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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초심

작성년도 : 2016년 75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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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온지 이젠 10년이 다 되어간다.

아직도 내 삶은 정착이나 안정이라는 단어와 멀리만 느껴진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를 생각하면 빨리 자리를 잡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불면증에 시달린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다시 일어나기 위해 자신을 달래고 채찍질할 때 힘이 되어주는 것은 역시 고향에 대한 생각이다

나는 북한의 문화 체제 속에서 성장하였고 다른 이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조용히 살던 평범한 주부였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 가족이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되고, 가족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면서 나는 살길을 찾아 남한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끈질긴 노력 끝에 북한을 탈출 할 수 있는 길을 안내 받을 수 있었으나 처음부터 고난이었다.

두만강도 건너가기 전에 우연히 마주친 보위부지도원에게 붙잡혀 나는 곧 쇠고랑 신세가 되었고 변기가 바로 옆에 있어 냄새가 심한 국경의 비좁은 감방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면서 하루에도 몇번이고 그들에게 불리워 나가 고역을 치루어야 했다.

기본적인 취조를 마치고 고향의 보위부기관으로 호송되는 과정에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열차에서 뛰어내릴 때 다친 다리의 고통을 참으며, 찢어진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옷으로 닦고 싸매며 정신 없이 산으로 강으로 두만강을 향하여 걷고 또 걸었다.

피로에 지쳐 조금 쉴 때면 나 때문에 가족들이 반역자의 가족으로 낙인이 되어 온갖 고생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차라리 새 삶을 찾아가다 죽는 것이 낮겠다고 생각하면서 밤낮으로 걸었다.

그러다 보니 길가에서 먹을 것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나는 거의 쓰러질 것 같았다.

이때 부전의 산골쪽으로 지하족과 감자를 바꾸러 가는 가족일행을 만나 천만다행으로 아사직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감방에서 고생하고 삼일 동안 산으로만 걸어온 처참한 내 행색을 바라보던 아주머니가 자기들이 먹던 속도전가루떡을 권하고 마실 물도 내어주면서 그 산을 넘을 때까지 같이 가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낮에 고생을 했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야생짐승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앙상한 나뭇가지에 몸을 숨기고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한지에서 지내야 했던 밤은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다.

이런 나에게 그 가족일행은 구사일생의 은인들이었다. 그날 한달 만에 처음으로 온돌방에서 몸을 편히 뉘이고 잘 수 있었다.

감방에 있으면서 몸에 퍼진 벼룩과 이가 밤새 나를 물고 뜯었지만 산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산에서 자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더운 온돌방에서 자니 그 동안 얼어있던 상처자리에서 피물이 고여 나오고 발이 퉁퉁 부어 올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가족도 빨리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나는 그 집에 하루만 더 머물기로 하고 그 사람들과 헤어졌다.

몸에 지녔던 돈을 내놓고 조금 더 편한 방으로 옮겨갔지만 이내 붙잡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편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주인한테 약을 사서 한줌씩 입에 털어놓고 다리를 움직여 보면서 최소한 몸이 움직일 수 있으면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렴풋이 잠들었던 나는 개가 짖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그리고는 여사여사 알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그 집을 나와 산으로 달음박질 했다.

한동안 정신 없이 달리고 나서야 두만강을 향해 다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하였다.

한참 걷고 나니 큰 마을들이 보이고 국경초소들이 나타났다.

저 멀리서 군인들이 총을 메고 마주 오는 것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세워놓고 신분증을 보자고 하면 그때는 끝이라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은 나를 곁눈질해서 보더니 그냥 지나쳤다.

나는 큰 마을도 앞으로 지나지 않고 산을 통해 우회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산으로 올랐다.

발은 부르트고 피가 엉켜서 신경이 거의 무디어진 것 같았고 손도 가시덤불을 헤치느라 다 찢기어 여기 저기 피가 말라붙어 있어 보기에도 끔찍했다.

이렇게 며칠을 걷고 또 걸어서 겨우 두만강을 끼고 있는 시가지에 무사히 왔다.

시장에 가서 중고 옷을 사서 입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야 이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을 찾아갔다.

돈이 없으니 두만강을 건너갈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도 못하고 그냥 감시가 없어 건너갈수 있는 길목 정도를 알려달라고 하고는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무시무시한 도로의 초소감시를 벗어나 겨우 주인이 가르쳐준 쪽으로 가보니 절벽이었다.

춥긴 하지만 얼음이 녹아서 여기저기 물이 흐르고 절벽이라 깊은 곳이어서 굉장히 위험한 구간이었다. 그래서 감시가 덜한지도 몰랐다.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풀 덤불에 몸을 숨기고 밤이 되길 기다리던 나는 차라리 낮에 건너가는 것이 위험이 덜하다고 생각되어 강물에 주저 없이 발을 디뎠다.

기슭의 얼음은 다 녹아서 물이 사품치며 흘렀지만 무조건 건너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별 생각 없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절벽이라 해도 기슭이 그렇게까지 깊은 줄은 몰랐다.

두세 걸음 옮겼는데 몸이 물속으로 쓱 들어가고 중심을 잡지 못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으로 옆의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을 손톱으로 후볐지만 허사였다.

이젠 죽었구나 하고 출렁이는 물과 얼음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얼음을 잡고 올라갔는데 천만다행으로 몸이 얼음위로 올라가졌다.

얼음이 갈라질 것 같아 서서 걷지 못하고 찬 얼음 바닥을 기어서 한걸음한걸음 건너갔다. 그렇게 해서 중국 쪽 강기슭의 뚝에 있는 이름 모를 풀을 보았을 때 강을 무사히 건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아 내가 과연 살았나 하고 살을 꼬집어보고 처음으로 하늘에 감사했다.

입은 옷이 꽉꽉 얼어붙고 머리칼에 작은 고드름이 매달리고 손발에 통증이 와서 온몸이 떨리고 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날 바람은 왜 그렇게 불어대는지, 그렇게도 처참하게 고향을 떠나는 내 마음의 통곡소리이기도 했다.

반대편의 벌거숭이가 된 고향의 산을 바라보면서,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월경도주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저 북한땅을 다시 밟을 수 있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한참 소리를 죽여 울먹이었다.

고향에 남은 가족들이 받아야 할 처참한 고통과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이 땅을 다시 밟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마음에 온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남한으로 오는 길은 참으로 멀고 험했다.

배고픔에 지쳐 쓰러지기를 몇 번이고 길가에서 만난 은인들은 몇이었던가,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찾아온 자유의 땅인가, 비행기에서 내려 남한에 들어왔을 때 그 격세지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나원에서 석달간의 교육을 받고 나온 날 나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지옥과 세상을 오가면서 얼마나 힘들게 온 길인가, 그러니 몇 배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남한에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나에게 하나원에서 새벽기도 때 친해진 십 여명의 탈북자가 전 재산이었고 정부에서 준 임대주택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처음으로 접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나는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고 특히 돈만 있으면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 빨리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직업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에서 정보가 부족한 나에게 좋은 기회는 오지 않았다.

교회에 나가도, 여기저기 모임을 나가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고 어느덧 이 사회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고 이세상 누구라도 쉽게 가질 수 있는 불평불만을 안겨주었고 허황된 망상과 허영심에 찬 나에게는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았다.

공부를 해서 남들이 다니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려고 생각했지만 설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쉽게 되는 일이 없었다.

가장 한심한 것은 처음 남한에 왔을 때 감격과 감사를 다 잊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남한으로 온 뒤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또 사회에 나와서도 처음에는 앙상한 나무처럼 빈손으로 온 우리를 동포로, 국민으로 맞아준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던 것이 일이 뜻대로 되어가지 않고 고난이 계속되자 마음속에는 원망과 불만이 가득 차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계속되다 보니 되는 일이 없었고 나의 몸은 지치고 망가졌다.

대어놓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의 선입견 때문에 괜히 내가 먼저 상처받고 우울해지는 일이 많아졌고 통일의 가교로서의 사명감으로 할 일을 모색하던 가슴은 점차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차버렸다.

실망감으로 가득 찬 나의 모습이 이세상에 곱게 보일리가 없었고 그러다 나니 되는 일도 없었다.

이처럼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낮설은 이 땅에서 허송세월 했고 결국 남은 것은 피폐해진 정신과 육체뿐이었고 그런 와중에 1년동안 시름시름 앓으면서 밖에 나가보지도 못하기도 했다.

통일을 위해 뭔가 한다고 여기저기 이름을 올리다가 갑자기 앓아 눕고 하니 같은 탈북자들로부터 지금 뭘 하고 있냐, 잘났다고 그러더니 힘들어졌다,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식의 말을 듣고는 세상에 나 하나 남은 것 같아 나는 혼자 병마와 싸우면서 연락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나를 끝까지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따뜻한 사랑으로 나를 찾아 위로하고 용기를 주셨고 폐인이 되어 누워있던 내가 다시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셨다.

북한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분들이지만 오로지 통일을 바라면서 탈북자들을 통일을 위해 먼저 온 사람들이라고 격려하고 아껴주신 그분들께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허황된 꿈이 아니라 실지로 이 땅에 착실하게 정착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몸이 많이 약해져서 자주 약을 먹고 병원에 가야 했지만 허황된 욕심을 내려놓고 작은 것에 감사하면서 하나하나 이루어가려고 마음먹고 노력하니 건강도 차츰 회복되어가고 이제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가는 길이 생각처럼 평탄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지 않는다 해도 낙심하지 않고 한걸음씩 간다면, 이세상은 살아가기에 꽤 괜찮은 곳이라는 것을 느낀다.

아직 내 삶은 누구에게도 작은 도움도 줄수 없을 정도로 성공의 문어귀와는 아주 멀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거부기 걸음으로 조금씩 갈지언정 바른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진행형이라고 생각하고 매일매일 감사기도를 하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여기에 와서 받은 사랑과 도움을 주위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수 있다는 걸 확신하기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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