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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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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2008년 부푼 마음과 기대를 품고 한국에 왔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 자상하고 멋지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음도 잠시였다. 공항에 도착하니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를 마중 하였다. 그 분들은 친절하게 우리를 어데론가 버스로 데리고 함께 이동하였다. 함께 한동안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우리를 조사하는 조사기관이였다. 나는 인복이 참 많은 것 같다. 같이 온 사람들 중 내가 나이가 가장 어렸다. 중국에서부터 오는 길에 아주머니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조사기관에 도착해서도 좋은 조사관을 만났다. 조사받을 때 조사관은 나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줬다. 세상사는 법부터 시작해서 이사회에 적응법을 알려주었다. 조사관은 나에게 대학만큼은 꼭 가길 바란다고 했다. 사회를 알고 이해하려면 대학정도는 졸업해야 된다고 했다. 이제 공부안하면 나이 들어서 공부 못한다고 라고 했다. 10년 고생해서 30년은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조사기관에서 조사를 다 받고 나와서 하나원에 가서 그 말을 이해했다.

20일이라는 조사기관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하나원으로 갔는데 난 미성년자여서 한계레라는 대안학교에 가게 되었다. 공부하는 학교니 공부를 참 열심히 할 줄 알았지만 반대였다. 여러 가지 문화체험도 참 많이 했다. 추운겨울 1월에 강원도 가서 래프팅도 하고 겨울에 래프팅 오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1월의 물은 두만강 물보다 더 차가웠다. 차가운 물은 한국에 대한 상상을 모조리 박살내버렸다. 따뜻한 집, 그리고 돈 이 모든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1월의 물만큼 한국 사회는 정말 차갑게 느껴졌다.

시간은 흘러 하나원 퇴소날이 가까이 다가왔다. 학교선생님들은 나를 학교에 남으라고 권했다. 그것도 매우 적극적으로 권했다. 학교의 자연환경은 두말할 필요 없이 공기가 좋았다. 그래서 난 한국에 먼저 온 이모에게 학교에 남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이모는 남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 자연환경은 좋은 학교지만, 내가 한국 사회를 배워야 할 점이 많은데 있어서는 그 학교가 적당하지가 않았다. 산속에 고립되어 있다 보니 정보를 접할 수가 없었다. 그 안에 있는 동안 내가 배운 거라곤 사회정착이 아닌 너희가 하나원 퇴소해서 나가면 친인척들이 우리가 받는 정착금 다 빼앗아 쓴다는 또 다른 주입식 교육을 했다.

난 사실인줄 알았다. 교육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떠한 친인척들은 아이들의 돈을 빼앗아 쓴 사례가 있으니 그 선생님들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그곳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그냥 나만의 세상에 갇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모의 권유대로 이모집에 왔다. 십몇 년을 같이 살긴 했지만, 한 번도 얼굴본적 없는 이모부 어찌 대해야 될지 고민이었다. 그 고민도 잠시 헐 이모가 날 알아보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너무 뚱뚱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뚱뚱했기에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지금 그때 사진을 보면 나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다. 1년간 이모의 도움으로 그 동안 내 몸에 붙어있던 지방덩어리 들은 다 사라졌다. 뭐 쉽게 생각해서 77사이즈에서 55사이즈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이어트를 하고 나니 세상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북한사람이어서 때로는 상처와 무시 그리고 사랑도 많이 받았다.

 

상처와 무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왔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사장은 북한사람과 일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하면서 흔쾌히 일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직원의 태도는 달랐다.

처음부터 그 직원의 태도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난 일시작하기 전에 사장님한테 북한에서 온 거 다른 직원들한테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직원을 속이는 느낌이 들어서 몇 개월 후 내가 어디서 왔는지 말했다. 말하기 전에는 막대하지 못하던 직원이 북한에서 왔다고 하지마자 3분도 안돼서 나를 무시하는 언어들이 막 나왔다. 나도 성격이 그렇게 순하지 않는 편이여서 한 마디 했다.

사람 함부로 무시하지 마요라고 한마디 했다. 그래도 북한사람에 대한 무시는 끝나지 않았다. 단순히 북한에서 태어났다고 무시받기는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직원에게 상처를 줬다. “언니는 30살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난 19살에 똑같이 알바 하는 사람끼리 사람 무시하지 말아요.” 라고 말했다. 이 말을 하고 난 후부터는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다.

내가 일했던 편의점은 유독 장사가 잘됐다. 하루 매출이 300만을 넘었다. 그래서였는지 건물주인은 권리금을 더 받고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내 주었다. 사장님은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 거기서 성실하게 일한 덕에 사장님은 길 건너편 친구가게로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면접도 보지 않고, 새 사장님을 만나고 그 다음날부터 바로 일하게 되었다.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사장님도 유별났다. 매장 청소를 안 한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하지만, 공부를 안 하면 꼭 욕했다.

딱히 공부가 아니어도 책이라도 보라고 하셨다. 한국에서 정착하고 살려면 공부는 필수라고 하면서 많은 격려도 해주었다. 내가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국정원직원들 입에서는 욕이 나왔지만, 그 반대인 사람들이 있어서 나한테는 정말 다행이었다. 친구사장님도 참 유별났다. 이 사장님 역시 내가 공부를 안 하면, 한마디 했다. 대학교 입학했다고 용돈 주는 사장님은 그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사장님의 정겨운 한마디…… 공부 안 해요?” 근데 두 사장님 두 분 모두 반말한번 안했다. 꼭 이름에 를 붙여서 막말한번 안했다. 나는 처음에는 한국사람들이 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살아보면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두 사장님은 신사였다. 무시도 받았지만, 이런 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 때문에 무시하는 사람들을 더는 의식 할 필요가 없어졌다. 처음에 무시 받았을 때는 말 한마디 다 의식하면서 나만의 열등감에 쌓여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원 나와서 2달도 안돼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오전에는 컴퓨터 학원들 다녔다. 그렇게 해서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또 이모의 추천으로 서울에 있는 대안학교에 들어가서 8개월 동안 대학입시 준비를 했고 그 다음해 2011년 대학생이 되었다. 대안학교를 다니는 동안 열심히 영어 과외를 받았다. 1년 동안 과외를 받은 것이 대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년 동안 중등영어 3년 과정을 초고속으로 배웠다. 마스터는 못했지만, 기본적인 문법체계만이라도 공부하고 대학교 가는 것이 내 목표였다. 대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공부를 쉽게 생각한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중국어를 잘 해서 중국어 학과에 갔지만, 난 중국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어서,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중국어 학과를 갔다.

그래도 기본적인 글은 읽고 해석 가능하니 나 정도면 1학년은 별 문제없겠지 생각했는데, 헐 동기 70%가까이 중국유학경험 3년 이상이었다. 난 또 거기서 또 한 번 힘이 쭉 빠졌다. 그래서 매일저녁 집에서 1시간씩 병음 공부와 드라마를 1년은 거의 매일 봤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1학년 1학기 성적은 그다지 나쁘지 않게 나왔기 때문이다. 내 노력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어떤 탈북대학생들은 대학교 들어와서 성적이 나오면 장학금 신청해서 받을 수 있는 걸 난 대학교 들어오기 전에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장학금만으로는 부족했다. 북한에 계시므로 나는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난 북한에 부모님이 계시는 부모님께 1년에 두 번 정도는 돈을 보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말이 1년에 두 번이지 북한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서 1년에 몇 번씩 올 때도 많다.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부모님은 정말 돈 귀신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껴서 조금씩 모아노면1달이 안돼서 영락없이 전화가 꼭 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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