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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순자야, 한국생활 재미있니!" - 박순자

작성년도 : 2005년 66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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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야, 한국생활 재미있니!"

- 박순자

 

 

순자야, 한국생활 재미있니 !

 

 

시간과의 전쟁

 

여느 탈북자처럼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내가 학원에 다니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하나원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나에게 많은 조언과 관심을 보여주시던 선생님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순자야, 내가 일자리 하나 봐 놓은 게 있는데 해보지 않으련?”

 

그때 나는 일단 돈부터 벌고 보자는 마음에 아무런 지식도 기술도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볼 의향으로 선생님과 반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당시 나는 서울 생활에 익숙치도 않았고 지리도 어두운 상태였다. 지하철 타는 법이 서툴러 목적지와는 반대되는 방향의 열차를 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맸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약속장소로 달려갔다. 하지만 지하철로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짐작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약속 시간 보다 10분 가량 늦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개념 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여기서 시간 약속은 곧 신용이야.”

 

그까짓 10분 정도 늦었다고 그렇게까지 나를 야단치는 선생님이 무척 야속했고 서운했다. 내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잘 아는 선생님이 그 정도도 이해 못해주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역과 역 사이에 대략 2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줄 알았더라면 나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약속시간에 늦은 것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은 선생님 탓이라고 선생님을 속으로 원망하며 회사로 향했다.

 

좀 늦으셨군요.”

 

회사 관계자의 인사말이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몹시 죄송스러워 하시며 말씀하셨다.

 

아직 서울 생활에 익숙치 않아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절대 없을 겁니다.”

 

면접날부터 지각을 하는데 회사는 제 시간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때서야 나는 내 잘못을 깨달았다. 취직을 부탁하러 가는 중요한 면접에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한 것이 내게 얼마나 치명타를 줄 수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나 때문에 선생님께서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하지 않습니까.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라 생각해주시고 절 한 번만 믿어주세요.”

 

어느 드라마에서인가 이런 대사를 본 적이 있다.

 

미국 경영자들이 경제를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시간은 단 1분이다. 당신이 지각한 10분이면 미국경제를 다 말아먹고도 남을 시간이다

 

 

사회 첫 걸음

 

내가 취직한 첫 회사는 인형을 수입하는 조그마한 무역회사였다. 그곳에서 나는 재고관리 업무를 맡았다. 내가 하는 일은 인형 하나 하나 일일이 확인하고 품목과 수량을 기록하는 단순작업이었다. 남들 눈에는 간단한 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북한에서 영어와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영어로 쓰인 제품을 파악하기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서 영어가 얼마나 많이 쓰이는가를 알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외래어는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뜻인지 묻기도 하고 사전을 찾아가며 하나하나 배워나갔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었다. 사회 전반에 대한 기초지식과 교양을 습득했더라면 전혀 겪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그야말로 빈터에 집 짓자고 기둥부터 세우는 격이었던 것이다.

 

영어 사전을 창고에 가져다 놓고 단어를 하나 하나 확인해 가며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일을 마치고 나면 자정을 넘기기 일수였다. 어느날 일을 끝마치고 창고에서 자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어 눈을 떠보니 사장님께서 담요를 구해 와 덮어주고 계셨다.

 

일이 힘들지?”

 

사장님의 말씀에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순 없지. 짬짬이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게. 차근차근 하나씩 배워나가면 곧 적응할 수 있을거야. 이 사회에 적응하는 건 시간문제일세.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사장님의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가 너무나 고마웠다. 배우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는 탈북자라고 나를 몰아세우고 무시하진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그런 나를 포용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마음에 하루빨리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무엇이든 빨리 배우려고 노력했다. 하나씩 배워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더 큰 용기를 심어주었다.

 

순자야,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는게 어때? 여기서 생활하는 만큼만 한다면 대학생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좀 더 큰 포부를 가져봐. 어렵게 이 땅에 입국해 이만한 일로 만족하고 주저앉기엔 아깝잖아."

 

사장님의 이런 충고로 나는 대학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외국어에 울고 웃는 순자

 

대학 진학을 위해 회사를 그만 둔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잠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오전에는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오후에 파트 타임으로 제과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거야. 내년에는 꼭 대학생이 되야지!’

 

그러나 제과점 아르바이트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회사에서 영어를 어느 정도 익혔다고 생각한 것이 크나 큰 오산이었다. 빵 종류는 왜그리 많고, 그 이름은 또 어찌나 헷갈리고 어렵던지, 나는 회사에 있을 때보다 더 주눅이 들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직접적으로 상대해야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순자씨, 아직도 빵 이름하나 제대로 못 외우면서 어떻게 손님들에게 팔겠다는 거에요! 손님이 원하는 걸 바로바로 찾아드릴 수 있어야죠!”

 

카운터에 있는 직원한테 매일같이 꾸지람을 들었다. 북한에 있을 땐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귀하게만 여겼던 빵이 당시에는 철천지 원수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 회사동료들이 나를 믿어주었던 것을 생각하자. 이럴수록 더 빨리 배우고 익히는 수밖에 없어.’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격려해주었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렸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한 달 정도 되어서야 차츰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던 제과점은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어 외국인 손님이 많았다. 영어에 워낙 자신감이 없었던 나는 외국인만 들어오면 다른 곳을 바라보거나 괜히 물건을 정리하는 척하며 다른 직원이 상대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이런 나 자신을 볼 때면 나는 도대체 언제쯤 영어를 잘하게 될까하는 한탄만 늘어갔다.

 

그런데 중국인 손님이 갑자기 늘어가면서 내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입국전 잠시나마 중국에 체류했던 경험을 살려 중국인 손님이 올 때면 먼저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느낀 뿌듯함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이곳 사람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게 있구나하는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사장님은 중국인을 자연스럽게 상대하는 나를 보고 칭찬해 주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터득했다.

 

 

꿈과 도전을 위한 대학생활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적성에 맞는 학과에서 내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나는 북한의 학생들과는 달리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며 자유분방한 동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처럼 대학생활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수강 신청하는 방법부터가 북한과 전혀 달랐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렸다. 무엇을 들어야 할 지, 시간을 어떻게 배정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다행히 여러 선배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수강신청을 마칠 수 있었고, 1학년 내내 나는 선배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제2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했다. 전공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생활을 위해 욕심을 냈다. 새로운 학문을 접한다는 기대심리로 운영관리론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나는 열심히 수업을 들을 생각으로 교수님이 한시라도 빨리 수업 시작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교수님의 입에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들려오기 시작했다. 교수님께서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설마, 처음이니까 영어로 인사하시는 거겠지. 우리학교는 외국인이 많은 편이니까.’ 우리말로 수업할 때를 기다렸지만 결국 교수님은 수업시간 내내 단 한마디도 우리말을 하지 않았다. 기대했던 강의가 절망감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그 다음 수업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어 다음 수업 시간에도 출석했지만 수업 내용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오늘은 저번 시간에 이야기한 리포트 제출하고 나가세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리포트라니! 언제 그런 것을 내주셨나?’ 하고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다른 학생들은 리포트를 제출하면서 나가버렸다. 결국 나만 강의실에 덩그라니 남았고 나는 교수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곳에서 대학을 다니려면 영어가 필수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게.”

 

또다시 영어가 문제였다. 이제 영어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내가 꼭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 있으면 부담 없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게. 내 연구실은 항상 학생들에게 활짝 개방되어 있으니 모르는 문제가 있거나 다른 어려운 점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자네처럼 열의가 있는 학생은 대환영이야.”

 

교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은 나는 본격적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성가실 정도로 교수님을 찾아가 질문했다. 교수님은 수업에 대한 나의 열의를 보시고 그날 배운 강의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줄 정도로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

 

처음에 나는 무슨 큰 죄를 지은 듯 탈북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이라고만 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탈북자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거리를 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대학생활을 해나가면서 이러한 나의 우둔한 생각에 차츰 변화가 일어났다. 나와 같은 탈북자들이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수록 탈북자에 대한 인식이 보다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제 곧 나는 3학년이 된다. 대학생활의 절반을 넘어섰다.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어떤 고난도 넘어설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통일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부모님을 떳떳하게 만나 인사할 수 있는 그 날까지 나는 무슨 일이든지 끊임없이 도전할 것이다.

 

 

최고의 작품을 위하여

 

방학이라는 긴 시간은 내게 있어 소중한 시간이었다. 부족한 공부를 보충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아르바이트를 통해 사회경험을 쌓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불경기인지라 탈북자 신분으로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 저기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내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예전의 제과점 아르바이트 경험을 살려 판매 업종에 지원했다.

 

탈북자라구요? 탈북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다른 곳에서 알아보시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이곳 사람들도 힘들어하는데, 미안하지만 않되겠네요.”

 

이력서에 적혀 있는 북한 이탈 주민이라는 글자를 보고 나타낸 반응들이었다. 심지어는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고 아예 이력서를 더 이상 보지도 않고 내 눈앞에서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내 결심과 용기가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고 결국 거짓으로 이력서를 작성하고 말았다. 탈북자라는 사실을 숨긴 것이다. 그 덕분이었는지 나는 유명 백화점의 명품관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출근 첫 날, 나는 하루 종일 서서 발에 맞지도 않는 높은 구두를 신고 외래어를 써가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가며 고객들과 대화하는 데 힘썼다. , 상품의 종류, 사이즈, 특성 등을 종이에 꼼꼼히 적어 틈이 날 때마다 외우고 또 외웠다.

 

차츰 일이 익숙해지려던 어느 날, 곤경에 처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층장(層長)이 내게 영수증을 달라고 한 것이었다.

 

무슨 영수증을 말씀하시는 건지.”

 

고객의 서명을 받은 영수증이요. 이거 신용카드 거래잖아요.”

 

내가 신용 카드로 결제한 고객에게서 고객의 서명을 안 받고 그냥 영수증만 준 것이었다.

 

아니, 신용 카드 한 번도 안 써봤어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일을 그만두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다. 허위로 이력서를 작성하여 입사하였으니 회사에서 나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왜 탈북자라는 사실을 숨겼습니까? 일반인 같았으면 손실액을 전액 보상하고 당장 그만둬야 하겠지만, 그 동안 순자씨가 잘 해왔기 때문에 회사에서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요. 나중에 다른 회사에 취직하게 되더라도 지금처럼 행동하면 안돼요.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이 탈북자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순자씨를 지켜보고 있어요.”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크게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탈북자들에 대한 인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돈을 벌어야겠다는 편협한 생각에 나 자신을 속였고, 더 나아가 성실하게 생활하는 다른 탈북자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만 것이다.

 

나는 인생이 하나의 작품을 그려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의 그림을 지우개로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밑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잘못된 그림에 덧칠해 봤자 그림은 더욱더 망가질 뿐이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내 인생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 같다. 앞으로는 남들보다 더 예쁘고 아름답게 채색하여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승화시킬 것이다.

 

 

순자의 한마디

 

이 땅에, 나와 같은 처지의 탈북 청소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몸소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은 현재의 어려움만으로 미래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사회의 풍습과 문화에 하루빨리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짧은 생활이지만 나름대로 몸소 터득한 몇 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다.

 

1. 하루빨리 언어를 바꾸기 위해 힘써라.

 

2. 시간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3.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라. 시간은 금과 같다.

 

4.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마라.

 

5. 무슨 일이든지 당당하게 임하라.

 

6. 자신에게 있는 끼를 최대한 발휘하라.

 

7. 허황된 꿈을 버리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

 

8. 많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독서를 생활화하라.

 

9. 돈의 가치를 알되 돈의 노예가 되지는 마라.

 

10. 먼저 마음을 열어라.

 

이 사항을 명심하고 살아간다면, 자신을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성경 구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비록 우리 탈북자들의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노력하는 자에게 그 끝은 창대할 것이다.

 

20052월 박순자 씀

 

 

2005-06-13 10:22:28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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