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북 수기 - 김성민 > 탈북민 수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민 수기

나의 탈북 수기 - 김성민

작성년도 : 1999년 582 0 0
  • - 별점 : 평점
  • - [ 0| 참여 0명 ]

본문

1. 죽은 자의 증언

산다고 사는 것일 수 없는 세상살이란 말이 있었던가. 나의 이야기를 죽었대도 죽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1996년 10월, 북한군 대위 신분으로 두만강을 건넜던 나는 이듬해 2월 20일,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大連(대련), 圖門(도문)을 거쳐 북한으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던 인간이다.

지금 나는 서울에서 새 삶을 내딛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나의 탈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총살해버린 반동분자로 선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고, 오늘까지 살아야 했던 이유 중의 한 가지를 역사에 고발한다. 북한군 제0군단 00사단의 현역 군관이었던 나는 탈북 후 중국의 東北(동북) 3省(성)을 전전긍긍하다가 북한 보위사령부 해외 요원들의 체포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죽음의 그림자와 맞닥뜨렸다.

탈북 군관은 북한에 끌려가면 무조건 공개 총살이다. 운좋게도 나는 한국행 밀항을 도와주겠다는 조선족 청년을 만나 그와 같이 大連으로 몸을 피했다. 그날따라 눈보라는 세차게 몰아쳤다. 구멍이 뚫린 듯한 하늘에서 며칠간 퍼붓듯이 쏟아진 눈은 나의 정강이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1997년 2월20일이었다.

대련에 도착한 나는 대련港(항)에서 15㎞쯤 떨어진 곳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대련항 경비를 담당하는 중국군 무장 경찰대원들이 근무교대를 하는 밤 11시에 한국행 선박에 올라타기로 작전을 세웠다. 군데군데 자리잡은 중국 세관과 중국군 경비초소를 에돌며 나는 한국행 선박이 정박한 항구 가까이로 숨어들었다.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있는 정박장 주변엔 정적이 흘렀다. 예상했던대로 11시 정각에 근무교대가 시작되었다. 교대 근무자들이 쌓아놓은 컨테이너 쪽으로 걸어가는 순간, 눈구덩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는 재빨리 한국 국적의 선박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20m쯤 달렸을까.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두 명의 무장 경찰대원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방금 교대를 끝내고 돌아 갔는줄만 알았던 보초병들도 중국말로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다급히 쫓아오는 것이었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권총을 꼬나든 무장경찰들. 뛰어봐야 벼룩이라고 판단한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달려오는 무장 경찰들을 태연한 척 맞이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 안내를 맡았던 조선족 청년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저 사람들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마음을 든든히 먹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말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는 중국 경찰에게 『이 사람은 한국 선원인데 낮에 외출 나갔다가 조금 늦어지는 바람에 내가 안내겸 따라왔다』고 중국말로 말했다.

경찰 중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한 걸음 나서며 선원증과 외출증을 요구했다. 배에 두고 왔다고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중국 경찰은 내 이야기에 반신반의하며 『배에 올라가 신분을 확인하자』고 요구했다. 갑판 위에서 실랑이가 벌어지자, 졸고 있던 근무자가 달려 왔고, 곧이어 잠이 덜깬 한국인 선장이 눈등을 부비며 나타났다. 생전 처음 보는 40대 중반의 사나이였다. 선장의 말 한마디에 내 생사가 결단날 판이었다. 마음은 다급하지만 다급한 심정을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한국으로 귀순을 위하여 이 배에 오르려던 북한군 군관이다. 보다시피 붙들린 신세에 처했다. 중국 경찰이 한국말을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당신이 나와 말을 맞춰, 나를 당신 배의 선원이라고 보증해준다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제발 좀 도와달라』

선장의 눈에서 잠기운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세살난 어린애도 대번에 파악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다시 설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도와달라. 이 사람들에게 끌려가면 나는 죽는다』 나의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에 무겁게 닫혀 있던 선장의 입이 움씰거렸다.

『사정은 알 만한데 어쩔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도 돈을 벌자고 날바다 위에서 이 고생을 하는 사람들인데 복잡한 일에 끼어들면 벌이는커녕, 벌금 바가지나 뒤집어쓰기가 십상이다. 그러니 당신이 좀 이해해 달라. 설마 중국 경찰이 당신을 죽이기야 하겠는가』 물에 젖은 갑판 위에 주저앉아 피를 토하듯 애원해 보았지만 선장은 끝내 돌아서 버렸다.

선장은 나를 지켜보고 있던 중국 경찰에게 『영어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고 물었다. 대화 상대자가 나타났다. 간단한 영어 단어 몇 개는 알아들을 수 있던 나의 귓가에 매정한 선장의 이야기가 꿈처럼 들려왔다.『이 사람은 우리 배와 상관이 없는 북한군 군관이다. 빨리 데리고 배에서 내려주기를 바란다』 대번에 중국 경찰은 거칠게 나왔다. 내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나를 그렇게 만든 한국인 선장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 배 이름은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2. 大連市 공안국 외사과장

나는 대련항 무장 경찰부대의 임시 구류소에 갇혔다. 이튿날 아침, 번역원을 앞세우고 나타난 大連市(대련시) 공안국 외사과장이라는 사람과 마주서게 되었다. 그로부터 『당신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국인 관리법에 의하여 체포되었다』는 정식 통보를 받았다. 나는 大連市 공안국에서 외국인 전용 감방으로 이용한다는 7호 감방에 갇혔다. 외국인이라고는 경제 문제로 붙들려 왔다는 한국인 한 명과 에티오피아 유학생 두 명, 그리고 밀항을 시도하다 붙들린 나와 또 한 명의 탈북자 박형일(스물 여덟인데 해군사령부 출신의 제대 군인) 등 다섯 명이 전부였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해본 환경 속에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불안에 떨고 있던 어느 날, 나를 그곳에 처넣고 코빼기 한번 보이지 않던 대련시 공안국 외사과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왔다』는 외사과장 앞에서 나는 이름에서부터 나이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조서를 끝마치고 손도장을 받아내는 그의 팔소매를 붙들고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심정을 토로했다.

『이곳 감방에서 평생을 살아도 좋으니 제발 北(북)으로만 보내지 말아달라. 당신들도 알다시피 북한이라는 나라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절대로 용서하는 법이 없다. 나는 살고 싶다.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끌려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는 나를, 그물에 걸려 파들짝거리는 한 마리 물고기를 바라보듯 이 가엾이 바라보던 그 외사과장이라는 사람과 평양 김일성 종합대학을 갓 졸업하고 대련시 공안국에 배치되었다는 미모의 번역원이 나에게 보내던 연민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의 가련한 처지에 대한 동정이랄까, 아니면 처음부터 계산된 그들의 거짓이랄까, 그들은 내가 변방부대에 (대련 항 무장 경찰부대) 신변이 인도된 상태이니, 市 공안국 외사과에서 자체 처리하기는 곤란하다는 것과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서를 작성해서 상부에 올려 보낼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의 불안심리를 다독거렸다.

혹시 상부에서 결론이 나쁘게 내려온다고 해도 일단 延邊(연변) 조선족자치주 쪽으로 해서 북한으로의 인도가 집행되고 있으니 그때까지 협조만 잘 해주면 延邊의 국경지역에서 슬그머니 놓아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한 마디 말이 그 당시로서는 삶의 희망이고 조건이었다. 속임수에 불과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삶에 대한 욕구가 너무도 간절했다.

한 부대에서 생활하다가 越境 (월경)을 시도했으나 중국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체포돼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공개 총살을 당한 고향 친구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붙잡고 싶었고, 그 희망에 마지막까지 의지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당시의 나에게 그런 형태의, 이른바 희망이라도 없었더라면 죽음과 직결된 大連의 그 감옥생활을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3. 圖門으로 압송되다

大連 공안국 제7호 감방의 모범 囚人(수인)이었던 나는 41일간의 구류생활을 거쳐, 탈북한 박형일과 함께 延邊 인근의 圖門으로 호송되었다. 불안과 희망의 엇갈림 속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延邊 쪽으로의 호송이었지만 분위기는 살벌했다.

수갑을 차고 여섯 명의 경찰들과 열차에 오르고 보니, 도중에 어쩌고, 저쩌고 하여 풀어준다는 외사과장의 말은 거짓이었다. 나를 호송하는 이들이야말로 소문 그대로, 인정사정 보지 않고 탈북자를 北으로 압송하는 무장 경찰대원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北으로 끌려가 한때 나의 戰士 (전사)였던 사람들 앞에서 비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바퀴 밑에 깔리고 싶었다. 아니, 깔려 죽기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성한 몸으로 뛰어내려 가련한 목숨이나마 건져내고 싶었다.

이 길이 끝나는 곳에 북한의 보위부가 있고, 현역 군관이었던 나에게만큼은 탈북 동기나 이유 같은 것은 조사할 필요도 없을 테니 곧바로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그 불운의 자리에서 부모 형제들과 고향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책임감 높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무장 경찰들은 『너희들이 지랄을 하거나 발광을 하거나 도착지까지 무사히 모셔야겠다』는 배짱인지,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놀라운」희생 정신으로 말미암아 출발 이틀만에 중국과 북한 접경지역인 圖門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4. 불빛 한 점 새지 않는 감옥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세 명의 장교가 우리를 맞이했다. 낮고 빠르게, 저들끼리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중에 알고보니 圖門 중국군 변방부대의 조선족 장교였다) 우리를 향하여 『머리를 숙인 채 바닥에 앉으라』고 명령한다. 한국말을 모르는 중국인 경찰들을 상대로 안타까운 심정을 제대로 전할 수 없어 속을 태우던 형일과 나는 막상 눈앞에 우리말을 하는 경찰이 나타나자, 그 인간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북한의 분위기. 이제 한 걸음 앞에 죽음의 땅이 다가와 있었다. 그 인간들의 삼엄한 호송 하에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驛舍(역사) 밖을 벗어나 약 5분간 달렸을까. 짙은 어둠에 묻혀있는 圖門 시가지의 어느 한 건물에 도착했다. 높고 음산한 철제 대문이 우리를 맞이했다. 철제 대문 안에 들어서니 4층 건물에 가려져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1층 건물이 나타났다.

컨테이너 서너 개를 연결해 놓은 것 같이 낮고, 작고,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초라하고 음산한 건물이었다.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 하나의 철문을 통과했다. 중국 경찰은 우리를 건물의 구석 쪽, 좁은 방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팬티를 포함하여 입은 옷 전부를 벗어서 각자 발 앞에 놓으라고 명령했다.

서릿발 같은 호령도 호령 이려니와 살벌한 분위기 아래에서 우리는 시키는 대로 알몸이 되었다. 신체검사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소지품 검사였다. 갖고 있던 돈이란 돈은 다 뺏겼다. 그리고 나서 아랫도리 옷만 입으라 하고는 이리 저리 돌려세우며 사진을 찍어댔다. 발가벗기는 순간부터 제 정신일 수 없는 우리들은 공포에 부들부들 떨면서 조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내가 수감된 그곳은, 중국과 북한 간에 맺어놓은, 이른바 「범죄자 인도조약」에 따라 중국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圖門의 「탈북자 수용소」였다. 중국 안에 이러한 수용소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나에게, 그곳은 그저 유달리 두렵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감옥일 뿐이었다.

워낙 폐쇄된 북한에서 살았던 인간인지라 중국 생활의 모든 것이 나에겐 새롭고 이상한 것으로 안겨왔지만 그놈의 「탈북자 수용소」라는 것은 건물 자체부터가 이상하기 그지없게 생겨 먹었다. 몸수색을 당하고 끌려 들어간 복도에는 언젠가 비디오를 통하여 본 적이 있는 미국식 감옥을 연상케 하는 철창문이 장치되어 있었고, 철창 문안에 감방이 있었다. 각 감방으로 통하는 문은 낡고 녹이 슨, 구식 중형 금고와 다를 바 없는 철문으로서 북한군 보위부의 「십일 영창」을 방불케 했다.

계호원들에게 어깨를 떠밀리며 감방 안에 들어섰다. 백열전등이 훤하게 켜진 감방 안에는 탈북자들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빼곡히 앉아 있었다. 방금 내가 들어선 밀폐식 철문을 제외하 고는 조그마한 뙤창문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5. 신문 내용, 비밀 녹음

갑자기 숨이 콱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감방 안에는 공기구멍은커녕, 공기 구멍의 사촌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라곤 하나도 없고, 사람이 드나드는 감방 문은 밀폐식인데, 그렇다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숨을 쉬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평 정도의 작은 감방 안에는 일곱명의 탈북자들이 갇혀 있었다. 신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복도로 짐작되는 한 구석에는 어린애 들의 놀이감같이 작디작은 요강이 지독한 지린내를 풍기며 놓여 있었고, 잠자리는 그 건너편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같은 처지의 인간 하나가 또 나타났다고 헤벌쭉한 웃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벽체에는 어설픈 미장칼 자욱이나마 있었지만, 천장은 미장조차 하지 않은 콘크리트 벽체가 그대로 얹혀져 있었다. 천장 한쪽 구석에는 스물네 시간 켜 놓는다는 2백 촉짜리 電球(전구)가 하나 있고, 電球 바로 뒤쪽에는 죄수들을 감시하는 미니 카메라 한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잠시 후, 감방문이 열리더니 다 닳은 군용 모포 한장과 기름때가 쪼들쪼들한 베개 한 개가 날아들었고, 모두 취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틀밤을 꼬박 열차에서 새운 상태였지만, 潮水(조수)처럼 밀려드는 오만 가지 생각과 덧싸이는 불안 때문에 도대체 잠을 이룰 수가 없던 나는 수용소의 첫날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이튿날 해뜰 무렵에야 쪽잠에 들 수 있었다.
아츠러운(애처롭다의 함경도 방언) 자물쇠 소리를 내는 세 개의 철문들을 지나, 이튿날 아침 내가 불려간 곳은 감옥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는 4층 건물이었다. 중국 길림성 변방부대 소속 圖門 변방지대 사무실이었다.

6. 『나도 원래는 공화국의 충신이었다』

계호원을 따라 건물 3층에 자리잡은 심문실로 들어서니 다섯 명의 장교가 커다란 책상 위에 각자의 서류철들을 펼쳐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마어마한 공포를 예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들은 나의 존재에 대해선 안중에도 없는 듯, 자기들끼리 대화하듯이 심문을 시작했다.

『성민이라고 했지?』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당신 같은 나이의 군관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를리야 없겠지』 『굶어죽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면서? 오죽하면 당신 같은 군관까지도 北에서 뛰쳐나오겠는가?』 하도 뻔한 사실인지라 대답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그들은 일방적 물음만을 던졌다.

北이 지금같은 상태로 나가다가는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진다는 쪽으로 번지는가 싶더니, 자칫하면 올해를 넘기지 못한다는 등 종잡을 수 없는 방향의 이야기가 가지를 치고 있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인데, 네까짓 것들이 아무리 지껄여도 말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던 나였지만, 막상 이야기가 그런식으로 흐르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이야기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사실은 나도 그 때문에 이러저러한 경로를 거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자, 무슨 웅변대회나 하듯이 다섯 명의 장교들이 또 다시 목청을 돋우기 시작했다.
『그런 환경과 처지를 목격하고, 체제의 모순을 발견하고도 그 나라에서 뛰쳐나오지 않을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도 탈출했다. 나도 원래는 공화국의 忠臣(충신)이었다』

내 스스로, 나의 구체적인 족보와 경력을 이야기해 버렸다. 그때는 몰랐다. 북한의 실정을 그처럼 잘 아는 장교들이라면 내 처지를 이 해해줄 줄 철석같이 믿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어리석은 이 인간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곳에 설치된 고감도의 녹음기는 나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테이프에 담아가고 있었다.

『그랬구만』 그리고는 서류를 덮어버린 장교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또 만나서 이야기 하자구』

7. 피로 쓴 글씨들

그날 밤, 대낮같이 훤한 백열등 아래에서 밤과 낮의 구별이 되지 않는 감방 안 작은 공간에 무릎을 꺾고 앉아 우리 탈북자들은 드디어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혜산 목재 가공공장 화물차 운전수 곽선철(49)은 가족과 함께 北을 탈출한 후 한국 망명을 신청하기 위하여 홀로 北京(북경)의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다가 중국 공안원에 붙들려 이곳까지 끌려왔다고 했다.

선우경철(50)은 8군단 후방사령부에서 재정과 사민지도원을 하다가 탈북했고, 김영국(38)은 청진 객화차대 선로 수리공이었다. 일곱명의 감방 동료들은 나름대로의 눈물겨운 사연 속에 이곳까지 끌려온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들이었다.

北京의 한국대사관 정문 보초병에게 붙잡혔다는 사람도 있었고, 중국 천진 항구에서 밀항을 시도하다가 나처럼 붙들린 사람도 있었다. 탈북 4년차로, 일정한 수준의 중국말 실력을 가지고 圖門의 석현탄광에서 일하다가 조교(親北 성향의 중국 조선족 교포)들의 고발에 의하여 잡혔다는 스물네 살의 회령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일정 기간 조사를 받고 말을 잘 들으면 중국인 輕犯者(경범자)들을 취급하는 이른바 「로개농장」에 보내 주는데, 거기서 또 일을 열심히 하면 3년만에 중국 국적을 주어 사회에 정착하도록 하는 새로운 방침이 중앙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이곳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 가는데, 그간 말을 잘 듣고 조사에 성실히 응한 12명이 「로개농장」에 갔다고 했다. 『당신도 지금처럼 뻣뻣하게 굴지말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충고도 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고, 가슴이 저릴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탈북자들을 위하여 중국의 법이 바뀌었다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았다. 감방 안 곳곳에는 앞서간 사람들의 눈물겨운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감방안 네 벽은 물론, 울퉁불퉁한 천장에까지 온통 글씨 투성이었다. 자자구구가 우리들에게 사연속의 사연을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간다. 죽음의 북조선으로! 1993년 1월10일 김00」이라는 글씨가 오른쪽 벽체에 새겨져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탈북 용사들 아, 죽더라도 떳떳이 죽자」는 글이 쓰여 있었다.

「김일성이도 무섭지 않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남조선 대사관 개새끼들아, 저주가 있으라」는 거칠고 야비하기까지 한 글들이 의미 심장한 모습으로 가슴에 미쳐왔다. 벽면에는 더 이상 글을 박아 넣을 자리가 없어 철문에 금속 조각 같은 것으로 새겨넣은, 소설의 소재 같은 애절한 글발도 있었다.

「먼저 가오 여보. 우리 저 세상에 가서 잘 살아봅시다. 00이 아버지로부터」 새겨진 사연들과 날짜들로 보아 「탈북자 수용소」는 1980년대 중반부터 운영된 것 같았다. 내가 들어 있던 감방에만도 백여명의 탈북자들이 거쳐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필과 나무조각, 혹은 쇠붙이와 시멘트 조각으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피로 새겨진 글이었다. 「북으로가 아니라 남조선으로 가고 싶다!」는 글은 붉은색 피빛이 아직도 바래지지 않아 얼마 전에 쓴 것 같고, 인간의 피로 새겼다 하기에는 글씨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어서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8. 심리술 전문가들

나를 포함한 탈북자들은 미련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이 미련한 게 아니라 죽음의 공포 앞에 서고 보니 머저리가 되고 바보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감방별로 철저한 격리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수용소 규정에도 불구하고, 오랜 탈북 생활을 통해 체득한 눈치와 특유의 동물적 감각에 의존해 「탈북자 수용소」 안에는 내가 수감된 감방 외에 7개의 감방이 더 있으며, 감방마다 대개 10명 정도의 탈북자들이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 평균 4명 정도가 「로개농장」이라는 곳으로 가고 있는 줄 믿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과 무시무시한 절망이 가슴에 뒤엉키던 운명의 또 하루가 가고 이튿날, 꼭 같은 시간에 나는 예의 3층에 또 다시 소환되었다. 이번에는 다섯 명이 아니라 전날 조사과정에서 인간적 면모를 보여줘 유다른 기억을 남겼던 나이 지긋한 소좌와 인텔리풍의 대위 두 사람이 나를 맞는다.

감방 안에 새겨진 두려움의 글은 두려움대로, 감방 동료들로부터 들은 희망사항은 희망사항으로 새겨져 있는 나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金言(금언)이었고, 하늘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밤새 당신 문제를 놓고 상의가 있었는데 긍정적인 쪽으로 결론이 났어』 소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경쟁이 대위가 말꼬리를 잇는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일에 협조를 잘 하면 北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왜, 그, 탈북자들을 임시로 관리하는 로개 농장이 있다는 소리 들어봤어?』 들어만 봤는가? 밤새 꿈에까지 그려본 곳인데…. 北이 아니고 로개 농장이라는 곳에 보내만 준다면 3년이 아니라 3년의 열 배를 살라고 해도 춤추며 달려갈 수 있는 곳인데….

참으로 가려운 데를 긁는 데 名手(명수)라 아니할 수 없는 수용소 관리자들은(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길림성 변방부대와 「중국 안췐지」라고 부르는 국가안전부에서 특별히 선발된 심리술 전문가들이었고, 나는 그들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바보, 얼간이었다.

『중국에 넘어 와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고, 누구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 중국법을 어긴 일이 없다는 것만 확인되면 당장 내일이라도 로개농장으로 보내줄 수 있지』
땅바닥에 버려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을지언정, 담배 한 개비 남의 것을 훔쳐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털어놓지 못할 행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날짜별로, 지역별로, 조목조목 짚어가는 나의 이야기를, 그들은 전날과 달리 수첩에 약도까지 그려가며 옮겨적었다. 장장 다섯 시간이 지난 후에야 두 번째 조사라는 것을 마칠 수 있었다.

『일단 당신이 말한 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니, 다른 생각 말고 며칠간 푹 쉬면서 로개농장으로 갈 준비나 하라』 이 말을 남기고 그들은 방을 나갔다. 나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빌어먹을 미련과 희망을 안은 나는 또 다시 세 개의 철문을 밀고 당기는 계호원에게 이끌려 우리들 스스로 「진공지대」 라 이름 지은 감방으로 돌아갔다.

북한 淸津(청진) 제강소 1호 용광로 용해공이었다는 원호, 원일 형제가 중국에서의 행적이 확인되고 범한 죄가 없음이 밝혀져 로개농장으로 간단다. 다음날에는 8군단 후방사령부에서 근무한 선우경철 씨가 환하게 웃으며 『한 발 먼저 가서 자리잡고 기다릴 테니 곧 따라들 오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감방문을 나섰다.

9. 탈북 여성들도 수용

내가 있던 감방의 바로 곁방은 여성 감방이었는데, 한밤중에 때없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벅적거리는 것으로 보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탈북 여성들이 새로 끌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圖門 「탈북자 수용소」에 끌려온 지 8일째 되는 날, 우리 감방에도 열일곱 살 먹은 더벅머리 총각이 붙들려왔다. 고향은 평양인데 1995년 온 가족이 함경북도 茂山(무산)으로 추방되어 먹을 게 없어 늘 굶어살다가 하도 배가 고파 엄마에게 편지 한 장 남기고 혼자 두만강을 건넜다는 홍민이다.

중국에 넘어와서 먹어본 아이스크림과 꿀보다 더 달달한 과자조각을 입에 넣을 때마다 장마당에서 빵 부스러기를 주어먹던 여동생 홍옥이 생각이 나서, 아끼고 아낀 돈이 도합 80원이나 된다고 자랑하는 홍민이와 마주앉아, 『너도 이제 이곳 사람들의 말만 잘 들으면 로개농장에 갈 수 있을 테니 행동은 이렇게 하고, 대답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참에, 감방문이 열리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차림새로 보나 행동거지로 보나, 점잖고 교양이 있어 보이는 사복쟁이가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延邊 조선족 자치주에서 왔다고 했다. 특별한 기술이나 재간이 있는 사람들은 자치주에서 특별히 배려하여 중국 국적을 줄 수도 있는데 이곳 사람들이 당신을 추천해서 직접 만나보러 왔다는 것이다.

10. 조선족 자치주에서 온 사람

중국에서의 거처지들을 확인해 보았는데 별 문제가 없었고, 알고 보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게 될 수 있었던 일이 이렇게 잘못되었다고 제법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말머리를 뗀 그 사람이 곧 정색을 하고 나에게 물었다.

『당신도 아다시피 우리 조선족 자치주는 남북한의 정치, 경제적 매개자 역할을 담당하는 수고 중의 수고를 감수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남한 정세는 물론이고, 급변하는 북한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필요한데 군관인 당신의 입장에서 볼 때 북조선이 장차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곳에 있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 나와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세상이 북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 믿었었는데 알고보니 세상에 둘도 없는 거지 나라다. 金日成(김일성)과 金正日(김정일)도 무슨 주의와 사상의 창시자라는 말을 그대로 믿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하여 마지않았는데 알고 보니 역사마저 왜곡하는 협잡꾼들이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북한의 주민들, 특히 북한의 군인들이 알게 된다면 이제 金正日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처럼 병사들의 총에 맞아 죽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 같고, 혹시 북한 내에 그런 진보적 성향을 띤 단체나 사람들 중 알고 있는 게 있느냐고 묻는 그의 이야기가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해있던 나는 중국생활 동안, 기회만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하던 말들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시간이 문제지, 어떤 단체나 개인에 의해서 결정될 일이 아니다. 당장 사람이 굶어죽는 세상인데 사람을 파리 잡듯 하는 보위부 아이들이 무서워서 함부로 말을 못할 뿐이지 불평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속으로나마 金正日을 욕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金正日이 인민들로부터 노골적인 욕을 얻어 먹는다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중국에 건너와서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자그마치 6~7만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구만. 이야기 잘 들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후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사복쟁이는 돌아섰고 나는 감방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수용소 책임자가 감방 문앞에 나타나더니 나와 다른 감방에 갇혀있던 박형일을 「로개농장」에 보내준다며 밖으로 불러냈다. 그때의 감정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옳을까.

혹시나 하는 일말의 불안이 없었던 바는 아니었지만 「로개농장」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을 이미 들었던 상태인지라 희망을 갖고 감방 문을 나섰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대기하고 있던 군용트럭에 올랐다.

11. 북한으로 넘겨지다

그 순간, 트럭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섯 명이나 되는 건장한 사 병들이 우르르 달려들더니 한쪽에서는 소리를 못 지르게 입을 틀어막고, 다른 쪽에서는 팔을 꺾다시피 비틀며 수갑을 채우는게 아닌가. 우리를 태운 차는 빠른 속도로 圖門市 네거리를 통과했다. 어차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행여나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정사정 없는 그 인간들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우리가 탄 군용트럭은 일부 塗色(도색) 부위가 벗겨지고, 벗겨진 자리에 녹까지 슬어 있어, 누가 봐도 흔해빠진 군용트럭인데 특별 통행증을 부착하기라도 한 듯 중국의 圖門 海關(해관)을 멈추지 않고 통과해 건너편인 북한 온성으로 질주했다. 中朝(중국과 북한) 국경을 속도 한 번 바꾸지 않았다. 다리 건너편 북한 땅에는 나를 기다리는 북측 군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속에서 延邊 조선족자치주에서 나왔다며 나의 속을 빼냈던 낯익은 사복쟁이의 얼굴을 일별함과 동시에 나는 쓰러졌다. 거품을 물고 쓰러진 나는 개처럼 끌려 함경북도 온성군 보위부로 이관되었다. 나는 한달 이상 조사를 받고 평양으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열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필설로 다 못할 고생 끝에 다시 중국으로 탈출해 한국에 귀순했다.

이제,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땅에서 탈출한 나는, 나와 수많은 우리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세기말적의 비극을 연출해 낸 중국을 향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인구와 면적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그 나라에서 圖門의 「탈북자 수용소」는 점으로도 표시되지 않는 작고도 작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인류의 反動(반동)이 소리치고 있으며 유엔의 정신이 배반당하고 있다.

그같은 인간성 말살의 수용소를 비밀리에 유지하고 있으면서, 세상 사람들 앞에 개혁과 개방,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가 중국이라고 중국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월간조선 1999년 10월호)

1999년 10월 김성민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