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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북한의 강제 납치와 나의 북한 생활 - 이재근

작성년도 : 2001년 42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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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1년 2월23일 북한인권시민연합 2001년도 전기총회에서 행한 이재근씨의 증언 녹취록이다.


나는 배우지도 못했고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지만, 내가 납북된 경위와 북한 인권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겠다.

납북 당할 당시 내가 탔던 배는 원양에 가서 작업하는 저예망어선이었다. 출항한 날짜는 1970년 4월 10일이었다. 인천항을 출항해서 남진항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 때 산둥반도 부근에서 작업하던 저예망어선에서 그 쪽이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무전이 왔다. 그래서 선장이 우리에게 말하길, "기왕에 고기 잡는 거, 좌우간 거기 가서 고기를 잡아서 연천에 갔다가 인천에 가자"고 했다. 그래서 산둥반도로 갔다. 가서 작업을 하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기가 많이 잡혔다. 주로 농어라든가 홍어 이런 값진 어종들이 많이 잡히기 때문에 15일 간을 작업했다. 그곳에서 몇 천 상자를 잡아놓고 이제는 백령도 쪽으로 나아가는 데, 거기서 동남쪽으로 그물을 끌고 나아가기 때문에 한 열흘을 끄니까 결국은 등대가 보였다. 거기서 한 며칠 간 작업을 하는데 우리 해군함대 1110호가 "왜 여기서 작업하는가?"라고 물어, "휴전선에서도 먼 데 작업하면 안 되는가?"라고 응했다. "여긴 위험하니까 좀 더 남쪽에 내려가서 작업하라." 그러면서 우리보고 하는 소리가 "고기 있으면 달라."고 해서 거기서 고기를 다섯 상자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배와 헤어져서 계속해서 작업했다.

4월 28일 저녁, 작업을 했는데, 백령도와 연평도 부근 중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물을 끌고 내려가는데, 그게 동남쪽이었다. 우리는 주선이 아니라 종선이었다. 그물을 놓고 동남쪽으로 끌고 내려가는데 그때 시간이 한 12시 40분쯤 되었었다. 한참 끌고 가고 있을 때 나는 침대에 있었다. 침대가 바로 선장 침대 밑에 있었는데, 그 때 예감이 좀 이상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잠도 안 오고 해서 누워있었는데, 잠이 들려고 할 때쯤 배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일어나 고개를 내미는데, 해군 열 명 가량이 총을 들고 우리 배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우리 해군들이 혹시나 어뢰선 가까이서 작업한다고 단속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총을 장전하더니 다 내려오라고 공포탄을 쏘면서 말하자 우리는 할 수 없이 위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그들이 또 올라오더니 "이놈의 새끼들 서 있어"고 하면서 한 서너 발 쏘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 내려갔다. 아래층 갑판실에 가는 데, 배가 그물 찬 채로 그 경비정 두 대에 의해 끌려가는데 그물이 무거우니까 배 속도가 안나오게 되자, 다시 돌아와서는 "어떤 놈 새끼가 저항하고있어? "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도 없다."고 하니까 "이놈의 새끼가 또 거짓말한다"고 막 총을 쏘면서 우리를 몰고 가서 다 선실에 밀어 넣었다. 선실 뒤로 들어가자 밖에서 문을 잠궜다. 그리고, 그물의 쇠줄을 끊고 배를 끌었다. 그 때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거기서 승리도 섬까지 가는데 한 시간 미만이 걸렸다. 약 삼십 노트 정도 속도로 달렸다. 우리가 다 도착할 무렵에 한국 해군함대에서 불법행위라고 방송하면서 행동을 취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었다.

북한에 끌려간 후, 우리는 이불이나 보따리 등을 다 싸서 한 쪽에 놓고, 이름표 써오라고 해서 그렇게 하고 하선하였다. 가는 길에 트랙터 몇 대가 밭을 가는데, "저게 뭐 하는가"라고 물으니까, "우리 공화국에서는 저렇게 기계화되어 가지고 농민들이 편안히 앉아서 농사짓는다"면서 선전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저들이 또 선전을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우리가 가는 길에 인민학교 학생들이 학교 앞에 쭉 줄을 서서 막 인공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었다. 그리고 우리는 해주에 도착했다. 해주에 도착해서는 아무데도 안 가고 바로 해주 목욕탕에 갔다. 가더니 옷을 다 벗으라고 해서, 다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니까 시계하고 반지를 다 벗으라고 했다. 벗고 들어가는데, 우리가 그 때(1970년) 우리 옷 입은 것이 남한에서는 제일 못 사는 축인데, 구두를 신고 잠바를 입고 내려가니까 우리가 외국에서 왔는가 싶어서 사람들이 인사도 하고 그랬다. 그 때 보니 북한사람들의 옷이 완전히 말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빨아 입었지만, 완전하게 형식도 낙후한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 목욕을 다하고 "시계하고 반지를 왜 안 주냐?" 그러니까 "이런 건 앞으로 다 갈 때 주겠다"하면서 그냥 있었다. 그런데 해주 여관에 가서 다른 건 몰라도 반지는 회수하고 시계는 주자는 생각으로 시계를 주었다. 시계를 받아 끼고 그 후부터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보통 5시간 10시간 계속되었다. 질문은 "어디로 갔는가, 어디서 누구를 봤는가, 누구를 만났는가, 바다에서 어느 쪽으로 우회했는가" 등 세세하게 코스까지 물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이들은 우리를 모두 싣고 해주 보위부로 갔다. 해주 보위부에 도착하자, 그곳 본부장이 들어와서 하는 소리가, "당신네 배는 분명히 간첩선이다. 바다에서 해군 함대를 만났고 거기서 지령을 받았고, 인천에서 나올 때도 지령을 받아서 나왔기 때문에 간첩행위를 했다. 그래서 배하고 사람하고는 공화국 법에 따라서 처리하겠으니까 후회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싱거워서 저 사람이 정신 있는 사람인가. 우리같이 고기 잡는 사람이 무슨 간첩행위를 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들 나름대로 뜻이 있어서 일을 그렇게 짰던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지난 다음에 평양으로 올라 왔는데, 평양에 도착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양에서는 선장에게 간첩행위를 했다고 마이크 앞에 가서 한번만 얘기하라며 계속 얘기를 했다. 그런데 선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선장이 그들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간첩행위 한적도 없다. 지령을 받은 것도 없다. 그런데 왜 당신네들 자꾸 간첩행위라고 이야기하는가?" 라고 이야기했다. 선장이 끝내 말을 듣지 않으니깐, 얼렀다가 술을 먹였다가, 여자도 붙여봤다가 그랬다. 하지만 김영욱이라는 그 선장이 말을 듣지 않자 북에서 포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 때 선장이 넘어가서 간첩행위를 했다고 인정했다면 배고 사람이고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머리가 좀 잘 돌고 힘도 좋고 건강한 사람들은 7명을 뽑았다. 이 7명중에 내가 포함되어 북한에 남아서 30년 동안 살다가 98년도에 탈북했다.

무엇보다도 북에서는 한국에서 간 사람들을 너무 차별대우를 했다. 우리 아들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겠다.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 했다. 그래서 정무원시험에서 세 번이나 일등을 했다. 한번만 정무원시험에서 일등을 해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가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우리집 아들에게 어디를 가겠느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그 전에 배탔으니까 나도 배타고 세계를 좀 돌아다니고 세상물정을 좀 알겠다고 하면서 해운대학을 가겠다고 하기에 나진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안된다고 그랬다. 그래서 내가 가서 왜 안되는지 알아보고자 계란이나 중국 담배 등을 사들고 찾아갔다. "왜 무엇 때문에 안되는지 이유나 좀 압시다." 라고 하자, "당원이라고 해서 다 되는 것 아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도 당원이지 내가 당원이기 때문에 하는 말 아닌가. 내가 북에 와서 입당하기 위해 힘들여서 일하는 게 다 내 아들 하나 대학 보내서 잘되자고 하는 건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당원이라고 해서 다 같은게 아니다. 당신은 한국에서 왔지?" "그렇다." "그럼 아들 어머니는 어디에서 왔는가?" "중국에서 왔다" 하니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원래 대상이 안된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보니깐 그 대학에 가는 사람들은 전부 중앙당 정치위원들, 부장들 과장들, 그런 사람들의 자식들이었다. 잘사는 집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집 아들은 공부를 좀 못해도 받는데, 나처럼 한국에서 온 사람은 그런 대학에 갈 생각을 못한다. 대학직원은 굳이 아들을 대학에 보내겠다고 한다면 자기가 하나 추천해주겠다며 김일성 종합대학이나 광산 대학을 추천해 주었다. 그래서 "해운대학이 더 수준이 높은가?" 라고 물으니, 규정 때문에 한국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들은 해운대학에 보낼 수 없었다.

집에 와서 아들을 불러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그런소리 하지 마시오. 아버지의 처지가 그래서 내가 해운대학에 가지 못하는데, 내가 김일성 종합대학에 1등으로 졸업한들 내 앞날은 뻔한 게 아닙니까 차라리 아버지 공장에서 아버지와 같이 일하겠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래서 결국 아들을 대학으로 못 보냈다.

북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들은 능력대로 공부하고 일하고 온갖 것을 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북으로 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북한 사람들은 쇼를 잘 꾸민다. 납치되었을 때 간첩행위를 했다고 말하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만일 선장이 그 권유를 받아들였더라면 결국에는 정말 그렇게 한 것으로 사실화되었을 것이다.

우리와는 달리 동진호의 경우에는 선장인 최강석이 TV 방송에서 자신들의 배가 간첩행위를 하기 위해 북으로 들어왔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그 때 나는 방송을 보며 저 사람들 미쳤다고 했는데, 그 후에 동진호 선원들은 한사람도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그런 것을 보면 쇼를 부려서 결국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나 배를 빼앗고,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자는 속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우선 마음 편하게 살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직장에 배치된 그 날부터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선 나를 전담해서 감시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작업반에도 있고, 그 다음 군은 군대로 있고, 보위부는 보위부대로 있고 안전부는 안전부대로 나와있고, 나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총 6-7명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어디를 가든지 따라다녔다. 변소에 가도 따라왔다. 어떤 경우에는 집 주위에 텃밭에 강냉이를 심어놓았는데, 와사삭 소리가 나서 그곳에 뭐가 있는가 가만히 가보면 보위부 사람들이 숨어서 내가 어디로 가는가 무슨 얘기를 하는가 엿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이처럼 남과 북의 생활이 차이가 있는데, 지금 내가 옛날 이야기처럼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 그 때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차별대우를 받은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옛날에 아버지가 좀 잘살았다거나 논이 많아서 지주라거나 앞장서서 사람들을 선동한 사람들도 그랬다. 그런 사람들의 자식들은 천대받고 산다. 지금도 대학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한다. 북한에서는 그 사람들은 감시 받고 산다. 주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이라면 데모를 하면 데모한 학생만 붙들어 가면 되는데 북에서 만약 데모를 했다면 그 학생의 사돈의 팔촌까지 다 잡아서 정치법 수용소에 보내게 된다. 그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잘못했으면 그 사람만 잡아서 보내면 되는데 조그만 애들까지 다 잡아서 정치범수용소에 보내니 이건 정말 눈뜨고 못 볼 짓이다.

내가 실제로 목격한 일이 있다. 국군포로였는데, 충청도 사람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을 해방전사라고 했다. 해방 전사라는 게 바로 국군들 포로로 있다가 석방된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하루 저녁에 자취를 감추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신이 옛날에 잘살았다고 자랑을 좀 했는데 그게 어떻게 해서 보위부에 들어간 것이다. 그 말을 한 바로 다음날 도시락을 싸서 일나가는 길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짚차에 싣고 데려갔다. 그 후로 그 사람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나머지 가족들도 그 이튿날 어디로 실어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1. 당원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당원증을 받았으며, 고문을 당했다면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고문 받은 적은 없었다. 북한에서 나를 억류시킬 때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었을 것이다. 7명이나 억류되어있는데, 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고, 어떤 사람은 중학교 중퇴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전부 초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머리가 약간씩은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대개 북한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적화통일을 위한 대남 연락소 같은 곳에 보냈다. 나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정치학교에서 학생으로 3년동안 훈련받고 별짓을 다했다. 이것 저것 하면서 그 학교를 졸업했는데 결국 나는 대남 연락소에 있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선 사상적으로 낙후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7명 중 4명이 연락소에 머물게 되었다. 그 중에 지금 중앙당에 있는 사람도 있다. 강병일이란 사람이다.

나는 함남 함주군 선박 건조현장에 나가서 노동을 했다. 그곳에서 주로 선반작업을 했다. 이 사람들은 나의 사상만 바로잡으면 한국에 가서 내가 변절하지 않고 간첩활동에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를 사회에 내보내 결혼도 시키고 집도 배정해주어 살림도 할 수 있게 해주면서 계속 나를 감시하며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10번 이상 나를 찾아와 설득했었다. 승용차를 가지고 밖에 대기시켜놓고, 군보위부 군·당 사람들이 돌아보고 나의 건강도 이상 없고 사상도 이상이 없으면 바로 실어갈려는 태세인데 내가 계속 말썽을 부리고 하니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상적으로 덜 익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부적합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그냥 두게 되었다. 내가 입당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든 북한에서 나를 이용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나는 1986년에 입당했다. 그 때 중앙당에서 대남연락소 쪽에서 3개월 정도 있었는데, 그곳에 53명 정도 있었다. 이들은 몽땅 다 납북 어부들이었다. 강냉이죽만 먹어서 먹는 것도 부실했는데 석달 정도 이들에게 밥도 잘 먹이고 고기도 주고 해서 혈색을 좋게 해서 집에 보낼 때는 부인들 옷이나 아이들 옷을 줘서 보냈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면서 간부들이 하는 말이 "당신들의 운명은 당신들이 개척해야 하는데 사회에 나가서 왜 자꾸 말썽을 일으키려 하는가? 당신네들이 주먹이 세다고 해서 주먹이나 쓰고 일은 하지 않는가" 라고 했다. 결국 우리들이 사상적으로 바르게 서지 못해서 이런 현상이 나온다는 결론이 나왔다.

반면에 우리들은,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입당도 못하고 하는데 그게 무슨 하등 필요가 있는가" 라고 하자, 중앙에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래서 입당을 해서 써먹을 만 한지 판단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86년도에 입당하고 87년도에 정당 입당했다. 입당했는데도 3번 정도 공안에서 나를 찾아왔다. 어쩔 때는 내가 몸이 아플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싸움을 해서 공장간부를 때린적도 있었다. 그리고 점차 내 나이도 들어가고, 그 후에 식량사정도 나빠지고 그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그냥 생활하게 되었다.

2. 학교에서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교육이란 것은 너무 한심하다. 내가 배우지는 못했지만, 고등학교 마친 아이들이 알파벳 모르는 아이들도 있고 대학 나온 아이들이 기본적인 회화도 안된다. 그게 무슨 대학생인가. 이러한 현상은 다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오직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사업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따져보면 4시간 강의 들었다면 2시간은 김일성 김정일에 관한 내용이다. 그 다음은 역사라든가 수학, 국어 등을 가르친다.

그 뿐만 아니라 인민학교 3학년만 되어도 봄에 농촌을 지원 나가게 된다. 지원 나가서 식량증진을 뛰게 되는데, 약 한달 정도 강냉이 이식을 하고, 이게 다 끝나면 다시 돌아가서, 가을이 되면 콩이나 볏단 수확을 나간다. 그 다음에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 전문적으로 1년에 3개월 4개월 동원된다.

그것은 둘째치고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것도 많다. 학생들을 불러다가 도로 닦기를 하고 이런 저런 일을 다 시키게 된다. 따라서 아이들이 공부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대학생의 경우에는 1년에 교도대 훈련이 약 6개월이다. 그리고 모내기가 적어도 2-3개월 지속된다. 심는 것부터 시작해서 김까지 다 매주기 때문에 3개월 정도 소요된다. 가을걷이하면 1개월이다. 그렇게 해서 다 계산하면 1년에 학습이 대부분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제대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나머지 시간이 있는 것도 김일성 위대성 독창성을 가르치느라 실제 사회에서 사용 가능한 학습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학생들을 보면 인민학교 2-3학년정도에 담배를 피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아무리 못피게 하려해도 안된다. 내가 처음 가서 대남 연락소에 3년 동안 훈련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는 내가 나이도 28살 정도의 젊은 시절이라 주먹도 쌨다. 어느날 길을 가는데 중학교 1-2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나에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했다. 무엇하려고 그러느냐 물으니 담배를 피우려고 한다고 했다. 그래 내가 발길로 차버렸다. 그래서 그 아이는 시궁창에 나자빠져서 울고있었다. 나는 너무 괘씸해서 그냥 길을 가는데, 뒤따라오는 사람이 하는 소리가 애를 차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그래 나는 왜 그랬는지 그러면 그 애한테 물어보고 와서 얘기하자고 했다. 그 애가 나에게 담뱃불을 달라고 해서 너무 괘씸해서 때렸다고 말하고,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게 정당한가 라고 말하니, 그 사람은 그래도 그렇지 그런다고 애를 때리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오히려 그 아이를 역성드는 것이었다. 전반적인 사회의 흐름이 다 그렇고 하니깐, 다른 어른들은 담배를 못피워서 길길 해도 그 애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하얀 담배를 구해서 다 피운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아이들 교육은 제로다.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몇 년 몇 십년 못가서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소리를 보위부에서 안들었기에 나를 잡아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3. 북한 주민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경계대상은 되지 안았는지.

주민들은 괜찮다. 자기가 믿을 사람들은 있다. 그런데,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은 다 통하기 마련이다. 북한사람들이 다 나쁜 것이 아니다. 나쁜 사람은 간부들이다. 또 군·당·보위부·안전부·행정위원회·검찰서 이런 사람들은 우리들의 적이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다 우리들과 이야기하면 통한다. 자기들도 생활이 어떻다고 말하고, 자기네들이 먹을게 있으면 함께 나누어 먹었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먹는 그런 정서는 다 있었다. 그러한 인정은 북이나 남이나 다 같다. 그런데 간부들이 문제다. 그 사람들은 얍상하기 그지없고, 안전원들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 여보시오 이렇게 존대하는 법이 없다. 이 새끼, 저 새끼라고 욕을 한다. 그 사람들은 욕이 아니면 일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 당에 가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군당무원 최고통치자라고 해서 고함이나 치고 앉아있지 다른 게 나올게 없다.

4.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반대움직임은 없었나.

그런 것은 보지 못했다. 1998년 7월 25일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였다. 북에서는 그 선거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약에 선거장에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한다거나 뭐가 잘못되면 그 사람은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이전에 그런 일이 없었는데 98년에 그 선거장의 김일성·김정일 사진에다 먹물을 뿌리고 꽃바구니를 걷어차고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함흥에서 세건 정도 있었고 함경에서도 한 건 있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발각되면 아무도 모르게 붙잡혀 사라지게 된다.

5. 납북 어부 중에서 7명이 잔류했는데, 북한에서 나름대로 목적이 있어서 잔류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잔류한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일을 하며 생활했고, 북측에 어떤 도움이 되는 일을 했는지. 즉 북에서 납북자들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여 어떠한 것을 얻었는지.

납북된 사람 중에서 중앙당에서 근무한 사람이 세 명있었다. 그중 한사람은 중앙당 대남연락소 후반부 지도원을하는 강경일이라는 사람이고, 두 사람은 한국을 드나드는 일을 했다. 정치학교에서 남조선 정치부, 즉 남조선 교육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생활은 좋았다. 그 사람들은 당에서 고기도 제공해주고, 다른 사람은 친인척 집에 가지 못해도 그 사람은 다 보장해주고, 사탕도 다른 북한사람들은 먹지도 못하지만 그들 집의 냉장고에는 사탕이 있었다. 그들 생활은 기탄 없이 했다. 사회에 나간 사람이 있는데, 사리원의 기계공장에서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한 명 있고, 다음에 사리원에서 의대 졸업하고 외과 의사로 근무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사람들도 가보니까 생활이 괜찮았다. 시골에서 무슨 수술하자면 외과의사선생님 손을 빌려야 하기 때문에 가게에서 술이라도 좀 갖다 주고, 이래저래 갖다주기 때문에 생활하는데 기탄이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자유가 감시당하는 것 같다.

나도 북에 있을 때 한 번 집을 지었는데, 당비서가 와서 한다는 소리가 "저 사람이 무슨 힘이 있어서 집을 짓는가, 친척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힘이 있어서 집을 짓는가" 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안전원에게 내 뒤를 캐보라고 하고, 위협을 주었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고, 어떻게 처리할지 알기 때문에 회의가 끝나고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서 말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나를 잡아먹지 못해서 그리 하는가. 만일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한다면 나도 당신에게 할 말이 많다. 내가 그것을 중앙당 지도원에게 그대로 보고하겠다." 라고 하니까, "무엇 때문에 그리하겠는가" 그래서, "당신이 입당시켜준다고 해놓고 여자를 몇 명이나 희롱하지 않았느냐" 라고 막 터놓고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입당시켜준다고 말하고 그랬었다. 실제로 그 일이 여러 사람에게 들켰었다. 그 사람은 거의 색마였다. 작업장에 들어가서 희롱하는 장면도 여러 사람이 보았었다. 내가 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자. 그 다음부터는 집 짓는데 기술자도 보내주고 차도 대주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다. 그렇게 나는 정치학교에 다녔던 것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2001년 2월 이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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