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에 품은 성공의 씨앗을 안고." - 이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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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품은 성공의 씨앗을 안고."
- 이수복
내 맘에 품은 성공의 씨앗을 안고
고향땅을 등지고
1990년 8월 나는 30여년을 살아온 고향땅을 등지고 러시아行 열차에 몸을 실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었고 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 치는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맛 본 자유의 세계는 경직되고 제한된 사회에서 살아온 나에게 실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는 곧 내 삶의 전환점이 되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는 열차 안에서의 분위기는 누군가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외국에 나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나 또한 삶에 지친 가족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해서라도 가난과 굶주림에서 우리 가족을 해방시켜야겠다는 심정으로 지원하였다.
하지만 자유를 맘껏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을 때 받은 그때 그 충격.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부정하면서 내가 옳다고 믿었던 신념과 이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 나는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새 삶의 정착
러시아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다 북한 진영을 탈출 한 후, 한국에 입국 할 때까지 7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그 기간중에 다섯 차례 체포를 당하였지만 그때마다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여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임대주택을 받고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시기는 1996년 9월 말경이다.
집에 들어간들 나를 맞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돈을 벌어야 할 이유와 목적이 없었고, 내가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었다.
체제와 문화가 상반된 곳에서 살던 내가 오늘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가치관의 혼란과 갈등으로 외계인이 아닌 외계인이 된 심정으로 망망대해를 표류하듯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이곳, 대한민국은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선뜻 무언가를 쥐여주지는 않았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곳이었다. 한국만 가면 모든 것을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져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끝없는 추락
기대가 컸던 만큼 상실감도 컸다.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고 갈등과 번뇌에 쌓여 방황의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밤 문화의 유혹에 이끌려 며칠을 돌아다니다 보면 얼마 남지 않은 돈마저 쉽게 날려보냈다.
대한민국에 와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밤거리였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밤이면 밤마다 노래방과 술집을 돌며 방탕한 생활에 취해 살았다.
술집에 가면 조명에 비친 예쁜 아가씨들이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다음날 저녁 집에 홀로 외로이 있으면 전화벨이 울리고 이내 수화기에서는 어제 만난 술집 아가씨가 보고 싶다며 빨리 오라고..... 나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것도 얼마 남지도 않은 돈이 다 털릴 때까지 정신없이.....
마지막 발버둥
이는 나뿐만 아니라 당시 입국한 탈북자들은 거의 모두가 한 두 번쯤은 겪었을 만한 일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게되었다. 마음을 비우고 나서 생각해보니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정착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배워야한다는 생각에 여러 방안을 모색해 보았지만 당장 생계 해결이 급선무이다 보니 돈을 벌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았다.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건설현장 잡부로 일을 하였다. 한 달 내내 일을 한다 해도 일당 5~6만원을 받아 최소한의 생계유지만 한다 하더라도 호주머니 속에 남는 것은 몇 푼 되지 않았다.
지난날 경험해 보지 못한 세금, 살아서 숨쉬는 것조차 돈으로 연결된 이 사회. 세금을 내야하고 노력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 대한민국은 냉정한 자본주의 사회였다.
한국에 온 직후, 국내경제는 IMF 관리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전반적으로 노동시장이 너무 어려웠다. 결국 신은 나를 더욱 더 혹독하게 대했다.
그나마 건설현장의 일당 용역자리도 구하기 힘들었고 주유소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마저 아는 사람이 없으면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살고자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작은 기회가 나를 향해 손짓하였다.
IMF가 시작되면서 하루아침에 도산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인위적인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으로 인해 서울역에는 노숙자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IMF는 나에게 기회였다. 달러가 급등하자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각국의 보따리상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어와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했다.
당시 나는 동대문 시장에 나가 오퍼상을 하기 시작했다. 생산공장과 판매업자간 거래를 성사시켜 컨테이너에 물건을 실어 부쳐주었다. 저녁 해가 질 무렵 출근해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힘든 일과였지만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달의 수입이 결정되었기에 저절로 힘이 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한국사회에 대한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먹고 살 길은 많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또한 누군가의 강요와 지시가 아닌 스스로 노력해 얻은 성과에 대한 보람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시련과 도전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중국에 투자를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투자를 권유하였다. 어느 정도 자금을 확보한 후 중국에 투자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나의 경험 부족과 안이한 판단으로 인해 곧 실패를 맛보았다. 정확한 정보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오로지 남의 말만 믿고 투자했다가 한달만에 전 재산을 날려보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좌절감뿐이었다.
사업에 실패하자 빚 독촉이 심해져 가정은 파탄직전까지 내몰리게 되었고 정신과 육체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삶을 포기 할 수 없었다. 인간답게 재대로 한 번 살겠다고 나는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짧고 억울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마음을 굳게 다짐했다. 하늘은 아직 날 버리지 않았다. 지인을 만나 조그마한 물류창고를 차려 운송회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여 어느 정도 발판을 만들어 놓고 정상궤도를 달리기 시작할 때였다.
일요일 아침 경찰서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화재 소식을 듣고 물류창고로 달려가 보니 창고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 여기서 정녕 끝이란 말인가!’ 하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건물주의 과실로 인한 화재로 판명되어 생각보다 많은 보상금을 받아 인천으로 물류창고를 옮겨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소비자들의 요구는 다양하고 까다롭다.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은 판매사의 책임이 아닌 운송회사의 책임이었다. TV 화면으로만 보고 구입한 물건이 간혹 소비자의 마음에 들지 않아 반품을 하여도 이는 운송회사의 몫이었다.
지방으로 간 기사들이 소비자에게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소비자들은 우격다짐으로 사장을 부르며 항의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한밤중이라 해도 전국 어디든지 달려갔다.
간혹 거제도에 있는 소비자가 5~6번 A/S를 요구해 와도 당장 서울에서 거제도까지 내려가야 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사장인 나의 몫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은 나에게 손해지만 내가 열심히 일하고 신용을 쌓는다면 언젠가 도움이 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감당하기 힘든 요구라도 항상 최선을 다했다.
의식을 바꾸자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는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한데서부터 기인한다. 내가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신뢰하는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국내에 정착해 나갈 때에도 주변 사람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형성하였기에 모든 일이 가능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가정에서는 4인 가족의 가장으로서 탈북자 단체에서는 간부로서 중책을 맡고있다. 경험이 일천하고 부족한 면이 많아 시행착오도 무수히 많이 겪어보았지만 나는 매순간 우리 탈북자들의 복지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국사회를 이해하지 못해 좌절하고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후배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안쓰럽다. 이들을 위해 나는 오늘도 그들의 전화를 받고, 상담을 한다.
또 지금 쓰는 이 글이 우리 후배들의 정착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늦은 시각 사무실에 홀로 남아 몇 자 적어보았다.
우리 모두는 사회정착을 위해 무엇보다 안정적인 직업을 원한다. 남들보다 나은 보수를 찾아다니지만 그 전에 한번쯤은 스스로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체제와 문화가 전혀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교육을 받은 우리가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전에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얼마나 했는지.
우리는 남을 탓하고 사회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나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전에 한번 더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비록 지금 우리는 이곳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희망과 미래가 있다. 그리고 우리에겐 꿈이 있다.
성공의 씨앗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씨앗을 뿌려 꽃을 피우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인내 그리고 원만한 인간관계가 바탕이 될 경우 이룩할 것이다. 아직 만족할 만한 삶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지만 이제서야 살아가는 방법의 반은 터득한 것 같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 열심히 노력하기 바란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온 승리자들이 아닌가!
2005년 6월 이수복 씀.
2005-07-28 15:25:59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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