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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초보운전수의 좌충우돌 - 정태성

작성년도 : 2000년 63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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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1.10 함경북도 청진시 나남에서 3남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집안은 가까운 친인척중 당원이 한 명도 없는 이른바 별볼일없는 집안이었고 기계기술자였던 아버지는 노동당 입당을 열망했으나 좌절되었다. 나 또한 군입대(초모)대상에서 누락되는 수모를 겪은 후 몇 번의 시도끝에 겨우 입대하여 모범군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그토록 원했던 군관학교 입학은 끝내 거절당했다.

나와 아버지의 연속된 실패의 이유는 군관학교 입학이 좌절된 후 우연한 기회에 엿본 내 신상기록 카드에 적힌 붉은 글씨였다. "할아버지가 일제때 공장을 운영한 소자본가, 외삼촌이 57년 조사받은후 행불"이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용서받을 수 없는 내 출신성분의 원죄를 본 순간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대후 황남 신원군 상업관리소 부기지도원으로 근무하다 92.7 러시아 임업대표부 목재가공공장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현지에 파견된 후 백화점에서의 충격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진열된 크고 멋있는 냉장고들이 "MADE IN KOREA"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고 주차장에서는 교통질서확립이라는 한글스티커가 붙은 국산승용차가 있었다

그후 남한에 대한 동경심을 키우며 탈출의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94년3월 벌목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후 1년 4개월을 이국 땅에서 방황하면서 살얼음판 위를 걷듯 생과 사를 넘나드는 위험한 고비를 겪으면서도 오직 한국행만을 염원하다가 95년 7월에야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남한에 첫발을 내디딘후 지금까지 온몸으로 체험하며 배운 것 가운데 첫 번째는 자유뒤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르며 인생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사회주의 평등의식은 능력위주의 냉정한 남한사회에서는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회배출후 6개월간 자그마한 영세업체에서 월 60만원을 받으며 일한 적이 있는데 나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가 유명업체에 취업하여 봉급을 100만원 이상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사회주의 평등의식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이상한 허탈감을 느꼈다. 오기로 인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후 6개월간을 화장품과 건강식품 외판원을 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남한사람들의 탈북자에 대한 편견도 나를 힘들게 했다. 화장품외판을 할 때의 일이다. 시골읍 관공서로 가서 화장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관공서 사람들이 내 말투가 이상했는지 귀순자인지를 묻더니 대뜸 "한번 변절한 사람이 또 다시 변절할 수 있다"며 정면에서 비난하는게 아닌가 나는 그일을 겪은후 외판원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후 97.1 현재의 직장에 취업한 후 지금까지 만족스런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북한에서 온 관계로 인해 현 직장에서 겪었던 몇가지 실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은 97.3경에 있었던 에피소드다. 옆에 앉은 여직원에게 무심코 박동무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라고 업무와 관련된 사항을 물었는데 그 여직원은 대답을 못하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사무실안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동료직원이 "정동무"라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북한에서 늘 하던대로 동무를 붙여 상대방을 부르는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후 직원들은 나를 "정동무"라고 부른다

또 한번은 옆에 앉은 여직원이 자기를 따라오라면서 컴컴한 서고로 가는 것이었다. 순간 나에게 흑심이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전산용지 박스를 좀 옮겨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엉뚱한 생각을 한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 악의없이 여직원에게 "교활하구만"(북한에서는 이익을 챙기기위해 상대방을 속일 때 악의없이 씀)이라고 말했는데 듣고 있던 직원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북한에서는 유머있게 많이 쓰는 말인데 남한에서는 아주 나쁜 욕을 할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직장생활하면서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힘든일도 많았다. 일을 배울 때 상사로부터 지적을 받고 항의한 적도 있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직장에 동화되는 것이 사회에 빨리 적응하는 길이며 성공인이 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제 어느정도 직장생활에 적응되고 보니 때로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직장생활이 무료한 때도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 아직 너무 모르고 또 알려고 크게 노력하지 않아 다른 동료들보다 뒤떨어져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최근 남한사회 정착이 어느정도 터전을 잡은 것에 대해 스스로 안주하려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 통일의 그날 북한에 계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칠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한눈 팔 겨를이 없다고 다짐하면서...

그렇다고 출세나 돈만을 지향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매일매일 생활에 충실하면서도 또다른 인생공부를 열심히 하여 목숨걸고 찾아온 진정한 의미를 느끼고 싶다

이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리며...

2000.1 정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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