠났다. 나와 안씨 그리고 조선족 친구는 25일에 북경을 떠나 29일에 우리 두 사람은 신의주로 돌아왔다.

안씨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을 보고 화를 냈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큰 기대를 걸고 중국까지 왔는데 배를 살 돈이 준비되지 않고 있었으니 누구인들 화내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안씨는 희망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요. 중국 구경도 했고, 바깥 세상의 얘기도 많이 들었으니 소득이 있었던 셈이오.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답니다.』
『고발하면 당신도 무사하지 않을거요』
한달 후(4월 22일) 나와 안씨는 다시 북경으로 갔다. 아우를 만나 돈을 건네 받았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돈을 몸 속에 숨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북조선탈출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어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안씨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안씨도 잠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몇 번씩 몸을 뒤치락거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바로 그를 설득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중국에 와보니 북조선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오. 먹을 것을 찾아 이러저리 헤매는 게 지겹소. 모처럼 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됐으니 가족을 데리고 남조선으로 가지 않겠소? 당신네 가족과 내 가족을 모두 합치면 열네 명이오. 곡물 운반선이면 그 정도 인원을 태울 수 있을거요. 배는 내가 사고 당신은 조종만 하면 되오. 외화획득 지도원이라는 내 직책을 이용하면 배를 마음놓고 살 수 있소. 어쨌든,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모든 게 가능하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시오.』
나는 한동안 대답을 기다렸으나 그는 한숨만 쉴 뿐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이해하실 줄로 알았는데…….』
하고 나는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렇게 합시다 하고 대답하고 싶지만…….』
안씨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배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아닌게 아니라 안씨는 노동당원이었고, 성분이 좋아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지내던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나는 그만 화가 났다.

『당국에 고발해도 좋소. 하지만 당신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자 안씨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되오.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소. 이런 얘기는 아무한테나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만큼 나를 믿어주기 때문이라는 걸 나도 압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똑같이 믿는다는 게 내 주의이기도 하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머니가 문제요. 어머니는 올해 68세이신데 걷기도 힘들어 하시오. 그런 분을 모시고 간다면 당신들에게 짐이 될 것 같아서…….』
『잘 알겠소. 짐이 되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젖먹이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할머니건 젖먹이건 모두 데리고 갑시다. 육로와는 달리 일단 배에 올라타면 모두 누워 있으면 되지 않소.』
『그렇기는 하지요. 어쨌든 염려해 주어서 고맙소.』
안씨의 말소리는 약간 들뜨고 있었다.

아우와 함께 이틀을 지낸 다음, 우리는 24일에 북경을 떠나 25일에 단동에 도착했다. 단동에서 1주일간 묵으면서 35톤급 배 한 척을 샀다. 그리고 그 배를 타고 신의주의 해군부두에 도착한 것은 5월 3일이었다. 얼마 후 안씨에게서 그의 어머니도 남조선행에 동의했으니 함께 떠나자는 기별이 왔다. 5월 10일 밤 우리 가족 8명과 안씨 가족 6명이 철산 어업기지에 정박하고 있는 배에 승선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폭풍우를 만나 배가 깨지고 침몰 직전에 있던 우리 일행은 한국 해군 함정에 의해 구출됐다. (끝)

--- 김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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