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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잡초같이 일어서렵니다

작성년도 : 2005년 71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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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같이 일어서렵니다

- 아침이슬

 

 

저는 어느 날 공원에 산책하러 갔다 들에 펼쳐 있는 잡초를 보고 나의 인생을 돌이켜보게 되였습니다. 흔히 잡초라면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지나거나 밭에 뿌리 내린 잡초는 사람들이 뽑아 버립니다. 하지만 밟아도 뽑아도 여전히 그 존재는 살아있고 언젠가는 새싹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립니다.

 

모진 시련으로 쓰러지고 빛을 잃었다가도 어느 날엔가는 꼭 살아서 자기의 생명을 꿋꿋이 다해가는 잡초... 그 누가 보던 말든 좋아 하던 미워하던 자기생의 목적만을 위해 묵묵히 버티어 가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인간이 본받아야할 표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욕심 아닌 권리 때문에 배고픔을 이겨내려고 고향떠나온 것이 인제는 친지들과 영이별이 되고 타향 멀리 중국 땅에서 찬바람 찬비에 몸을 적시며 흐느끼고 몸부림 쳐야했던 저도 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집 식구가 되여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한 하늘 지붕아래서 숨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덧 감격도 새로운 대한민국에 들어서던 그날로부터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수료를 거쳐 여기 제가 사는 곳까지 온 저는 처음에 담당 형사님과 함께 저의 집에 들어서서 앞이 캄캄 하였습니다.형사님이 이집이 "윤씨집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푹쉬고 내일 제가 다시 올게요." 하는 뒷말만남기고 떠난 후에 홀로 빈집에 들어서니 저도 알지 못할 오묘한 공포가 밀려오고 저의 처지가 너무 너무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하고 또 아버지의 형제분들이 남한에 계시다는 이유로 그리도 고통을 받았고 그래서 그리도 제가 증오하던 남조선에 제 발로 찾아왔구나…….하고 생각하니 기막혀서 눈물만 줄줄 흘러 내렷습니다. 중국에서 있을 때에는 한국에 오지 못해 안달을 써왔건만 막상에 그것이 현실로 닥치니 다른 또 하나의 괴로움이 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아찔한 벼랑 끝에 저 홀로 남겨두고 세상 모든 것이 저를 외면한 것같이 막막하고 아찔하였습니다. 파도 사나운 망망대해에서 자그마한 쪽배에 홀로 앉아 풍랑 속을 헤매이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저의 인생이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저에게는 홀로 감당하기 너무도 어렵고 힘든 숙제가 생겼습니다.

 

나이는 비록 30을 넘어서지만 남한에서 태어난 3살짜리 아이들의 수준밖에 안되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대한 이해력으로 홀로 버티여야 하고 새생활을 개척해야 하는 이 숙제는 저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당시 몸도 않좋고 마음도 지칠대로 지친 저는 무엇부터 어찌 했으면 좋을지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정부에서 준 정착금은(1370만정도) 손에 한 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입국할 때 브로커한테 준돈이 1150만원에 주거지 임대 계약금을 주고 나니 정말로 얼마 안남았습니다. 임시 먹고 살 수 있는 것들만 먼저 간단히 사고 텅 빈 집에 있노라니 세상에 산소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고 하여 가슴이 답답하기만하고 머릿속은 착잡하기만 하였습니다.

 

어찌하면 제가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자나 깨나 그 생각뿐이 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교차로 신문을 보고 어느 가계에서 서빙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집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여서 교통비를 않써도 되겠다는 생각에 너무 좋아 그길로 연락하고 면접을 보아 합격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찾아 갔던 그 가계는 "호프"집이였습니다. 북한에서나 중국에서나 "호프"라는 말을 모르고 살았던 저는 그것이 무슨뜻인지 또 거기에 들어가서 무얼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수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서 저도 돈을 벌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어 밤에 한잠도 못 잣지만 다음날 저녁에 일하러 첫출근하는 저의 발걸음은 날아갈 것처럼 가볍기만 하였습니다.

 

일을 시작하며보니 그 일은 제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 간단한일이 아니었습니다. 제일 어려운 문제는 술을 파는 집이고 제가 손님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술심부름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제가 웃음을 많이 팔아 그 집 가계 술을 손님들이 많이 마시게 하여 매상을 올려야 하는 것이 저의 일이 이었습니다.

 

한몇일 하다 보니 도저히 그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잘못된 행동 하나 잘못된 선택 하나가 그처럼 어렵게 여기 까지 온 우리 탈북자들의 이미지에 크게 먹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가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겨 여기까지오는 길을 성공한 현 상황에서 돈몇푼때문에 이일을 계속해야 하나…….하는 갈등을 하던 끝에 결국에는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여 담당형사가 선택하여 주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일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메뉴판을 아무리 들여다봐야 알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름들만 써있고 손님이 주문하면 기초로 무엇을 들여가야 하는지.그리고 분명히 손님의 주문은 메뉴의 것인데 다른 이름으로 주문하거나 표현하면 그때의 당황함은 어찌 글로서 표현하겠습니까. 이렇게 시작한일이 어느덧 손에 익어 제대로 되여 가자 그 이후부터는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일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낮에 해야 할 사람의 일까지 제가 하여 제가 두 사람의 일을 혼자 하였습니다. 아마 제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드셨는지 사장님은 어느 때부터는 가계와 창고열쇠를 저에게 맞기시고 낮에하는 영업 중 4시간은 저 혼자 하게 하시고 창고에 부족한 물건은 제 스스로 알아서 주문하게 하였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하여 새벽 5시 까지 종일 뛰어다니다가 집에 들어오면 다리가 퉁퉁 부어 있고 다리에 쥐가 오르고.하여 진통제 약을 먹고 잠시 눈을 붙였다 깨면 또 출근시간이 되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단골로 찾아오는 손님들 중에는 "포스코"에 다니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제가 하도 살아 보려고 아둥바둥하니 보기가 안쓰러운지 저보고 포스코안에서 일할 의향이 없냐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정식 직원은 아니고 일용직인데 여기서 고생하는것만큼만하면 시간은 8시간 일이고 월급도 더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그 사람들의 소개로 하여 저는 포스코안 막노동판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공구 창고를 보면서 거기서 또 역시 모든 공구의 이름을 모르는 상황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둘 배워가면서 일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금방배우면 돌아앉아 몇 분후면 또 그 이름을 까먹고.너무도 생소하고 모든 것이 외래어로 씌어지고 불리니 저는 그냥 알짜 무식이 된격이였습니다.

 

공구와 자재들을 내어주고는 짬시간에 현장에 나가 페인트칠도 해주고 볼트도 풀어주고.조여주고 전기선도 결선해주고..허리에 뻰찌 드라이버 몽키 스파나를 차고 일하는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일군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볼트 조여주고 청소해주고 하느라 30~40M되는 크레인 꼭대기에도 올라 다니고 지하에 들어가 아슬아슬하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그때 그 크레인 (기중기) 꼭대기에 올라가니 거기 운전기사와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크레인이 생겨 여자가 올라와보기는 제가 처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공사현장에 철거 작업을 할 때에는 아저씨들과 함께 볼트 풀고 쇠파이프(쇠로된 배관)도 나르고 소화전철거도하고 전기 판넬 철거도 함께하면서 저는 나름대로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는 포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여 일을 못하게 되자 저희가 맡은 공사가 기한은 다되가고 철거작업이 아직 마무리 하지 못하자 공사 현장 소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저하고 다른 한사람 4명이서 공사 철거를 하게 되였습니다.

 

모든 라인의 철거 작업과 동시에 철거한 내용물을 분리 처리 하는 작업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여름이라 더운 날씨와 제철소의 뜨거운 열기는 생계란을 가져다 놓으면 금방 익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 넷이서 작업 마무리를 다하던 날 마음이 그렇게도 뿌듯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그 사람들과 꼭 같이 일하면서 이 현장에서 있으나 없으나 한사람이 아니라 당당한 일꾼으로 쓰여졌구나 하니 힘들었던 순간순간들이 보람으로 느껴졌습니다. 주변사람들이 제가 일하는 것을 보고 그 일은 여자가 하는 일이 아니다고 그냥 창고에 가만히 앉아서 공구와 자재 관리만 하면 된다고 그리 말하여도 저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저의 일하는 모습에서 우리 북한사람들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또한 제가 일하는 범위에서는 저도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한개 공사가 다 끝이나 다음공사가 이어질 때까지 빈공간이 생기면 인력 채용 쎈터에 연락하여 때로는 도로 공사장에 나가 뙤약볕에 신호수로도 일하여보고.이렇게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여 횟집과 불고기집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도 하고…….

 

작년겨울 어느 날 고향소식을 98년도 집을 나와 처음으로 듣게 되였는데 청천 벽력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렇게도 의지하고 믿던 언니가 굶어 돌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땅이 뒤집히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큰 회오리바람이 저를 휘감아 수렁에 빠뜨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날 밤 10시경에 택시타고 인적 드문 바닷가에 나가 마음껏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 엄마 ~~~ 아버지~~~오빠~~ 언니~~~"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혈육들을 애타게 부르며 온몸을 떨어가며 울고 울었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언니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제가 나올 때 언니를 데려오지 못한 것이 너무도 한스러웠습니다.

 

그때는 살 수 있다는 기약 없는 길이라 괜스레 언니를 데리고 떠났다 붙잡혀 언니를 고생시키거나 잘못되게 할가봐 차마 함께 떠나지 못했는데 그때 제가 마음을 조금만 더 독하게 갖고 함께 떠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제가 언니를 죽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병도 아니요 사고도 아니요 굶어서 30대의 꽃 같은 나이에 이승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고 찢어 지는 것 같았습니다.

 

울고 소리치고 몸부림치고 하기를 몇 번이고, 집에 들어와 보니 새벽 6시가 되였고 목은 다 쉬여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끝내 작년 9월에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정말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일어났다는 다시 쓰러지고, 그러기를 몇십 몇백번...

 

억척같이 살아가니 하늘도 저를 외면하지 않았나 봅니다. 저의 주위에서 지켜보던 한 회사 사장님이 저를 경리로 채용하겠으니 함께 일하겠냐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불같으나 컴맹이라 어쩔 수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사장님은 일하면서 배우면 된다고 제가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전 그렇게 하기로 하고 회사에 들어가게 되였고 대학생 알바를 찾아서 돈을 주고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하나원에서 컴퓨터 배우는 시간이면 어떻게 하나 구실을 만들어 빠지던 제가 이사회를 살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배워야 된다. 결심하니 저녁마다 배워서 인젠 시무일을 하는데 손색이 없게 되였습니다.

 

지금 저는 당당 합니다. 그 누가 저에게 물어 보면 회사에서 일합니다. 하고 당당하게 말할수있는제가 좋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저를 사랑합니다. 백번 천 번 상처받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잡초가 바로 저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잡초는 제 생활의 견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잡초 같은 인생 잡초같이 살고 싶습니다. 잡초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다독이고 돌이켜보며 살 것입니다. 힘들어 지쳐 쓰러지면 잡초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설 것이며 억척같이 살 것입니다. 하여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잡초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네가 내모습이기에...

나도 너처럼 살아야 하기에...

 

200512월 아침이슬

 

 

2005-12-15 11:41:37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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