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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아버지에 대한 추억 - 푸른바다

작성년도 : 2006년 586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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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

- 푸른바다

 

 

1.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작가이시다.

언제나 서재에 앉아 밤을 새워가며 글을 쓰시던 정열적인 분이시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귓가에 내려앉았던 새하얀 흰서리였다.

그때는 무심코 보아왔던 아버지의 그 흰 머리카락이 지금은 이 불효한 아들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처럼 여겨져 가슴이 미여져오곤 한다.

늘 독하게 살아오셨던 아버지!

자식들의 앞길에 그늘이 질까봐 남보다 10, 20배 더 노력하시며 사셨던 훌륭한 아버지셨다.

지금도 꺼칠한 수염을 연한 내 볼에 비비면서 아프다고 자지러지던 내 모습을 보시며 행복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의 어느 깊은 산골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 넘고 넘어도 끝이 안 보이는 골짜기에서 아버지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시작되었고 생사를 건 인생의 길이 이어져갔다.

원래 우리 가문의 조상들은 경상도 지방의 양반 출신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때 어떤 죄를 범해 그 산골로 추방을 간 것이라 들었었다.

거기에 해방직후 밭 아닌 화전 밭 5정보를 가졌었다는 그 이유로 지주로 몰려 모든 땅을 몰수당하고 정치적인 탄압의 가문으로 전락되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정당시 가장 알아주던 음악학원을 고학으로 졸업하셨고 6.25내란당시에도 군악대에서, 편안하고 안전한곳에서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실 수 있었다.

가난했던 화전농으로부터 일약 지주로의 변화와 그로인한 정치적 후과는 치명적이어서 할아버지의 그 금쪽같던 재능도 빛을 볼 수가 없었으며 소학교 음악교사의 자리마저 지켜내실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일생동안 그 훌륭했던 음악적 재능도 피워보지 못하시고 벌목부로 생을 마치셨다.

그러한 가정적배경과 우물 같은 산골마을의 생활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감옥이었고 반항아적 기질을 다분히 가지게 만든 결과로 되었다.

아버지는 그 산골마을에서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문제아로 자라나셨다.

지금도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참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 속 꽤나 태웠겠다.” 하고 피식 웃던 그때가 기억난다.

비뚤어진 학생모에 앞자락을 헤쳐 놓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속의 아버지의 모습은 그 어딜 봐도 문제아였고 반항아였다.

너무도 애들을 패주고 친구들을 몰고 다니며 거친 행동을 하여 아버지는 군대에도 나가실 수가 없으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버지의 행동으로 자기비판을 수백 번도 넘게 하셨다고한다.

하긴 그 후에 아버지가 군대에 가게 되셨을 때 5명의 고모와 삼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하니 과히 아버지의 생활이 어떠하였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버지가 21살에 로동당원이 되여 고향에 편지를 썼을 때 그 말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하기야 가족도 못 믿을 그런 상상 못할 일이니 딴사람들이야 더 말해무엇하랴.

그편지가 사실임을 아시고 며칠 밤 베게 밑에 두고 보고 또 보셨다는 할머니!

그토록 반항적인 삶을 사셨던 아버지의 인생관이 과연 어떻게 바뀌셨을까?

아버지는 자신을 외면했던 사회에 대한 반항을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생활과 능력으로 표현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가정환경이 좋다고 편안히 거침없이 잘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반항은 무서운 노력으로 표출되었고 그로인하여 지금과 같은 사회적 지위와 무시할 수 없는 재능을 가지신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그 무서운 노력과 열정이 너무도 암담했던 자신의 처지와 무지막지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반항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아버지는 그리 강한 분이 못되셨다.

너무도 감성적이셨고 남을 괴롭힐 줄 모르는 착하고 마음이 이뿐 분이였다.

술을 너무도 좋아하셔서 취하시면 꼭 부르곤 하시던 동요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강한 듯 하시면서 감성적이셨고 남자인 듯 보이시다가도 여성스러움이 다분하셨던 아버지!

그러나 아내와 자식, 가정을 많이 사랑하셨던 아버지!

늘 한가정의 가장으로써 목숨 건 사투로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 지금도 북한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계신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2.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다.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니밖에 딴 여인을 가까이한 적이 없으셨으며 늘 네 엄마가 최고고 네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가 제일 맛있다며 사셨다.

그러나 두 분도 이따금씩 싸울 때가 있었으니 그 힘든 인생살이에 어찌 다툼도 없이 살수가 있으랴.

그런데 내가 어릴 적, 제일 이상하게 생각한 어머니의 행동이 있었다.

아버지가 농담으로 내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 네 엄마하고 살지 지금이라면 안 산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시면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늘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곤 하셨다.

그 이상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나이가 들고 나의 앞날을 생각하며 고민하던 사춘기 때에야 비로써 이해할 수가 있었다.

사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한 것은 두 분에게 있어서 거의 자살행위였다.

지주 아닌 지주의 자손이셨던 아버지와 종파 아닌 종파의 딸이었던 어머니!

두 분의 결합은 결국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그런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어떻게 없애버릴 것인가를 궁리하고 주시하는 가정들이였는데 그 사회의 최악의 환경을 가진 두 분의 결혼은 사실 무모했었다.

돈에 의하여 사랑도 판가름이 난다는 자본주의라지만 가정의 출신 배경 때문에 생사의 판가름 길에서 앞날을 결정해야하는 이런 나라, 이런 땅이 과연 또 어디 있었을까?

나의 어머니는 당시 북한최고의 예술단에서 명성 있는 피아니스트이셨고 엘리트 출신의 대표적인 자식이었다.

당시 북한정부에서 고위인물이셨던 할아버지가 종파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신후 그처럼 당당하고 세도 높던 가문은 풍비박산이 되여 어머니의 인생도 망쳐버리고 말았다.

사춘기 때 할아버지의 그런 슬픈 일만 없었어도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걸 하는 철없는 상상을 해보던 나였었다.

그때 예술단에서 김정일이 직접 관람하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불행이도 어머니는 그 명단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결코 실력이나 외모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그 같지도 않은 가정환경의 원인이었다.

그토록 노력하고 자신의 처지를 바꿔보려고 노력하셨던 어머니셨건만 하늘은 어머니를 외면하였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때 불현듯 나타난 것이 아버지셨고 두 분은 결국 북한사회의 법칙상 허용되지 않는 위험한 삶을 이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 분은 후회하지 않으셨고 자식들이 생긴 이후에도 언제나 가정의 평화와 앞날을 위해 악을 품고 사셨다.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은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게 한 큰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자신의 편안한 인생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관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나는 아버지의 사랑관을 나의 사랑관으로 삼고 살고 있다.

 

3 아버지와 나

 

아버지는 어릴 적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셨다.

늘 자전거 뒤에 태우고 유치원에 데려다 주셨고 퇴근시간이면 꼭 유치원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먼 곳에서 오곤 하셨다.

자전거 뒤에서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드리면 무척이나 좋아하고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그 젊으셨던 모습이 너무도 아련하다.

그 후 성장하면서도 나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고 늘 아버지의 기대에 걸맞게 착하고 열심히 살았었다.

그러나 반항적 기질은 유전인 듯, 내 인생길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고 세계관의 형성이 급속히 이루어지던 사춘기 때부터 나는 나의 앞길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토록 험하고 위험한 인생길을 가진 사람도 흔치가 않았던 것이다.

삼촌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생사도 모르고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마어마한 가정배경은 충분히 나의 인생을 휘젓기에 충분했었다.

이런 불투명한 내 인생, 내 앞날에 나는 겁이 났고 성격에 없던 반항적 기질을 만들어놓았다.

4학년(한국의 고1) 때부터 나는 모든 걸 거의 포기했었다.

학업이나 예능, 심지어는 아버지의 말씀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아버지의 어릴 적 모습을 베껴놓은 듯 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4학년부터 나는 책가방이라는 것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당시에 만능 노트라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참으로 간편하고 엽기적이었다.

사실 이름만 어마어마할 뿐 한권의 노트에 불과했는데 그 공책한권을 교복뒤주머니에 끼어 넣고 윗주머니엔 볼펜하나를 넣고 달랑 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수학시간에는 거기에 수학을 적고 영어시간에는 영어를 적고 즉 그 무지 많았던 모든 과목을 그 책 한 권으로 해결하는 기발한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선생님에게 매도 엄청 맞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나의 모습에 아버지는 분개하셨고 그 후 내가 대학시험에서 끝내 떨어졌을 때에는 거의 폭발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아무리 돈이 대학가를 지배하고 돈의 유무로 평가되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실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버지의 소박하고 고지식한 생각이셨다.(물론 내시험성적은 참혹했다)

또 아버지의 인생은 엄청난 자기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이루어지고 또 그로인하여 지켜온 가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첨예화 되였다.

자식과 부모사이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상당히 적절치 못하고 스스로 성숙치 못한 인간됨을 증명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 말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아낼 수가 없다.

그 후 아버지는 내가 군대에 나가 새 삶을 살 것을 바라셨고 권고도 하셨다.

그러나 당시 나는 10년 동안 청춘을 허비한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도 군에 갈 마음이 없었으며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었었다.

그로인한 아버지와 나와의 갈등 역시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20살이 된 후로부터 아버지는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그토록 사랑했고 귀해 했던 아들의 배신이라면 배신인 행동과 철없어 보이는 행동에 아버지는 너무도 격분하셨고 나 역시 나의 생각대로 살고 싶은 욕구와 구세대적인 아버지의 강요가 너무도 싫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모든 행동과 권고가 모두 나를 위해서 나를 사랑해서 하셨던 것임을 나는 추호도 의심치 않으며 그토록 불효했던 그때의 나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고도 싶다.

지금도 소학교시절 외웠던 옛 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나 너무도 죄스럽고 불효한 나의 맘을 표현할 수가 없다.

철이 들어 부모님께 효도하려 했더니 이미 부모님은 안계시더라

내가 더는 그곳에서 살수 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을 때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이세상이 아버지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토록 열심히 그토록 고생하며 사신 아버지에게 이세상이 과연 무엇을 해주었는데요?

그 사회주의라는 듣기 좋은 이름아래 얼마나 많은 아픔과 얼마나 참기 어려운 굴욕을 주었습니까.

이제는 저마저 여기서 살수가 없는데 이 땅이 무엇이 좋은 것이 있습니까?

차라리 우리가족 모두가 떠납시다.”

나의 통곡 같은 이 말을 들으며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다.

한참을 하늘가를 바라보시며 한숨을 쉬시던 아버지!

그 순간 참혹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에 와서 읽노라면 너무도 뼈아픈 고통에 가슴이 저리다.

그러나 아버지의 행동과는 달리 대답은 너무도 단순했고 싸늘했다.

그래 이세상이 너에게 준 것은 없다만 나에게는 많은 것을 줬다.

나에게 가족을 줬고 자식을 줬으며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르쳐줬지.

나는 나 혼자 몸이 아니다. 우리가족과 친척 형제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내가 여기서 살아야하는 이유야.”

나는 아버지의 그 말씀에 할 말을 잃었고 결국 이 머나먼 길은 나 홀로 떠나게 되였다.

아버지는 가족과 가문의 가장으로써 그 모든 것을 지키려고 그 땅에 남으셨고 지금도 가늠할 수 없는 노력으로 그 가정을 지키고 계신다.

이 불효한 아들이 그토록 속 태우고 괴롭혔던 아버지는 결국 이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셨고 그 사랑으로 나를 떠밀어 이 땅에 보내셨다.

나는 지금도 조금만 더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조금만 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었다면 이렇게 가슴 아프지 않을 텐데. 이렇게 가슴 찢어지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룰 때가 많다.

아버지의 생신날 술 한 잔 부어드리지 못하고 인사한번 드릴 수 없는 지금의 현실과 지난날의 불효한 행동이 밟혀와 눈물을 흘리곤 한다.

혹시 이아들이 불행한 삶을 살지 않을까, 밤거리를 방황하며 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아버지는 그 지옥의 땅에서도 나를 걱정하실 것이다.

이아들이 잘되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고 계실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한가정의 눈물겨운 생존투쟁을 목격하면서 살아온 나는, 이 땅에서 부모님의 귀중함과 삶의 희망, 불효했던 나의 모습을 한꺼번에 되찾았다.

부모님과 헤어져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은 느낄 수 있는 그 죄스러운 생각과 마음을, 또 앞으로 다시 만날 날, 어떻게 해서나 효도하고 싶은 맘을 나는 다시 찾았다.

나는 여기서 나에 대한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느꼈고 아버지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아버지를 제일 존경하고 사랑한다.

다심하신 어머니의 사랑도 목마르지만 웅심 깊은 아버지의 사랑 역시 귀중하고 소중하다.

북한에서 못 다했던 그 효도가 어떤 것인지 나는 알고 있으며 효도하며 살기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아버지가 바라셨던 훌륭하고 멋진 아들이 되여 아버지 앞에 큰절 올릴 때, 그이상의 효도가 과연 그 어디 있을까.

아버지를 떳떳하게 뵐 수 있고 인사드릴 수 있게 나는 열심히 살 것이다.

아버지의 바람, 온가족의 바람, 나와 비슷했던 북한의 수많은 가정들의 바람을 훌륭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풀어드릴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셨고 은인이셨다.

또 그 어떤 바람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지켜 오신 수호천사셨다.

이 소나기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새벽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소리쳐본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06827일 푸른 바다

 

 

2006-08-29 17:09:06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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