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 하면...>
작성년도 :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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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 하면...>
권선녀
사람이 젊어서는 희망 속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 속에 산다고 내 나이 70 고개를 넘어서 여기 대한민국 땅에서 행복의 전성기를 맞아 여러 사람의 축복 속에 궁궐 같은 홀에서 고희연까지 받고 보니 썰물처럼 밀려갔던 기아의 고달팠던 나날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며 추억을 불러일으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중반에는 절정을 이루었다.
국가에서 공급해 주던 식량 배급이 끊기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의에 들이닥친 시련 앞에서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그만 목숨을 잃는 대량 아사가 벌어졌다. 여기저기에서 싸늘히 식어가는 시체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소리가 그야말로 전쟁도 아닌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아침에 깨어나면 가족 모두가 다 숨 쉬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숨 쉬고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쉬었고 출입문을 열면서도 그 누군가가 문 앞에 쓰러져 숨져 있지 않을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열었고. 길 다니다가도 쓰러져 숨진 이들 만날까 무서워 겁에 질려 다녔다.
"고난의 행군"의 시련은 우리 가정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고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당만 믿고 따라가면 승리한다.”는 이 말을 철석같이 믿고 오직 당만을 믿고 충실하게 살아오던 가정의 가장이었던 남편이 이 시련 앞에서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하직하였다. 집에서조차 변변히 식사를 못 하고 직장에 출근하여서는 점심시간에 차려지는 몇오리 되지 않는 국수마저도 자신은 드시지 않고 굶주리고 있을 자식들을 생각하여 품에 안고 달려와 매일 먹이곤 하였으니...
아무리 건장한 사나이라 한들 하루 이틀도 아닌 매일 이렇게 끼니를 넘기셨으니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북한에는 이런 류행어가 있다. “고지식한 사람만 <고난의 행군>시기에 다 죽었다"라고 정말 맞는 말이다. 당이 하라는 대로만 하며 살던 사람들이 굶주린 시련 앞에서 제일 먼저 죽어갔다. 그들 중에 한 사람, 바로 내 남편도 오직 당과 수령밖에 모르며 충성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오다 허무하게 값없이 아사 하였다.
죽음! 이것은 인생의 끝이었다.
살아생전 당을 위하여 일했다고 훈장을 한가득 타 놓았건만 죽고 보니 그것은 한 조각의 쇠붙이에 불과하였고 청춘 시절을 고스란히 군사복무를 하며 바친 그 대가로 조선로동당원이 되었건만 당증 역시 회수해 가니 그뿐이었다. 남편을 잃고 보니 당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서 살다가는 자식들도 다 애 아빠처럼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짓이든 해서라도 자식들만은 꼭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품고 슬픔에 잠겨 눈물 흘릴 겨를도 없이 산이면 산 동냥이면 동냥 도강이면 도강 (중국으로 불법적으로 두만강을 넘나드는 일). 도둑질이면 도둑질 닥치는 대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산에 가서 풀을 뜯어다 먹으며 연명하였으나 서로서로 앞을 다투어 풀 뜯으러 다니다 보니 풀까지 말라버린 북한 땅에서 더 뜯을 풀도 사라졌다.
할 수 없이 염치도 체면도 다 줘 버리고 친척이나 친구의 집에 동냥도 다녀보았으나 그들도 사는 게 다 같이 힘들었으니 구걸해다 먹는 것도 한 끼였고 더 구걸할 형평도 못 되었다.
점점 죽음을 위협하는 시련 앞에서 덜컥 겁이 나면서 두려웠다.
애들마저 잃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들면서 중국에 있는 친척 집으로 도강하여 가서 쌀이라도 구해오고 싶은 충동을 누를 길이 없었다.
때는 장마철이라 두만강 물은 불어서 사품치고 흐르고 있었으나 도강의 결심이 굳어지니 그것도 두렵지 않았다.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두만강 물도 굶주릴 대로 굶주려 뼈만 앙상히 남은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중국 땅 쪽으로 무사히 건널 수 있게 도와주었다.
중국 친척 집에서는 집에 들어선 나를 보고 와뜰 놀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라 하면서 마음대로 쌀을 가져가라고 하는 순간 설음이 북받쳐 올라 울고 또 울었다.
풍요로운 중국의 생활을 보면서 부럽기 그지없었고 무엇이나 다 신비롭기만 하였다. 친척분은 내 체구에 쌀을 무겁게 지고 강물에 들어설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쌀을 지고 나의 손목을 잡고 강을 건네주었다. 혈육의 뜨거운 정을 느끼며 눈물로 이별하였다.
처음으로 흰 쌀밥을 구경한 애들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게 눈 감추듯 먹으며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당분간은 이렇게 조금 먹었으나 아무리 뛰며 다니며 노력해 봐도 국가에서 주던 식량 공급이 끊기니 도저히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굶주림 앞에서는 양반도 못 찾는다고 오래 지속된 북한의 식량난은 굶주린 북한 사람들을 서슴없이 도둑의 길에 내몰았다.
때는 풍요한 가을 계절이라 다 익은 옥수수들이 밭마다 서 있었다.
때를 기다렸다 하듯이 굶주린 이들은 서로서로 앞을 다투어 도둑질에 나섰다. 옆집에서 도둑질해 온 옥수수를 삶아 먹는 냄새가 주린 창자를 뒤집어 놓았다. 애들은 그것이 너무 먹고파 눈물까지 흘리며 자기들도 옥수수 도둑질 가겠다고 떼를 썼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지랄 지랄 열두 지랄 한다고들 하지만 그중에서도 도둑질만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온 나로서는 자식들만은 그 길에 내 세울 수는 없었다. 온 밤 뒤척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나"라도 나서서 도둑질해다 애들을 먹어야겠다는 결심이 굴뚝같았다.
옥수수가 서 있는 밭은 20리가 넘는 먼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 먼 곳도 자식을 먹이겠다는 생각 하나만을 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길을 오르고 내리고를 거듭하여 옥수수밭에 이르렀다. 농장 밭에 도착하고 보니 도둑이 도둑을 쫓아 버리고 도둑이 도둑을 보고 놀라 달아나고 옥수수 받은 온통 도둑질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누가 도둑이고 누가 경비원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난장판이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경비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잡히면 맞아 죽은 각오를 하고 밭에 뛰어들어 옥수수 뜯는 소리가 날세라 수건에 감싸 쥐고 뜯어 품속에 집어넣고 손에 들고 줄행랑쳐 나와서는 숲속에서 동향을 살되곤 하였다. 숨을 돌리는 틈에 허기진 굶주림을 다소나마 달래보려고 옥수수 껍질을 벗겨 마구 뜯어 먹었는데 그때 그 옥수수의 맛은 천하진미였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찰진 맛. 정말 잊을 수 없다.
만약 지금 그 누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굶주렀을 때 먹는 생옥수수 맛이라고..."
그때 그 옥수수의 맛을 못 잊어 훗날 한번 먹어 보았으나 도저히 그 맛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또 먹을 수가 없었다.
옥수수를 몇 알 뜯어 먹다 문득 집에서 애타게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자식들을 생각하니 더는 지체 할 수도 없어 또다시 밭으로 살금살금 기어가 옥수수를 뜯어 가지고는 뛰어나오고...
그러기를 그 몇 번 반복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나무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였고 돌부리에 부딪혀 살점이 찢겨 피가 흘렀지만 피 닦을 겨를도 없었다.
도둑질한 옥수수를 걸머지고 산 중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등골이 오싹한 위험한 순간들은 다행히도 넘기고 도둑질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비록 양심과 바꾼 도적질이었지만 옥수수를 보고 좋아할 애들 생각을 하니 기쁘기 그지없었고 마음은 흐뭇하였다.
그러나 가난 가난 열두 가난이라고 설사 옥수수를 갖고 가도 개칠 몽둥이 하나 없는 집 형편에서 옥수수를 삶아 먹을 수도 없었다. 힘에 겨웠지만 할 수 없이 땔 나무를 하기 시작하였다. 옥수수가 들어있는 배낭을 벗어 놓고 나무를 하면 한결 힘들지 않았겠건만 혹시 벗어 놓았다가 잃어버릴가 걱정되여 힘든 대로 배낭을 메고 나무를 하다 보니 곱절 더 힘들었다. 옥수수를 도둑질할 때에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힘차게 뛰어다녔건만 정작 나무를 하려니 온몸이 솜에 물을 묻혀 놓은 것처럼 노근해져 천근만근이였다. 쓰러져 있으면서도 옥수수 배낭만은 꼭 그러안고 드러누웠다. 몸이 땅 밑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과연 이렇게 도둑질해 먹으며 사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차라리 죽는 것이 옳은 일인지?하는 생각이 번갈아들면서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한탄하였다.
그러나 이 엄마 하나만을 믿고 살아가는 자식들이 눈에 밟혀 들어와 기운을 차리고 나무를 하였다. 드디어 나무를 묶어 어깨에 짊어지고 옥수수는 머리에 이고 한 발짝 한 발짝 겨우 옮기며 집으로 향하였다. 나의 온몸은 땀투성이로 범벅 되었고 옥수수의 무게에 짓눌린 목은 자라목처럼 움츠려져 목에서는 겨 불내가 날 정도로 타들어 갔다.
아! 그때를 추억하면 지금이라도 숨이 막히고 울고 싶다.하루 종일 굶으며 엄마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애들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여도 엄마가 오지 않자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길목에서 엄마를 이제나저제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나타나자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내일은 가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애들이 얼마나 속상하고 애탔으면 이런 당부까지 하랴 하는 생각에 가긍하기 그지없었다.
옥수수를 보고 좋아하는 애들의 모습을 보니 하루의 고달팠던 마음이 순간에 봄날의 눈 석이처럼 사르르 다 녹아내렸다.
나는 자식들 앞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옥수수를 도둑질하던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였고 애들 역시 엄마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엄마가 도둑놈이라는 생각보다 우리 엄마가 장하다고 생각하다.
맛있게 옥수수를 먹는 애들을 보면서 이렇게라도 도둑질해 먹을 수 있는 계절이 계속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때를 추억해 보면 굶주림 앞에서는 체면도, 양심도, 도덕도, 교양도 본보기 가치관도 다 없어진다는 것을 현실로 체험하면서 깨달았다.
그 당시 그렇게라도 도둑질해 먹었으니 살아서 지금은 여기 대한민국 땅에서 복락을 누리며 여생을 살고 있고 자식들도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순간도 북한 땅은 온 나라가 백성을 도둑으로 몰아가고 있다.
국가 창고를 거머쥐고 국가 재산을 빼돌려 제 배 채우는 큰 도둑놈들 돈 있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위협 공갈하며 빼앗아 제 주머니에 넣는 법관 강도들! 북한은 온통 생존 경쟁으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도독과 강도들이 판을 치는 세상으로 변하였다.
힘없는 백성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자그마한 물건을 훔치려다가 들키면 감옥으로 가야 하는 세상 북한! 언제면 쇠살창 없는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북한 백성들이 그 감옥에서 벗어나 여기 대한민국 국민들처럼 자유를 한껏 누리며 살아볼까? 나는 지금도 풍요로운 남한 생활에 몸담고 배불리 먹으며 살고 있지만 굶주리며 도독 질까지 해 가면서 먹고 살던 그때를 추억하며 한 알의 쌀이라도 귀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이 배고픔이고 굶주림은 선량한 사람도 도둑으로 만든다는 것은 현실로 체험한 한 사람으로서 남한 땅에서 맘껏 먹으며 여생을 보내는 나는 행복하기 그지없다.
이 글을 마치며 우리 탈북민들에게 삶의 요람을 마련해 주고 정착을 잘해서 잘 살도록 도와주고 있는 정부와 국민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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