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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의 꿈과 도전을 향해

작성년도 : 2020년 88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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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과 도전을 향해

 

허원재

 

 

 

20058월 어느 날 저는 인천공항에 대한민국의 첫 발을 내디디였다. 너무 감격스러워 어리둥절하지만 마중나온 사람들과 뜨거운 포옹을 하며 첫 만남을 가졌다. 저를 따뜻하게 맞아준 그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마주나온 대한민국의 얼굴이 였다. 생애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남과 북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고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 자유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인천공항에 내렸다.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북한의 주체성이 확연히 발현되는 인간 중심의 연속이며 지난 힘겨웠던 시절들은 하루 빨리 흘러 보내고 인생의 새 출발을 할 것을 권고하는 사람들도 수 없이 많다. 그럴수록 나에게는 더욱이 잊을 수 없는 삶의 추억이 있다.

 

6년이 지난 오늘에도 악몽 속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은 바로 3대 세습의 독재 하에서 태어난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다름 아닌 탈북자들이다. 이별을 이별이라 말할 수 없고, 죄안인 죄로 항변도 못하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무주고혼이 된 영혼들의 절규가 간간히 나의 귀전에 스쳐간다.

 

나의 과거, 지나온 한 많은 인생을 그대로 묻어두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그 빚이 많았지만 짓뭉겨진 청춘시절을 되돌릴 수 없는 원한은 그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었기에 미천한 글로 마음을 달랜다.

 

나는 단란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예능적 특기를 가진 목표가 뚜렷한 소년으로 인정받았다. 어엿한 성인으로서의 면모를 위해 운동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친구들 앞에 자랑을 뽐내며 꿈을 키워오던 사춘기 시절도 있었고, 왼손잡이의 전형적인 그림재간도 가지고 자랐다.

 

북한에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응당 군대에 나가야만 인간이 된다고 말밥에 올 리군 한다. 그 시절 나의 꿈은 군에 입대하여 꼭 사내다운 기질을 소유한 특수대원이 되는 것이었다.

 

썩 후에 안일이지만 특전사는 나의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투의 제1선에서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노동자, 농민의 자식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진실로 특전부대는 무산계급 출신으로 무어진 특수부대였다.(북한 도 군사동원부 계급구성 순위로 볼 때 제3부류 군 입대 초모대상자를 뜻함)

 

평안남도 덕천시에 군단지휘부를 두고 있는 북한군 특수부대인 폭풍군단 예하부대의 우뢰’, ‘벼락부대에서 근 15년간을 전사(사병)로부터 대대 군관(정훈 장교)로 청춘시절을 보냈다. 가끔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17살이면 아직도 부모님들의 슬하에서 어리광을 부려야할 나이다. 그 나이에 벌써 북한 청춘들은 독재정치 김정은의 3대통치를 위해 뼈물, 짠물을 산과들에 뿌리며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청춘시절을 고스란히 묻어야 했고 부모형제들과 처자들의 운명도 책임질 수 없는 무기력한 운명, 저질스러운 운명의 길을 강박 당한다.

 

그 당시 우리 군부대만하여도 3부자를 위한 충성경쟁이라면 인민무력부에서 ‘2전투훈련국의 제 일선에 서있는 부대’, ‘당원 하사관부대’, ‘통일의 척후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훈련으로 군인들의 체력을 소모하고 30세 이상의 군사복무조례 법을 야만적으로 만들어 꽃다운 청춘시절 연인들과의 아름다운 추억도 만들어보지 못한 채 충성기계, 인간병기로 전락되어 동족의 머리 우에 전쟁의 불 구름을 몰고 가는데 황혼이 되기를 맹신했던 부대이다.

 

이렇게 정신없고 철없는 사병생활과 황폐화 되는 사회의 현실들을 목격하면서 나에게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돈의 노예로 전락 되어가고 있는 일부지휘관들의 관행과 군 생활과정, 극심한 물자부족으로 병행한 급격한 전투력 저하의 현실적 모순들은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충분한 일화들이다. 또한 야회훈련 이동용 라디오, 무선기재 스피커를 통한 대한민국방송의 비법청취는 자유에 대한 희망과 갈망을 심어주었다.

 

이때로부터 나는 군단, 여단으로 오가는 출장이 잦은 정치부 직속사관의 특성을 이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일단 대대 쌀 창고와 장비창고에 비축해두었던 식량 100kg과 전투식량 초콜릿 5주야 분을 군관 사택 가족인 안 해들을 유혹하여 던져주고 뇌물을 만들어 군단 간부부와 보위 정치부에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훈련이 적고 돈을 벌기도 좋은 국경경비대 장교로 출세 시켜 줄 것을 부탁하였다.(당시 국경연선 경비대 확대로 특수부대 사관군인출신 들로 재직 군관 모집)

 

고난의 시기 군인들마음의 동요는 항변의 의지도 엿보였던 시기이다.

나의 부대에는 중대의 경리사관업무를 담당 수행하는 명준 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펄펄 나는 싸움꾼 기질을 갖춘 인재였다.

 

하지만 그는 고난의 행군(1994~연속)시작되면서부터 싸움군아니라 중대 경리 사관으로 후방일군의 역할을 도맡아 하여 심지어 그를 전투 단위 후방 부 대대장이란 호칭까지 가질 정도로 중대 군인들의 식탁은 항상 푸짐하여 군인들의 아낌없는 찬사 속에서 웃음꽃이 피군 하였다. 다른 중대는 하루 한 끼 죽으로 끼니를 에우는 운동이라고 중대군인 20%가 허약 군인이 발생하군 하였다. 여기에는 특수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희비극이다.

 

그에 대한 중대군인들의 평은 중대 맏형인 중대장보다 낮다! 군인들의 식탁이 항상 푸짐하니 훈련열의도 올라가고 전투력은 눈에 뛰게 다르다.” 한마디로 없어선 안 될 존재로 불렸다.

 

군인들의 식탁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고향 떠나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최소한 허약은 없어야 한다고 하면서 주둔지역 돼지를 잡게 되였고 이 일로 군민관계회손이라는 죄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군단 보위부에 끌려가 40일간의 취조를 받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야 하는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후에 안일지만 그는 자신이 책벌을 받더라도 중대가 전투력이 상승한다면 나는 더 바랄 것 없다고 하면서 주변농장 리당 당위원장들과 초급 지휘성원들의 집돼지만 골라가며 도살하여 중대 식탁에 고기를 보장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감방생활 기간 조사된 결과는 군복무기간 돼지 18마리를 도둑질한 이유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군복무를 더 이상 할 수 없고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는 소문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친구를 구원하기위한 중대 병사들의 싸인 작전이 진행되었다. 중대의 모든 군인들은 그의 잘못만이 아닌 자신들의 결함도 있다며 이사업에 동참하였고 중대장, 소대장들도 자진하여 당처벌을 받겠다고 해당 당위원회에 제기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압박이 있는 곳엔 반항이 있는 법이다. 군인들 식탁도 보장하지 못하고 훈련만 몰아대는 군부에 대한 자그마한 항변으로 표현하고 싶다.)

 

이 사건 이후 군인들의 물질문화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이러한 도둑질은 근근이 나타나 주민들의 마음을 불안케 하는 요인으로 되어버렸다.

 

여기에 참으로 웃지 못 할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대대 아침 점검이 시작 될 무렵이다. 아침검사에 한 병사가 도둑질 현장에서 잡힌 통 돼지1마리를 아기 업듯이 등에 메워가지고 대오 앞에 나타났다. 참모장이 병사를 돼지를 등에 업은 채 아침점검에 참가시킨 것이다. 온 대대의 웃음을 자아냈다. (북한 주민들은 군가 보라 우리를 보라 그러면 마음 든든하리라 지도자동지군대의 대목을 아무리 봐도 도둑놈의 군대라고 비평하고 있다.)

 

웃지 못 할 희비극, 북한 군 당국이 군인들을 귀한 아들, 딸로 생각 한다면 이러한 억울한 일들은 없었을 것이다. 군인들을 위해 밤낮으로 돼지고기를 보장한 경리사관을 구원하기위해 중대군인 집체 서명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인 행동보조였다. 그리하여 중대 경리사관의 사건은 부대 조종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부대에는 이 후 돼지상사라는 별호가 나돌았다.

 

군부대의 필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중대 군관들이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려 중대 군인들의 이른바 감시속에서 사업을 원칙적으로 전개 하지 못하는 현상들이다.

 

19954월 중대 1소대 부소대장 서00, 함남도 함흥시에 고향을 두고 있는 사관이 있었다. 이사관은 타격 목표만 생기면 무조건 성공하는 인물이다. 목표란 물론 군사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목표의 개념은 주민들의 생활환경침해의 도둑질을 대상으로 선정한 목표를 말한다. 훈련에서 연마한 기질과 자질을 도둑질에 이용하는 북한군의 현주소이다.

 

하루는 맹산군의 한 이당비서의 집(5)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군인이 있었다. 부소대장 서00이었다. 그는 우리 마을, 우리초소 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병사들과 함께 이당비서의 집을 방문 한 적이 있었다. 집에 김정일의 대회 선물 녹화기와 TV가 있는 것을 마음에 담고 있던 서00는 대낮에 소대 담배구입을 나간다고 중대장에게 이야기 하고는 시간을 받아 2시간 산발을 넘어 맹산군에 도착하였다.

 

그의 집을 감시하고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5층 베란다를 이용하여 침투한 것이다. 그는 녹화기를 비롯한 중기물품을 5가지를 노획하여 이미 연계취하고 잇던 시장 상인들에게 물건을 넘겨주고 당시 현금 3만원(북한 판매수익. 1g250012g 양이다. 한국 시세가100만원)을 돈으로 바꿔 중대장의 뇌물과 제대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사건이 드러나고 대대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 기간 그는 훈련에서 수직 수평 밧줄 타기 명수였고 싸움준비가 아니라 도둑질 하는데 그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사건 당일에는 2m길이의 나무 짝지바리를 이용하여 5층 베란다건물을 걸고 오르내려 탈출을 성공하였다고 한다. 물건들은 전부 집안의 이불 겉과 백포로 끈을 만들어 하강시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이 사건 이후 대대 훈련 참모회의에서는 시가전 훈련방법의 기본요소로 서00도둑행각에 이용되었던 동작을 전투훈련조법에 이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들이 출현 된 바도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기형된 상태에서 주둔 지역 주민들의 살림을 대상으로 훈련방법을 이용하는 꼴이 된 것 이다.

 

바로 1소대 부소대장 서00도둑기질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묵인하며 단독 파견 한 것도 중대 군관가족들의 생활난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군인들의 도둑질로 얻어진 돈과 물건들은 군관가족들의 생활에 이용되고, 중대의 전투식량과 기초식품, 간장, 기름까지 가족 살림에 빼돌려 군인생활에 실질적 타격을 주는 상황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지휘관들은 이렇게 물질 부족과 자금난으로 병사들을 비정상적인 현상들에 무원칙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오늘 북한군의 실상이다. 그러다보니 경제적 노예로 병사들의 눈치를 보게 되며 원칙적으로 군인들을 이끌어 나갈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남아의 기질로서 특수부대의 대원이 되기를 희망했던 북한 특수부대의 훌륭한 이미지였다. 이런 데로부터 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경제적인 실체만을 인정하게 되었고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부대 조종을 희망하게 되였다.

 

나는 1996년 직발(모범 사관을 장교로 진급) 군관으로 선발되어 강습을 마치고 정치군관으로 되었다. 수료당시 30명의 군관들 중 5명은 현 군단지휘부 간부 부 대상으로 결정되어 군단지휘부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군관들은 북한군 국경경비 총국 산하 중대 정치지도원으로 배치되어 갔다.

 

내가 정치지도원으로 배속될 당시 군부 내의 생활형편은 더 한심한 수준에 있었다. 그리하여 근 5년간을 병사생활 과도 같은 힘겨운 훈련과 군인생활의 어려움은 갈수록 심해갔다. 국가의 경제가 페세화 되고 황폐화되어 가는 나라의 모습에서 정치군관으로서의 원칙적인 교육은 바랄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정훈교육을 맡은 정치군관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교양할 수 없고 사회의 현실을 묻어 버릴 수 없는 직면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장교들 중 중대단위의 정치장교들은 정치부 조직지도원을 희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군관 군인들의 모든 생활과 사업을 종합지도 및 상급조직에 보고하고, 심지어 개별 간부들에 대한 평정까지 맡아보는 조직지도원의 중책은 누구나 탐내는 자리었다. 독재사회에서 부대군인들의 삶의 선택을 좌우지 하는 권력기구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당권력의 말단으로서 뇌물작전의 기본 직책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정치 장교를 선택함에 있어서 본신임무를 충실하고 군단 간부 부에 인맥을 넓히면 인사 발령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후 3년 기간 간부부에 문건이 여러 번 제출되었지만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인가 여단 정치부 총무 부서에서 업무사업 수행보조로 동원되던 도중 자신의 개인 자료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자료에는 외할아버지가 6,25전쟁당시 후퇴하면서 치안대 가담으로 마른나무 장작을 몇 단 가져다준 사실이 있었다는 문구가 눈에 뛰었다. 친형 역시 군복무를 마친 후 대학을 졸업하고 시 검찰청으로 입직을 시도하였지만 이유 없이 잘려나갔다는 이야기들이 상기되면서 나의 뇌리를 쳤다.

 

이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당에서 나를 써주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나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고 더 이상 군 장교생활을 필요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계급적 한계의 배신감으로 전율을 느끼며 다음해 전역 신고서를 내고 제대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은 계급적으로 성분이 문제된다면 간부사업에서 제외된다.

 

제대 명령을 받고 고향으로 가기 위하여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나온 10여년의 병사생활과 군 장교생활 5, 충성맹세를 부르짖으며 청춘을 다 바친 33세의 노총각이 지금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가지고 있는 사품이라야 겨우 겨울동복(경보 동복)1, 군 관복, 야전가방, 여단 재정과 에서 주는 제대비용 3000(당시 쌀15002kg)이 전부이다. 15년 세월 산과 들을 넘나들며 뼈아픈 현실들을 고스란히 안고 바쳐온 당원증 1개가 군사복무의 전 생을 걸고 지나온 흔적이었고 그 명예를 안고 고향에로의 발걸음을 향한다.

 

돈 한 푼보다 못한 원한의 당원증을 몸에 고스란히 품은 채…….

 

제대되어 고향에 와보니 그나마 특수부대복무 군인 혜택이라며 고향귀가를 하여주었는데 사회에 나와 보니 제대군인들에 대한 평견과 수모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전사 생활 10년을 고욕으로 시달려 죽지못해 살아왔었지만 일반 보병구분대 제대군인들은 고향귀가도 하지 못한 것이다.

 

탄광, 대 건설장들에 무리로 배치하는 처절한 상황까지 벌어졌으며 그곳에 배치된 제대군인들의 후생시설은 군 생활과 비교 할 수 없는 더욱 더 열악한 처지이다. 도둑질, 강도, 살인 미수 사건들이 끈기지 않았으며 주둔지역 주민들은 제발 군 제대군인들은 자신들의 사는 곳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정부에 항변하는 사태가 벌어지군 하였다.

 

나라를 위해 귀한 자식들을 군에 보내 어엿한 인간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님들의 심정은 한결같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군인들을 전부 도둑, 강도, 집단 사회적 실직자로 만들어 아무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도 대책은 없다.

 

다행히 고향으로 귀가한 나의 형편은 그래도 좀 낳은 형편이다. 군 장교 생활을 하였다고 시 건설 부문 당 비서 직책을 주었지만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식 비용은 고사하고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쌀도 없는 형편에서 공장 근로자들의 당 사상사업과 생활을 돌본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당 일군이라고 회사원들의 집들을 방문하면 말문이 막혀버린다.

허름한 집에 하늘 천정이 뚫리고 찬바람이 싸늘한 집한 구석에 앙상하게 남은 7살의 어린 소녀, 그 아래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하며 맥없이 누워있는 4살 사내애가 구원어린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방안 한 구석에는 임신 9개월이 된 아이엄마가 넋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수심에 잠겨 있다. 이틀째 식량구입으로 떠나간 남편은 아직 보이지도 않는다. 참담하고 도와줄 길이 없는 나는 발길을 돌렸다. 이것이 바로 당일군인 내가 돌봐야 하는 공장노동자들의 생활 형편 이었다.

 

양심에 가책은 있어도 나도 방도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노부모님과 가족이 하루 식대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에서 안타까운 현실에 하소연할 곳 없이 길가에 넋 없이 주저앉아 자신만을 한탄하던 기막힌 세월이었다.

 

그래도 집이라도 있고, 기다리는 부모라도 있는 아이들은 좀 낳은 편이다.

지금도 굶어 가며 길거리에서 핏빛 없이 쓸어져가는 꽃제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더 이상의 당의 정책과 노선은 나의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나는 당 비서 직책을 버리고 장사에 몸을 실었다. 내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이웃나라들의 외국 상인들과의 거래를 위하여 인민보안성(지금의 인민보안부)소속 녹산 무역회사의 직업을 빌려 차 판매도 하고 밀수로 마련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일정하게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련의 시기가 나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순환의 연속으로 해당 당위원회에서는 나를 당의 신임을 저 버리고 개인의 향락에 만 눈먼 당원, 양심을 버린 배은망덕한 행동의 대상으로 낙인 되었다.

 

보위부의 거듭되는 감시 하에 죄 아닌 죄인으로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악형을 받아야 만 하였다. 이를테면 외국인 불허금지법 위반과 한국 비디오 유포 죄로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

 

당시 20041120일 부터 130명으로 구성된 중앙당 비사회주의 그루빠가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중앙당 비사회주의 그루빠의 집중 검열로 회령시만도 180세대가 혹독한 추위의 12월에 추방되고 재판을 받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밀수, 밀매, 한국비디오 시청 유포대상, 등 정부의 반 사회주의체제를 시도하는 자들이라는 죄명하에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가구들이 사라져 갔다. 누구는 수용소로, 누구는 재판장으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조용히 사라져 갔다. 이러한 사태는 함경북도 무산군, 온성군, 은덕군으로 확산되어 갔다.

 

40여 일간의 보위부 감방에서 나는 비둘기 조형, 등 각종 고문에 시달려야 했고 새벽의 영하20‘c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손목에는 쇠고랑을 차고 홑옷을 입고 우랄(러시아 모터사이클)에 실린 채 짐승처럼 끌려 다녀야 했다. 나와 관계되는 인물들을 색출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꿈속에서 악몽을 꾼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더는 나와의 관계자를 색출할 수 없다고 결정한 보위부에서는 나에게 가 석방을 취하였다. 그들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나는 한동안 집안에서 부모님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보위부의 감시를 피해 비 인륜사회, 북한독재를 저주하며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들과 기약 없는 길을 떠나며 이별의 약속도 없는 채 눈물의 강을 건넜다.

 

감옥에서의 현실체험은 북한의 법적제도의 현 실태와 독재정권의 꼭두각시로 인민들을 폭압하고 탄압하는 정치적 폭력기구로서의 북한의 현 실상을 체험하게 한 계기로 되었다.

 

북한독재는 자기수령에 절대복종하고 그의 사상을 절대화하는 길만이 천금주고도 바꿀 수 없는 참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 인간 독재자로 자칭하면서 수령위대성으로 과대평가하여 인민들을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정신적 불구자로 저락시키는 것이 북한권력자들의 사상공세이고 전략이다.

 

이러한 순간순간들은 북한 인민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몰아넣게 하고 수많은 탈북 민들이 사랑하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시절의 인민이 아니고 오늘날의 북한의 인민이 더더욱 아니다. 어제 날의 원한을 박차고 자유 민주를 향한 우리의 힘은 커만 가고 있다. 자유대한민국,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한 탈북 민들의 발걸음은 빠르게 줄달음 치고 있다.

 

북한독재자 김정은의 세습통치를 끝장내는 그날까지 함께 동참할 의연한 결의에 충만 되어 오늘도 노력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더 밝은 미래를 꿈꾼다. 북한의 부모 형제 만날 그날을 그리며 또 새로운 발걸음을 향한다!

 

향유로운 더 밝은 미래를 꿈꾸며…….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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