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생으로 본 북한 해외건설 노동자들의 실체
작성년도 :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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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생으로 본 북한의 해외건설 노동자들의 실체” <이한국>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서이다. 1년 6개월 정도의 한국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어 이야기를 해 보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북한의 실상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북한의 실상을 다 전하지는 못해도, 내가 체험한 북한의 해외 건설 노동자들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내가 대외건설(해외건설노동)을 꿈꾸게 된 것은 1998년 경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때였다. 당시 나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였고, 또 열심히 하면 내 능력으로 먹고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서의 나의 형편은 그러하지 못했다. 북한에서 직업의 선택권은 없고, 국가에서 배치해 주는 곳이 자기의 직업이다.
돈과 권력이 없으면 아무리 대학을 졸업하였다 하더라도 국가에서 지정해 주는 어렵고 힘든 배치지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나의 경우도 이것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에게 차려진 직업은 노가다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나의 생활은 궁핍해져만 갔고, 앞날의 희망이 점점 묘연해지는 상태였다.
그때 나의 주변 형님들이 외국에 가서 일하여 번 돈을 가지고 소위 ‘유족’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고 대외건설 노동을 희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통로를 통해 대외건설 노동자로 파견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여러 지인을 만나 대외건설 노동자로 파견될 수 있는 오디션에 응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매번 오디션에서 낙선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대학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힘들게 대학 공부를 한 것을 많이 후회하였다. 북한에서 대외건설 노동자 파견에는 넘지 못할 장벽이 너무 많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특수기관(호위부 경력, 정찰총국 경력) 경력
② 당간부 가족
③ 군관, 제대군인
④ 대학 졸업자
⑤ 평양시 미거주자
⑥ 이혼자
⑦ 미혼자
⑧ 보위부 경력자
그런데, 나는 대학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대외건설 노동자 파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틈이 있는 법이다. 대외건설 노동자 파견과 선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은 당 간부와 보위원이다.
정부에서 규정한 파견 대상 선정 사항은 파견 노동자 속에서 탈북할 경향성이 가장 높고, 또 탈북하는 경우 북한이 입게 되는 대외적 이미지를 최대한 줄이려는 점에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당 간부들과 보위원들도 뇌물을 받아먹어야 살 수 있기에 가능한 한 눈감아주고 뇌물을 받아먹는다.
그러나 원칙이 있다. 아무리 많은 뇌물을 준다 해도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받아먹지 않는다. 자기가 뇌물을 받아먹고 눈감아주어서 대외건설 노동자로 파견된 사람이 탈북할 경우, 그 모든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차려지므로, 절대로 모험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친인척이나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만 뇌물을 받아먹고, 해외파견을 허락하여 준다.
당간부 등과 보위원들은 위의 사항에서 문제 있는 사람들을 건별로 요해하여 해당한 뇌물을 받아먹고, 경력 위조에 협조하면서 대외 파견을 허락하여 준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런 당 간부나 보위원과의 인맥도 거의 다 없고, 가져다 바칠 해당한 양의 뇌물도 없었다.
나는 대외건설 노동을 포기하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인정하고 뜻대로 살게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북한 사회에서는 불평, 불만은 곧 반역죄로 여겨지니, 그대로 순응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하면서 근근이 살아갔다.
그렇게 20여 년 살아가던 중 또 한 명의 귀인이 나에게 대외건설 노동자 파견을 권고하면서 당 간부가 자기의 오빠이니 소개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거기에 희망을 걸고 그 사람을 소개받고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서 뇌물로 바치면서 도와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이 당 간부는 뇌물을 받아먹는 데만 신경을 썼고,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또 포기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있던 중, 2018년에 또 한 명의 귀인이 나타나 다른 당 간부를 소개해주었다. 그 당간부는 돈도 받아먹을 줄 알고, 사람을 도와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는 과정에서 특수기관(호위국) 경력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생에 특수기관 경력도 가지게 되었으니, 대외건설 노동자 파견 심사에서 크게 2가지가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당간부는 뇌물도 적당히 받아먹고, 그 걸림돌들을 자기가 처리해 주면서 나의 대외건설 파견을 현실로 이루어주었다.
이때 내 나이가 50세인데 20대 말부터 꿈꾸어 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을 50세가 되어서 이루게 되었다는 현실에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게만 생각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는 드디어 2019년 3월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건설 노동자로 파견되었다. 해외건설 노동자를 희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은 공통점이 있다. 즉 자기 가족이 살 집을 마련할 돈을 버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70%가 그러하다. 그 외 30% 정도는 그럭저럭 자기 가족이 살 집은 있지만, 먹고 살아갈 돈이 없어서 가정을 위하여 돈을 벌려는 소망을 가지고 이 길에 들어선다. 나의 경우가 바로 후자의 경우이다.
북한에서 자기 가족이 사는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이 들고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하여 단칸 또는 2칸짜리 집에서 부모 또는 형제와 동거 생활을 하다 보니 사는 과정에서 자그마한 문제를 가지고도 서로 싸우고, 또 한 집에서 부모 자식 간에 밥을 따로 해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가족만의 자그마한 집 한 칸을 마련하려고 모질음을 쓰다가 해외건설 노동자로 3년 정도 일하여 돈을 벌어 집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해외건설 노동자 생활이 그 꿈을 이루어 줄지는 아무도 모르고, 해외로 떠나간다. 당시 나의 심정은 대외건설 노동기간 열심히 하여 돈을 많이 벌어 가정과 자식들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려는 오직 하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외건설 노동 현장은 나의 모든 꿈을 깡그리 뒤집어 버렸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려 숙소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현대판 노예생활이 시작되었다.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지도 못하고, 숙소 주변 정리 청소를 시키는 데 밤 10시가 넘도록 한 기억이 있다. 그다음 날부터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 11시, 심지어는 12시까지 매일 고된 일을 시키는데 정말 힘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일을 하였다.
러시아 건설 현장의 생활은 노예생활 그 자체였다.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12시까지, 어떤 때는 새벽 2시~3시까지 일할 때도 있다. 1년 내내 휴식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1월 1일~1월 2일, 이틀만이 정해진 휴식일이다.
하루 일을 끝내고 샤워․목욕도 못하는데, 1년 내내 샤워․목욕을 못한다. 수건을 물에 적신 뒤 짜서 몸에 비비는 것이 목욕이다.
숙소는 컨테이너에 노동자 6~8명이 사는데 여름엔 덥고 겨울은 춥고 빈대가 너무 많아 온몸을 뜯기며 산다. 월급 한 번 받지 못해도 의견을 누릴 수 없다.
먹는 것은 쌀밥에 남새국, 남새 요리, 돼지가죽 요리. 그것도 하루에 1끼뿐이다.
일하러 가는 것도 줄 서서 가고, 퇴근 때도 줄 서서 퇴근하고, 일하는 도중 화장실 가는 것도 승인을 받아야 하고, 담배 피우는 것도 승인을 받아야 하고, 일하는 도중 휴식도 거의 없다. 노동화, 노동복도 자체 구입이다.
시장에서 구입하여 신고 입기가 너무 부담스럽고, 또 돈도 없다. 그래서 건설현장 쓰레기장에서 남이 버린 신발, 옷을 주어다가 빨아서 입는다.
이것이 대외건설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이다. 이것이 현대판 노예 생활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형편에서 내가 모스크바에서 2~3개월 일을 하던 중 우리 회사 사장이란 놈이 나타나 월급 계산서에 사인을 하라고 하였다.
사인지를 보니, 내가 2~3개월 열심히 일한 현재의 시점에서 회사에 진 빚이 러시아 돈으로 12만 여 루블이라는 것이었다. 이 돈을 벌자면 당시의 계산으로 6개월을 일한 돈을 모두 바쳐야 0이 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여 이 빚도 갚고, 내 돈도 벌자는 하나의 생각으로 열심히 일하였다. 그런데 이 빚은 일을 하면 할수록 줄어드는 게 아니라 1년 내내 일을 하여도 더 늘어만 가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 관리자에게 따져 보기도 하였지만, 칼자루는 회사 측에 있기에 매번 묵살당하고 일만 하였다.
이렇게 3년을 일하였건만, 월급 한 번 받지 못하고,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내가 회사에 진 빚이 러시아 돈으로 50여 만 루블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억이 막히고 원통하였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싸울 수도 없는 우리들의 처지였다.
회사 측의 말대로 하면, 러시아 측으로부터 우리가 일한 돈을 받지 못하였고, 국가 납부금을 수행해야 했기에 다른 데서 돈을 돌려써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노동자들이 일해 번 돈은 어디로 가는가?
크게 세 경로로 분할되어 간다.
첫째는 국가납부금이라는 명목으로 중앙당에 상납된다.
규정된 국가납부금은 건설 노동자 1명이 한 달에 100유로이다. 그러나 회사 사장들은 사장 자리를 유지하려고 뇌물 명목으로 더 바치는데 200유로 정도 바친다.
바치는 돈의 양에 따라 당에 대한 충성심이 평가되고, 또 회사 사장 자리를 오래 견지할 수 있다.
둘째는 본회사에 바치는 상납금이다. 회사 사장들은 대체로 본회사에 일정한 양의 돈을 바치고 사장 자리를 산다. 대체로 30만~50만 달러를 회사에 바쳐야 건설회사 사장 자리를 산다.
그리고 매달 건설 노동자 인원수에 해당하는 납부금을 바쳐야 한다. 그 납부금이 노동자 1명당 200~300달러이다. 이 납부금을 제때에 바치지 못하면 사장 자리를 잘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 사장들은 국가납부금과 본회사 납부금을 어떻게 해서든지 바치려고 노력한다.
셋째는 회사 사장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평균 해외건설 노동자가 1달에 버는 돈은 700~1000달러이다.
회사 사장들은 노동자가 버는 돈에서 국가납부금과 본회사 납부금을 묶고, 나머지 돈에서 가능한 한 노동자들에게 월급도 주지 않고,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고 한다. 그래야 자기가 회사 사장 자리를 사면서 쓴 돈과 각종 모든 비용을 보상하고, 자기 주머니도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 대방 측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였다느니 건설 시공에서 하자가 나서 돈을 받지 못하였다느니 하면서 노동자들의 돈을 뭉텅뭉텅 떼어먹는다. 그러니 실제로 일하는 해외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올 돈이 없는 것이다.
또 회사 사장들은 해외에 나올 때 ‘회계원’ 등의 명목으로 여사원들도 데리고 나와서 숙소집을 세내어서 세상 낙을 누리며 돈을 물 쓰듯 소비하는 경향이 많다. 북한에서 누리지 못하는 낙을 해외에서 통제하는 사람이 없는 데서 실컷 누려보자는 것이다.
해외에서 노동자들은 일을 하는 과정에 보위원 몰래 휴대전화를 사서 유튜브를 보는 경우가 많다. 주로 한국 유튜브를 본다. 이 과정에서 내가 살고 있는, 내가 조국이라고 믿고 있는 북한은 실제 어떤 나라이고,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동경하게 되고, 가고 싶지만 북에 두고 온 처, 자식들이 눈에 밟혀 탈북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나 하나 잘 살자고, 처, 자식을 버리는 인간쓰레기가 되는 것 같아 결심도 못하고, 묵묵히 노예생활을 감수하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 현재의 북한 대외건설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심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 더럽고 험악한 소굴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고, 결단코 탈북하였다. 이것이 내가 거의 한 생을 대외건설 노동자를 꿈꾸고 노력하여 이루었던 해외건설 노동자의 비참한 삶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충실하고 성실하기를 바란다. 국가의 탈을 쓴 양아치의 소굴 북한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이 대한민국이 너무나도 고맙고, 소중하고 감사할 뿐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북한의 현실을 바로 이해하고, 불쌍한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고, 북한 정권을 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년 12월 15일-
이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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