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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남한에서 맞은 새봄 - 미소천사

작성년도 : 2008년 62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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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맞은 새봄

- 미소천사

 

 

하루만 지나면 벌써 4월이다.

우리 집에도 봄이 왔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오랜만에 집에서 대청소도 하고 간만에 휴식을 취해본다.

 

내 집에는 '베란다' 라는 자그마한 실내 미니정원이 있다.

그닥 이쁘지 않아도 공기 정화식물이라고 특별히 신경을 쓰는 키 높은 고무나무로부터 그 앞에 주런히 에스메랄다, 튤립, 돈키호테, 데이지, 러빈, 루포, 마레니나 등 작고 여린 이쁜 꽃화분들이 줄지어 있고 그 뒤론 산세베리아, 산호수-마불툭, 인삼 파라분제, 동양화초인 금화산 등 금방 물을 주고 잎을 씻어 놓아 더 투명하고 푸른 기운을 풍기는 화분들이 중층을 이루고 그 옆엔 3월이 생일이여서 며칠 전 친구가 생일선물로 가져온 핑크색 호접난이 허리에 금빛 리본을 두르고 우아하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어여뿐듯 수집은듯 희고 작은 예쁜 꽃잎이 다문다문 초롱초롱한 백색덴파래와 길쭉길쭉한 잎새들을 섹시하게 늘어뜨린 베이지색의 매혹적인 후레지아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동양란, 서양란 다 있으면 좋겠지만 작은 베란다에 꽃화분이 많다고 이것저것 들어봐야 실지 몇 개 안된다. 하지만 난 이렇게 작은 공간이나마 바라보는 것이 너무 좋다.

 

그리고 지나간 추억을 살리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얼마나 그리고 그리던 자유이고 바라던 공간 이였을까.

남한에 와서 처음 맞는 봄이고 보니 더 감회가 새롭고 행복하다.

하지만 아직 많은 이들이 삶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힘들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서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불쑥 미안해지기도 한다.

 

베란다 구석에 놓인 헝클어진 푸른잎새들이 더 매력적인 바람 부는 들가에 홀로 선 외로운 여인같은 모습인 자바를 보고 있느라니 문득 아름다운 친구의 못 잊을 얼굴이 떠오른다.

 

나에게는 아름다운 한 친구가 있었다.

그의 남편의 말을 빌어서 표현한다면 "그의 눈은 호수 같고 금방 그 맑은 물에 풍덩 빠지고 싶을 만큼 부드러움을 머금고 있다.

그 눈은 너무나 많은 얘기를 하고 있어서 바라보고 있느라면 난 언제나 어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고 있는 어린 소년같이 언제까지라도 꼼짝 않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이 있었다."

 

'금새라도 풍덩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호수 같은 맑은 눈동자와 상큼하고 오똑한 콧마루, 특별히 매력적인 도툼한 입술, 그리고 희디흰 맑은 피부' 라고 표현한다면 어느 소설책에서 많이 보아온 인상이여서 지어냈거나 따온 이미지라고 생각할지 할지 몰라도 적어도 그는 그랬다.

 

단정하지만 약간 부푼 듯 한 연한 머리색갈, 평범하게 수집은 듯 얼굴에 띄운 평온한 미소는 대하는 사람을 안정시켜 주는 태평스런 데가 있었고 이쁜 생김새하고는 조금 의외인듯도 하였던 그녀의 유머와 사랑스런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매우 즐겁게 해주군 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에게서 제일 이쁜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그는 참 마음이 따뜻한 여인이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이 많아 당신이 먹지 못해도 주어야했고 누구 집에 문제가 생기면 솔선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그를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민군대 여성소대장 출신으로 입당하고 소위견장을 달고 귀가한 그에게 어느 날 사랑이 찾아왔다.

 

미술가이며 기타수인 그 청년은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되였었고 그녀보다 3살이나 연하였지만 그들은 금방 꿈과 같은 무지갯빛 사랑의 무아지경에 빠져 들었고 신이 주신 축복의 아기를 가지게 되였다.

부모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혼하였다.

 

특별히 남편의 부모들은 전쟁 노병이고 김일성 수하에서 오랫동안 역사수록을 해온 작가이고 이름 있는 집안 이였던 까닭에 형누나 모두 제끼고 먼저 결혼해야 하는 호로자식같은 그의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패가망신시킨다고 하면서 청진시 어느 구석에 옥탑방을 얻어 쫓아내다시피 살림을 차려주었다.

 

서너 평 될까말까한 단칸방에 조그만 녹이 쓴 솥 두개가 달랑 있는 부뚜막은 나무도 몇 가치 못 들어가게 작아서 연기가 밖으로 미여지게 터져 나와 숨 막히고 콧물눈물 다 나온다.

 

결혼식이라 친구들이 모여 국수는 먹어야 한다고 하여 제일 가까운 친구라고 내가 가마 뚜껑운전을 맡았다.

하지만 나도 워낙 공주로 컷고 그때 아직 시집 안간 처녀다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국수발이 물렀는지 설었는지 팅팅 붓고 툭툭 끊어지는 국수사리를 재간스레 말아서 몇 그릇 놓고 친구들이 쭉 둘러 모여 앉았던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그때는 그것이 뭐가 그리도 재밌었는지 한마디씩 던지는 우스갯소리에 박장대소 하고 웃어댔다.

찌들게 없는 속에서도 신부는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행복한 신혼생활은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봄이 오고 있었다.

미술가였던 남편은 그 옥탑 방을 늘여 아름다운 자기들의 세계를 이쁘게 꾸리고 마당에는 미니정원을 꾸렸다.

키낮은 젓가락 같은 싸리나무를 가뜬히 잘라 울타리를 두르고 가장자리에 한 뽐 되게 흰색 칠을 하였다.

 

돌을 골라내서 축축하고 부드러워진 흙을 갈아서 고랑을 째고 파, 마늘, 시금치, 부루(상추), 쑥갓, 홍삼(당근) 을 아기자기하게 키 맞춰 심고 울타리 따라서 돌아간 도랑을 손질하고 낮게 돌담을 둘렀더니 벌써 파릇이 미나리가 맑은 물에 하느적 하느적...

 

어느 덧 이쁜 공주가 태어났고 그들은 더욱 생활을 사랑하였다.

공주가 크면서 남청진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고 집을 찾는 사람들을 스리랑카 아동궁전에 인도하는 듯 잠간씩 꿈에 세계에 도취하게 그들만의 분위기로 이쁘게 집을 꾸렸다.

 

두 사람이 언제 한번 떨어져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남한에서는 그런 부부를 닭살부부라고 하는데 문명하지 못한 그 세월에 언제나 세련된 옷차림에 아기를 안고 여유 있는 미소를 띤 그들의 모습은 뭇사람의 시선을 끌었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어르신들의 입에서는 "일제시기도 이렇게 곤란하지 않았는데.." 하는 한숨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하였다.

고난의 행군은 이 사랑스런 부부에게도 지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김정일의 모친 김정숙 대형그림이나 김정일 만수무강탑 등을 비롯해서 국가기관의 그림을 그리고 그나마 배급표를 가져왔지만 배급을 타려면 천사 같은 안해가 하루 종일 배급소에 지켜 서서 몸싸움을 하고도 쌀이 떨어졌다고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수 없이 많아 배급을 타본지가 오래되었다.

 

애써 체모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옷은 반반히 입고 다녔지만 배급을 안 주니 직장에 나가도 소용없었으므로 그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식량과 돈을 마련하여야 하였다.

 

어린 남편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무지 애를 썼다.

칠보산이나 금강산 등을 유람하며 그림을 그려서 가명으로 중국 장사군 들에게 팔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선원구락부 등 국가기관이나 잘사는 귀국자들 집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인테리어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안해가 붙잡고 남편이 대패를 밀고 하여 그녀의 손이 다 부르텄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밀고 깎고 책장, 서랍장, 농을 비롯한 가구를 만들어 시장에 팔았다.

그녀는 청진항으로 들어오는 중고 옷가지들을 박스채로 인수하여 집에서 새롭게 디자인하고 다림질하여 시중에 넘기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허나 그 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은 완전한 의미에서 긍정적일 수 없었고 부정행위가 없는 돈벌이는 생각할 수 없었다.

돈을 좀 모아서 장사를 시작한 뒤 국가기관을 빌려서 외화벌이를 시작하였고 중국국경을 넘나들면서 중국대방들과 만남이 잦아지던 남편은 어느 날부터인지 보위부 출입이 잦아졌다.

돈 문제로 보위부에서 오라 가라 하니 시달리는 게 좀 만 시끄럽고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지 남편에게선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중국 사람들이 사가면서 맛을 보던 얼음인지 하는 것을 자꾸 한 번씩 빨아보라고 준 것이 화근이 되여 차차 익숙해지기 시작하였고 귀찮은 일이 생기면 세월을 좀 잊고 싶다고 조금씩 사서 피우다가 그것 없이 못살게 된지도 3년이 되였다 한다.

 

....

 

내가 중국에서 잡혀 북송 되여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우연한 기회에 그 녀를 만나게 되였다.

몸이 절반도 안 되는 폐인이 된 나를 붙잡고 내가 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 중에 누가 사망이라도 한듯 깊이깊이 흐느끼며 그녀는 슬프게 울었다.

 

남청진 큰 집은 어디에 가고 조그마한 단칸방에 세련된 소파와 이국적인 전화기, 보기 드문 일본제 가구들은 북한에서 괜찮은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늙지 않게 동안으로 타고난 그 남편에게선 어디선가 고리타분하고 따분함이 느껴졌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듯 한 친구와 그 집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이제 돈도 가정도 건강도 다 잃고 희망마저 없는 이 여자()보다 더 막막하고 답답한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는 농 아랫단을 뒤져 무엇인가 풀어 헤치고 100달러짜리 두 장을 쥐어 주었다.

웬일인지 안쓰러워 보이는 친구에게서 이런 돈을 받는 것이 미안스러워 나는 괜찮다고 몸이 많이 안좋은거 같은데 병원에 가보고 치료도 받아야 할 것이 아닌 가고 했더니 아무런 희망도 이제 없다고 애꿎은 술병만 기울이던 내 친구...

 

그렇게 이쁘던 눈동자는 공허해지고 산발한 머리칼은 흰가슴위에 흩어졌다.

내가 정신 차리라고 술은 왜 자꾸 마시냐고 했더니 "어떻게 맨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 너는 그래도 눈물 없는 세상에서 잘사는가. 했더니 이렇게 붙잡혀 뼈다귀만 남아 내 앞에 온 걸보니 나는 넘 넘 슬프다..." 고 목이 메여 더 말을 잊지 못하던 그 녀...

 

1998년 내가 중국으로 떠날 때도 길가의 가로수 밑에서 당신에게 이것밖에 없다며 그때 북한돈 200원을 손에 쥐어 주던 그녀가 지금 또다시 200달러를 손에 쥐어 주고 "다시 가지말라하면 말을 듣겠느냐. 넌 이미 이 나라에서 마음이 떠난 사람이니 나처럼 살지 말라" 고 울면서 갈 길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그때 난 그의 남편이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줄 알지 못하였다.

나의 한국행이 성공한지 몇 달이 지나서 중국에서 나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의 외동딸이 탈북한 것이다.

그 친구의 딸은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애였다.

중국에서 그애는 나에게 부모가 큰 엄마()한데 가라고 해서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보름동안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이 숨이 막혀왔다.

수년을 중국 땅에서 고생이란 고생 다하고 북송 되여 처절한 고통을 당한 나로서는 20살 꽃나이인 그애를 살벌한 중국 땅, 그것도 연길에 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였다.

 

돈으로 브로커를 사서 보름 만에 한국에 입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애는 하나원을 나와서 홀로 단독 주택을 받고 잘 살게 되였다.

그 애에게서 그애 엄마 아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빠는 마약중독자가 되어서 병원으로 감옥소로, 집도 팔고 가전제품도 다 팔아서 약을 사고, 길거리에 쓰러지고 그러다가 이젠 살 가망이 없고 엄마는 알콜중독으로 위청공되여서 수술을 받고...

 

"더는 북한이라는 나라와 부모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었어요.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엄청난 일을 저질렀어요. 부모를 저버린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것이 그 애가 나를 찾아온 이유였다.

 

아빠는 더 살 것 같지 못하였으니 하는 수 없지만 엄마라도 살려야겠다며 나라에서 살림하라고 준 돈 300만원을 몽땅 북한에 연락하고 있는 아줌마에게 보냈다.

그 북한 아줌마에게서 따로 듣자니 내 친구가 수술을 받은 뒤 몸이 많이 쇠약해진데다 남편이 사망하고 어린 딸애마저 잃어버리고 정신이 나가서 새카만 모래 바람 부는 청진 장마당을 맨발로 가로 꿰지르며 "소연아!! 소연아!!" 하고 통곡하며 넋 없이 헤맨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소연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소연이는 내가 대충 살림살이를 장만해주었고 조금 안정되어서 살고 있다.

베란다 유리창에 부서지는 찬란한 햇빛에 몸을 맡기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졸고 있는 듯 한 담담한 모습의 저 폴러샤스 화초처럼 순수하고 행복하고 정스럽기만 하던 그애 어머니...

 

하지만 이제 내 친구는 그런 당신의 모습으로 살지 못한다.

가을바람 부는 들가에 홀로 선 외로운 국화인양 갈기갈기 밟히우고 찢기운 한 버림받은 여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아름다운 천사 같던 친구가 어찌하여 오늘 날 그렇듯 처절한 모습으로 되여 버렸을까?

그토록 생활을 사랑했고 고난의 행군의 모진 폭풍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가정을 지키려고 모지름을 썼고 열심히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없다.

 

북한은 범죄를 낳는 현장!

이런 사회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루 빨리 북한에도 새봄을 오기를 바란다.

 

한국생활의 아름다운 봄날에.

 

2008331일 미소천사

 

 

2008-04-01 00:44:2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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