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온 보험 아줌마 - 이애란
작성년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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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는 아름다운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에서 태어나 백두산이 보이는 압록강가에서 살면서 경공업대 발효공학과를 졸업하고 맥주, 술을 만드는 주류생산공장에서 품질감독원으로 일하다 어느날 갑자기 4개월된 핏덩이와 압록강을 건너 97년말 한국에 정착한 아줌마입니다.
열한 살 때 성분불량이 문제가 되어 양강도 산간오지로 쫓겨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무지한 아줌마로 감히 떠날 생각조차 못하고 오로지 순응하며 사는 것이 나의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죄가 아닌 원죄 월남자 가족, 성분불량자로 분류돼 숨죽이고 살던 어느날 미국 LA에 사시는 우리 할머니가 잃어 버린 맏아들인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안타까움을 외 사촌여동생이 소설화한 할머니가 있는 풍경이라는 책에 우리 아버지가 어렸을때 YMCA에서 "김일성은 물러가라"는 피켓을 들고 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기록된 것으로 인해 우리가족은 언제 보위부에 체포될지 몰라 궁리끝에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9식구라는 대가족이 동시에 이동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나는 갓 해산한 몸으로 온몸이 퉁퉁 부은데다 핏덩이 아이의 기저귀는 어디서 빨아 말릴지 .... 또한 고혈압으로 쓰러진 아버지, 각막염으로 실명위기에 있는 어머니 등.. 변변치 못한 가족들을 이끌고 떠날 생각을 하니 앞길이 막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할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두번에 걸친 체포, 헤어진 가족, 은신, 도망 등 하나님은 위기때마다 기적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자유의 땅에 안착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떠나지 않겠다고 하시던 어머니와 남편을 따라 용단을 내려준 올케가 같이 온 것도, 이곳에 와서 귀여운 조카 1명을 더 주신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탈출에 성공한 기쁨은 컸지만 그에 상응한 걱정도 컸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터진 구조 조정과 실업문제는 큰 걱정으로 다가섰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우리가 남한에 수십년 동안 살던 사람들도 얻기 힘든 직장을 어떻게 얻울 것인지, 그리고 전혀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한다는 것이 가능할지, 특히 갓난애를 거느린 여성가장으로 30대중반인 내가 취업할 수 있을지... 돌이 지난 아기의 분유값을 벌기위해 궂은 일 마른 일 가릴 처지가 아니라 호텔의 룸메이트로 취직 하여 남들이 쓴 잠자리와 화장실 변기등을 닦으며 회의를 품기도 하였습니다. 북에서도 그렇게 어려운 성분불량을 극복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품질감독원까지 했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단행한 대가가 고작 화장실 청소란 말인가?
하지만 초롱초롱한 아들의 눈망울을 생각하며 아들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기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다잡았습니다. 아들을 위해 호텔보다는 다른 직장이 좋을 것 같아서 힘쓸 만한 분들에게 부탁도 하고 사회단체들에 호소도 해보았 지만 북에서 와 남한 실정을 모르는데다 기술이 없어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자리도 없었 습니다.
한번은 탈북자여서 채용해 줄줄 알았던 곳에서 "탈북자라 안받겠다"는 얘기를 듣고 눈 앞이 캄캄해지고 너무 상심하여 3일간이나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이때까지 탈북자 니까 동정해 주겠지, 직장도 통일부에서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내 운명을 남에게 맡겨 버린 것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습니다. 내 운명을 대신해서 살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내가 피나는 노력을 하여 대가를 받는 것이 떳떳하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파고 들었 고 직업없이 국민들이 힘들게 벌어서 내주는 세금에 의지해서 그날그날 산다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나를 정립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 다 남한사람들도 하기 어렵다는 보험설계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보험회사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지인이 많아야 하는 보험회사에서 거절을 당하거나 할 때엔 울기도 했습니 다. 그러나 현재는 소속감도 생기고 작으나마 계약고도 올려 내가 벌어 아들을 키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전혀 필요없는 인간 이애란이 이땅에 정말 필요한 인간으로 자리 매김하기 위해 물위에 떠다니는 기름방울 같지 아니하고 잘 뿌리 내린 거목으로 살기 위해 저를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의 징검다리와 비오는 날 우산 이 되기위해 열과 성을 다할 것입니다.
보험을 팔면서 남한의 높은 경제장벽을 기어 오르며 첨단 금융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방인이 아닌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하루하루, 한달한달 직장에서 주는 과제를 완수하다 보면 삶의 성공도 보장되리라 생각합니다. 작은 성공이 모여 큰 성공을 이루고 작은 일이 모여 큰일을 이룬다고 믿습니다.
탈출당시 업고 온 핏덩어리는 어느새 개구쟁이가 되었고 어린 것의 티없는 얼굴과 행복하게 자라는 모습은 저에게 청량제가 되어 날마다 새로운 각오를 하게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몹시 힘들지만 틈을 내서 대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합니다. 훗날 수필가나 시인이 되어 "이애란 씀"이라고 된 수필집이나 시집도 내고 싶습니다.
보험여왕도 되고 작가도 되고 싶은 30대중반의 철없는 보험아줌마를 주목해 주시고 많이 불러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9.8.10 이애란 씀
열한 살 때 성분불량이 문제가 되어 양강도 산간오지로 쫓겨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무지한 아줌마로 감히 떠날 생각조차 못하고 오로지 순응하며 사는 것이 나의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죄가 아닌 원죄 월남자 가족, 성분불량자로 분류돼 숨죽이고 살던 어느날 미국 LA에 사시는 우리 할머니가 잃어 버린 맏아들인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안타까움을 외 사촌여동생이 소설화한 할머니가 있는 풍경이라는 책에 우리 아버지가 어렸을때 YMCA에서 "김일성은 물러가라"는 피켓을 들고 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기록된 것으로 인해 우리가족은 언제 보위부에 체포될지 몰라 궁리끝에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9식구라는 대가족이 동시에 이동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나는 갓 해산한 몸으로 온몸이 퉁퉁 부은데다 핏덩이 아이의 기저귀는 어디서 빨아 말릴지 .... 또한 고혈압으로 쓰러진 아버지, 각막염으로 실명위기에 있는 어머니 등.. 변변치 못한 가족들을 이끌고 떠날 생각을 하니 앞길이 막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할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두번에 걸친 체포, 헤어진 가족, 은신, 도망 등 하나님은 위기때마다 기적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자유의 땅에 안착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떠나지 않겠다고 하시던 어머니와 남편을 따라 용단을 내려준 올케가 같이 온 것도, 이곳에 와서 귀여운 조카 1명을 더 주신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탈출에 성공한 기쁨은 컸지만 그에 상응한 걱정도 컸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터진 구조 조정과 실업문제는 큰 걱정으로 다가섰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우리가 남한에 수십년 동안 살던 사람들도 얻기 힘든 직장을 어떻게 얻울 것인지, 그리고 전혀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한다는 것이 가능할지, 특히 갓난애를 거느린 여성가장으로 30대중반인 내가 취업할 수 있을지... 돌이 지난 아기의 분유값을 벌기위해 궂은 일 마른 일 가릴 처지가 아니라 호텔의 룸메이트로 취직 하여 남들이 쓴 잠자리와 화장실 변기등을 닦으며 회의를 품기도 하였습니다. 북에서도 그렇게 어려운 성분불량을 극복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품질감독원까지 했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단행한 대가가 고작 화장실 청소란 말인가?
하지만 초롱초롱한 아들의 눈망울을 생각하며 아들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기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다잡았습니다. 아들을 위해 호텔보다는 다른 직장이 좋을 것 같아서 힘쓸 만한 분들에게 부탁도 하고 사회단체들에 호소도 해보았 지만 북에서 와 남한 실정을 모르는데다 기술이 없어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자리도 없었 습니다.
한번은 탈북자여서 채용해 줄줄 알았던 곳에서 "탈북자라 안받겠다"는 얘기를 듣고 눈 앞이 캄캄해지고 너무 상심하여 3일간이나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이때까지 탈북자 니까 동정해 주겠지, 직장도 통일부에서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내 운명을 남에게 맡겨 버린 것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습니다. 내 운명을 대신해서 살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내가 피나는 노력을 하여 대가를 받는 것이 떳떳하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파고 들었 고 직업없이 국민들이 힘들게 벌어서 내주는 세금에 의지해서 그날그날 산다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나를 정립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 다 남한사람들도 하기 어렵다는 보험설계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보험회사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지인이 많아야 하는 보험회사에서 거절을 당하거나 할 때엔 울기도 했습니 다. 그러나 현재는 소속감도 생기고 작으나마 계약고도 올려 내가 벌어 아들을 키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전혀 필요없는 인간 이애란이 이땅에 정말 필요한 인간으로 자리 매김하기 위해 물위에 떠다니는 기름방울 같지 아니하고 잘 뿌리 내린 거목으로 살기 위해 저를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의 징검다리와 비오는 날 우산 이 되기위해 열과 성을 다할 것입니다.
보험을 팔면서 남한의 높은 경제장벽을 기어 오르며 첨단 금융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방인이 아닌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하루하루, 한달한달 직장에서 주는 과제를 완수하다 보면 삶의 성공도 보장되리라 생각합니다. 작은 성공이 모여 큰 성공을 이루고 작은 일이 모여 큰일을 이룬다고 믿습니다.
탈출당시 업고 온 핏덩어리는 어느새 개구쟁이가 되었고 어린 것의 티없는 얼굴과 행복하게 자라는 모습은 저에게 청량제가 되어 날마다 새로운 각오를 하게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몹시 힘들지만 틈을 내서 대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합니다. 훗날 수필가나 시인이 되어 "이애란 씀"이라고 된 수필집이나 시집도 내고 싶습니다.
보험여왕도 되고 작가도 되고 싶은 30대중반의 철없는 보험아줌마를 주목해 주시고 많이 불러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9.8.10 이애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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