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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마음을 열면 사랑이 보여요 - 정은주

작성년도 : 2004년 63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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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면 사랑이 보여요

- 정은주

 

 

마음을 열면 사랑이 보여요

 

프롤로그

 

19985월 어느 날 새벽.

 

국경지역은 아직도 동장군의 기세가 채 가시지 않아 두툼한 동복을 입은 채 삼촌 등에 업혀 2시간에 걸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금방 끝날 것만 같았던 중국생활은 결국 4년에 걸쳐 이어졌고 이제는 포기하려 할 때쯤, 우리 가족은 희망을 찾아 남한으로의 새로운 여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조사를 받고 하나원에 입소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나와 같은 어린아이들은 밖으로 나가 근처 학교에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은 열네살 어린 탈북 소녀에게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하나원을 퇴소하고 난 뒤 막내삼촌 가족은 강원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전주로, 이모는 부산으로, 그렇게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주택을 배정 받았고 어머니와 나는 서울에서 살게되었습니다.

 

상처뿐인 초등학교 생활

 

사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96년부터 시작된 식량난으로 온 가족이 하루한끼 먹고살기도 힘든 판국에 학교는 저에게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난 200294. 학교라고는 다녀 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나이 덕분에 초등학교 6학년부터 다니게 되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친구들이 학교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새 출발에 대한 기쁨으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러한 기쁨과 기대도 잠시, 친구들보다 나이는 두 살이나 더 먹었지만 학교근처에도 가보지도 못했던 내가 최고 학년인 6학년생으로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기에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란 내겐 너무 벅찬 일이었습니다. 숙제는 자습서를 베껴 가는 게 고작이었고 수업시간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어서 당연히 시험을 보면 항상 꼴등은 바로 나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일은 바로 같은 반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마치 미지의 세계에서 온 외계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너 정말 북한에서 왔니?”, “북한에 진짜로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어?” 라는 질문을 비롯해서 너도 굶어 봤느냐, 그래서 주워 먹어 봤느냐?” 는 등 상대방을 배려함이 전혀 없이 거침없이 나오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여서 하루도 울지 않고 보낸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나는 마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던 순진함을 비로소 벗어내고 이제는 상대에 대한 배려 없는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진실도 숨겨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는 학교에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북한 사투리를 쓰는 것조차 아이들에게 눈치가 보여 점점 내 말수는 줄어만 갔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 학교생활, 그것은 나와 아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과 어색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애가 북한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북한사람들을 왜 우리 나라에서 받아주고 돈까지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나뿐만이 아니라 북에서 온 사람들 모두를 우롱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힘들게 참아 왔던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 책상에 있던 샤프를 그 애에게 던진 후 자리에 엎드려 울고 말았습니다. 내가 울어 버리자 멋쩍은 그 애는 자리를 떠버려 상황은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지만 난 분한 마음에 오후 내내 자리에 엎드려 계속 울었습니다.

 

나를 울게 한 아이는 온 종일 벌을 받았고, 선생님은 우는 나를 달래려고 애쓰셨지만 내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 후 우리 반에서 내게 시비를 거는 아이들은 없어졌으나, 북한에서 온 나를 대하는 분위기는 그 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태어나 처음 다니는 학교,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내게 있어 이런 친구들과의 관계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왕따를 딛고 또 다시 출발

 

그렇게 힘들게 1년여의 6학년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방학을 맞았습니다. 뒤떨어진 성적으로 고민을 하던 나는 북한아이들을 위한 계절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중학교 입학을 대비하여 더욱 열심히 공부할 각오로 임했지만 워낙 공부에 대한 기초가 없던 터라 거기에서도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북한인권지원센터... 그곳에 있는 자원봉사 선생님에게서 영어와 수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의 상담 끝에 창피하지만 영어는 알파벳부터, 한글은 읽고 쓰는 것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배우고 싶은 의지가 너무 강해 부끄러운 것도 잊은 채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나의 창피함을 무릅쓴 이러한 노력은 새롭게 출발하는 중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와 다른 환경을 만들고자하는 내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학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밤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선생님에게 전화하여 물어보았고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밤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짜증 한번 내지 않으시고 친절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마운 저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중학생은 달라요

 

눈물과 한숨으로 힘겹게 보낸 초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교복이 조금은 귀찮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처음 입어보는 교복이라 비로소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들뜬 기분은 새로운 출발에 대한 나의 각오를 한층 높여 주었습니다. 좀더 힘을 내야지!!

 

초등학교에 같이 다녔던 아이들이 대부분 같은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내가 북한에서 온 아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 그런가? 친구들에게 나는 더 이상 미지의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와 달리 북한에 있을 때 굶어보았느냐는 식의 유치한 질문도 없었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이 없어지자 나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성적이 많이 오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한 덕분으로 이제는 제법 수업시간에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는 되었고, 늘 혼자였던 내 옆에는 어느새 수다를 떨며 웃고있는 친구들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고치고 싶었던 나의 북한말투를 서울말로 바꾸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나에게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행복한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대로 세상을 버릴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요? 방황하던 내 학교생활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무렵, 아직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또 다른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와 보니 컴퓨터가 깨져 유리파편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고 어머니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면서 울고 계셨습니다. 내가 한때 아버지라고 불렀던 어머니의 남자친구가 한국에 와서 함께 했던 둥지를 박차고 나가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계속된 어머니와의 갈등은 아직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도 벅찬 나에게 또 다른 짐을 안겨주었고 결국은 나를 아파트 옥상에까지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옥상 위에서 내가 살아온 길을 다시 돌아보니 눈물이 펑펑 났습니다. 목숨을 건 탈북 여정, 나의 노력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 내가 힘들게 이루어 놓은 어려웠던 학교생활, 나를 도와주시는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 모습.....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떠오르면서 차마 뛰어내릴 수 없었습니다.

 

이건 아니야!! 반드시 나에게도 행복한 순간은 올 거야. 따뜻한 봄날은 올 거라구.... 그러니 힘내 은주야!”

 

그렇게 혼자서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짧은 순간이나마 죽음까지 생각했었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웠습니다.

 

마음을 열면 사랑이 보여요

 

그렇게 힘겹게 2학년을 맞았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은 변하는 것일까요? 드디어 내 마음에 들어오는 담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때로는 아주 무섭지만 쾌활하고 화끈한 성격이 너무 마음에 들었으며 나를 진실로 대해주는 선생님의 눈빛에는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믿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세상을 보니 선생님의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제가 못하는 점이 있으면 눈물이 날 정도로 꾸짖으셨지만, 그런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저의 모습을 예쁘게 봐주셨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려 애쓰는 선생님이 이렇게 계시는데 여기에서 포기하면 선생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해서 더더욱 열심히 공부하려 애썼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자 모르던 영어단어도 조금씩 알게되었고, 시험 때 선생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공부하다 밤을 세우는 날도 늘어났습니다. 발표하러 앞에만 나가면 덜덜 떨기만 하던 내가 두려움 없이 발표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성적이 오르는 재미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유치원 밖에 나오지 못한 저로서는 이런 나의 변화된 모습이 스스로도 쉽게 믿어지지 않지만 분명 저는 그렇게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제 자신이 더 잘 알기에 더욱더 노력해서 저를 도와주시고 기대하고 계시는 선생님들께 보답하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 나의 희망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변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라고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알고 있어야 할 도리와 지켜야 할 예절까지 가르쳐주시는 우리 선생님 같이 훌륭한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의사든 변호사든 누군가를 도우려고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일하면 항상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이제 북한을 떠나온 지 7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동안 저는 참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는 않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려 합니다.

 

2004. 12월 정은주 씀

 

 

2005-03-14 09:59:59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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