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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북한 토목전문가에서 건설관련 벤처기업 고문으로 - 장인숙

작성년도 : 2000년 61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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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토목전문가에서 건설관련 벤처기업 고문으로 - 장인숙

 

 

나는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태어나 청진공업건설전문학교와 평양운수대학을 졸업하고 토목기사로 일하면서 일찍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고 아들 4명의 올바른 성장과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의 기쁨과 희망이었고, 나의 생활 그 자체였다.

 

그러던 중 러시아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맏아들의 한국행으로 인해 순식간에 온 집안이 풍비박산 되었다. 나머지 세 아들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왔으나 우리는 참고 견디면서 생활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와 드디어 19979월 셋째와 넷째아들과 함께 한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함께 오지 못한 둘째아들로 인해 뼈 속 깊이 아픔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 내리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어느 외국영화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밝은 서울의 야경, 무수히 오가는 자동차 행렬, 수없이 많은 간판들, 자유분방한 사람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옷차림, 그리고 머리단장... 내가 저들의 물결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할까? 내가 설 자리가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가 없었지만 60년대 초에 대학을 졸업한 나였기에 웬만하면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은 순식간에 깨어졌다. 당장에 한자와 영어를 몰라 지식습득이 늦을 뿐만 아니라 사회가 너무나 많이 발전하고 변해있어 모든 것이 생소함 그 자체였다. 점점 심경은 복잡해지고 의식은 나약해졌다. 나는 전혀 모르는 길을 깜깜한 밤에 홀로 걸어가는 나그네였던 것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나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처음 나는 북한에서의 경력을 살려 대한 토목학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토목 학회지에 북한의 건설현황에 대해 연재하기도 하였으며 대북 투자기업 등에 자문역할도 하였다. 한번은 국내 대기업 계열의 한 건설업체를 방문하였는데 그 회사의 설계실을 둘러보고 북한에서 평생 설계원으로 일했던 나로서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사원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만의 공간속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설계를 하는 모습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나의 현역시절 모습과는 너무나도 판이했기 때문이었다. 함꼐 일하자는 그들의 요청에 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완전한 컴맹이었고 앞으로 컴퓨터를 배울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일찍이 이곳에 왔더라면 어떤 일에서든지 주저함을 모르던 기백으로 일할 수 있었을 것인데 북한에서 정년퇴직까지 하고 이곳에 왔으니 모든 것이 야속하기만 했다.

 

또한 대한토목학회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북한의 토목건설 현황을 주제로 특강을 하였는데 건설업계의 원로와 박사님, 교수님들과 친교를 맺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인천 신공항 건설장에 가서는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건설 중장비 기계들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기계들을 북한에 보낸다면 개미군단으로 해내는 토목공사의 부담을 훨씬 줄일 수 있을텐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족들도 점차 우리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무선 호출기와 자전거를 사주었을 때 어린아이들처럼 그렇게 기뻐하면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던 두 아들은 어느덧 연세대 노어노문학과와 신문방송학과에 각각 입학하여 대학생활을 하고 있으며 특히 셋째아들은 맏아들의 사업을 도울 정도로 성장했다. 정말 대견스럽게 생각된다.

 

그리고 맏며느리와 손자들과도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 서울에서 처음 외국인 며느리와 손자를 보는 순간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혈육이란 참으로 신비한 것이었다. 한국말도 모르는 손자가 나와 제 삼촌들을 붙들고 같이 살자고 했을 때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꽉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한국음식 요리법과 우리말을 잘 모르는 맏며느리가 우리들의 식성에 맞게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만들려는 노력과 저도 모르게 섞여 나오는 외국인 발음에 낯을 붉히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솟아났다. 고이 자라온 외동딸을 낯선 이국땅에 보내주신 사돈댁 내외에게 감사를 드리며 내 친딸처럼 사랑해주리라 마음먹고 실천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가족들이 제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중 작년 7월 셋째아들 약혼녀가 귀순해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족의 탈북을 도와주었던 그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늘 가슴 아파했는데 드디어 한국 땅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다소나마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와 그 가족에 대한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1개월 앞두고 서로 헤어졌던 셋째아들과 며느리는 금년 3월에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과 벗들의 축하속에 우리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에서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하객전체를 눈물바다속에 휩싸이게 했다. 이 모든 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고 이 현실앞에서 우리 가족은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 보리라 다짐하였다.

 

지금 우리 가족은 행복하다. 컴퓨터에 자신들의 홈페이지도 개설하고 어떤 어려운 프로그램도 척척 다루어 나가는 아들, 며느리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대견하다.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과 자기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는 맏아들, 처음 맡은 근무지에서 인정받고 있는 셋째 며느리 모두가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재산이다. 그리고 나는 대한토목학회와 대한건축협회의 회원으로 인터넷에 건설전문사이트를 운영중인 벤처기업()콘스트라넷닷컴의 고문으로 가나안 농군학교 전임강사로 활동중이다. 금년 말이면 3년간의 성경학습을 끝내고 고귀한 집사 직분도 맡게된다

 

이제는 한국에 온 지도 3년이 되었고 모든 면에서 이곳 사람들과의 간격도 많이 좁혀졌다. 통일이 되는 그 날 함께 오지 못한 둘째아들과 친척, 벗들을 만나면 생활터전을 훌륭히 꾸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현재의 순간순간을 값지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0.11 장인숙

 

 

2004-11-18 00:22:48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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