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으로 다시 갈까?"
작성년도 :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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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으로 다시 갈까?"
- 림일
평양으로 다시 갈까
간혹 고향이 그리울 때면 드는 생각 중에 하나다.
나는 1968년 10월 평양시 대동강구역에서 태어나 서울에 올때까지 평양에서만 살았다.
1984년 8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4월 철도안전국 후방과에 배치되었다.
당시 사회안전부(경찰청)에서 독자출범한 철도안전국에 나를 포함한 노동자들이 50여명, 안전원(경찰)들은 400여명이 있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북새통을 이뤘던 1988년 가을, 사회안전부 경리처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외국바람의 맛을 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해 북한에서는 사회안전부 소속 노동자들을 러시아 건설현장으로 파견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노동자들의 생활은 역시 달랐다.
1993년 7월 대외건설인력파견기관인 대외경제위원회 산하 평양대외건설기업소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한국의 발전상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이 때가 아닌가 싶다.
해외를 다녀온 동료들의 말에서 한국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래, 대한민국으로 간다. 가서 인간답게 살아보자” 하고 결심했다.
기억도 생생한 1996년 11월 어느날, 북한 유일의 국제항공인 편으로 평양순안국제공항을 떠났다.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고향을 떠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비장한 마음을 먹었지만 그래도 다시는 영영 못 볼 수도 있는 고향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나왔다.
“서울! 과연 어떤 곳일까?”
그것은 나만의 환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별난 꿈을 안고 한국에 왔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어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온 것이 아니라 죽을 고비를 넘어왔으니 정부로부터 거액의 정착금을 기대했던 것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받은 16평형 임대아파트에서 아파트보증금을 제외한 통장을 보며 “내가 고작 요걸 받자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고향을 등지고 왔단 말야? 허참 기가 막혀서···”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속된말로 표현하면 “야! 대한민국 너무해··· 국민소득 1만불인 나라가 나에게 겨우 임대아파트를 줘?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거야”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뭐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값이 겨우 이정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늦게 왔나? 좀 더 일찍 올 걸”
배부른 소리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대한민국에 세금 한번 내보지 않은 사람인데, 그래도 나에게 집과 정착금을 준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많든 적든 국민의 세금이라 생각하면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다.
건국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한 IMF 한파가 몰아쳤다. 멀쩡한 회사가 줄줄이 쓰러지고, 감원이다 명퇴다 해서 가족 볼 면목이 없다며 한강에서 투신자살하는 가장과 갈 곳 없어 방황하는 노숙자가 많아졌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도 저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따뜻한 집 한칸이라도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시련의 관문
나는 처음부터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사회에 나왔다. 내가 희망했던 대학의 입학모집이 모두 끝난 상태라 수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가만히 앉아 허송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현실을 혈기왕성한 젊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었다.
그래서 6개월 계약직으로 모 식품납품업체에 입사하여 일하기로 결심하였다.
내가 맡은 일은 입출고를 포함한 재고관리였다.
거래처 물건 수납이 늦어질 때면 자정을 넘기기 일수였지만 힘들진 않았다.
바로 ‘보너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참 재미를 붙여 일을 할만 하니 회사가 부도났다.
입사 3개월만에 맞은 이변, IMF가 가져다 준 대한민국에서의 첫 시련이었다.
“그래 돈 좀 못 벌면 어때! 적게 먹고 적게 쓰면 되지···” 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새벽에는 운전학원, 밤에는 컴퓨터학원을 다니며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 어느때 보다 더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였다.
서울에 온 이듬해 봄, 서울정보기능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렇게 오고싶었던 학교에 막상 입학해보니 만족감과 허무함을 동시에 느꼈다.
뭐든지 꿈을 가졌을 때가 좋은 것 같았다.
주말이면 아르바이트로 서울시내 모 주류업체에서 일을 하였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 민속주납품업체인데 해마다 명절이면 두 달간은 말 그대로 전투다. 사장이하 전 사원들과 아르바이트생 포함하여 수백명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낸다.
그 바쁜 와중에도 건강까지 걱정해주시는 사장님의 극진한 관심이 내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역시 사람 좋고 살기 좋은 곳이 대한민국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바쁜 일에 쫓기다보니 눈이 움푹 들어갔고 때론 눈앞에 별꽃이 피는 듯한 현상도 나타났다.
우스갯소리로 서울판 을 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고생은 했어도 보람만큼은 있었던 것 같다.
힘들게 번 돈인만큼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돈을 아껴쓰는 습관이 있었기에 아무런 수입 없이 최근 3년간 집에서 원고집필에만 몰두 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의 전환점
서울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던 어느 날, TV를 통해 평양순안국제공항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역사적인 만남을 시청하였다.
우리 민족이 감동했고 전 세계가 경탄한 그 역사적인 장면에 놀란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남북 두 정상이 처음으로 만났던 “평양순안국제공항”! 바로 이곳은 내가 5년전 부모형제들과 친지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평양을 출발한 뜻깊은 곳이었다.
버드나무가 많다하여 이라고도 불려지는 아름다운 도시 평양!
남북의 두 정상이 내 고향 평양에서 활짝 웃었다.
우리 민족과 역사에 길이 기록될 그날의 장면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너무 감동적이야! 멋있어. 역시 우리 한민족이 최고야!” 전 세계가 찬사를 보낸 너무나 멋진 저런 만남이 계속 지속되어 정상들만이 아닌 우리 같은 서민들도 자연스럽게 남북을 왕래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바로 그날 “그래! 남북이 함께 웃을 만한 재미있는 책을 하나 써보자!” 하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이것이 내가 현재 쓴 “평양으로 다시 갈까?”의 집필 동기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내 인생의 진짜 꿈이라고 생각한다.
꿈은 노력의 산물
한국기술교육대학교와 순천향정보전문학교를 다니며 짬짬히 원고를 집필했다.
임시 탈고를 끝내고 지난 2004년 1월부터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물론 이메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의 예의표시로 직접 방문하여 원고를 전달했다.
“검토해 보고 조만간 답변 드리겠습니다” 라는 편집장의 말을 듣고 한달을 기다려도 답변이 없고, 내가 전화를 해서 물어봐야 겨우 나오는 대답이 “우리 출판사와는 성격이 안맞아서···”가 전부였다.
음료수라도 한통 사들고 가서 “뭐가 문제입니까? 조언 좀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면 “지금 바빠서··· 메일로 답변드릴께요” 혹은 “이것도 원고라고 썼나요!” 라는 대답이 일쑤였다.
그러기를 수개월.
자살? 가장 극단의 시점에서 누구나 한번쯤 생각할 것이다.
나도 물론 시도는 해보았지만 여기서 삶을 마감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새벽 3시까지 집필을 하고 수정된 원고를 들고 전문가, 지인, 출판사의 자문을 받으려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점심값을 아끼고자 컵라면과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늦은 오후와 저녁시간은 집필에 필요한 자료수집을 위해 교보문고에서 열독하였다.
밤늦게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면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해주는 “오늘도 수고 하셨어요. 사랑해요!” 하는 이 한마디가 천근만근의 피로를 한번에 날려버려 주었다.
아내는 몇 해 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큰 수술을 두번씩이나 받은 몸이지만 아무런 내색 없이 오히려 나에게 힘내라고 용기를 주고 있다.
나는 이런 아내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고마울 따름이다.
이 지면을 빌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김종환의 노래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세상이 힘들때 너를 만나 잘해 주지도 못하고
사는게 바빠서 단 한번도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백년도 우린 살지 못하고 언젠가 헤어지지만
세상이 끝나도 후회 없도록 널 위해 살고 싶다.
이 세상에 너를 만나서 짧은 세상을 살지만
평생동안 한번이라도 널 위해 살고 싶다.
아픈 몸으로 가족의 생활비를 벌겠다며 미용실에 나가 힘들게 일하는 아내에게 죄를 짓는 듯한 마음에 잠자리에 들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곤 한다.
항상 그러하듯 오늘도 고백한다.
“여보··· 정말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이런 아내의 사랑과 가족이 있었기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우고 다시 쓰고, 뒤집어 다시 쓰고, 거꾸로 다시 쓰고··· 코피를 쏟아가며 피나는 노력을 끝에 드디어 원고다운 원고를 만들어 냈다.
문전박대를 했던 여러 출판사에서 책 발간의사를 전달해왔다.
역시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라고··· 정말 꼭 맞는 명언이다.
극단의 선택을 포함해 좌절과 시련의 언덕을 넘어 온 지금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살! 그 어려운 결심이면 충분히 성공한다”고 말이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당부
대한민국은 노력의 대가가 분명히 있는 나라이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너무 허황된 꿈은 금물이지만, 50%의 성공 가능성이 보이는 일은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꿈이요, 청춘이 아닌가.
대한민국! 100만 청년실업자가 있는 나라이다.
모두 한다하는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어 ‘청년 백수’로 사는 것을 우리는 한번쯤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한다.
실망은 고향을 떠날 때 모두 버리고 온 줄 안다. 우리 모두는 분명히 이곳에 희망을 안고 왔다.
그 희망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2005년 4월 림일 씀
2005-05-07 11:04:43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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