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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아오지에서 왔어요." - 아침이슬

작성년도 : 2005년 58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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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지에서 왔어요."

- 아침이슬

 

 

아오지에서 왔어요

 

 

누구나 자기가 나서 자라 탯줄을 묻은 고향을 사랑합니다.

저도 여기 남한사람들이 아오지라면 지옥을 상상케 하는 고향 아오지를 사랑합니다.

냇가에 흐르는 맑은 물과 산골짝들마다 흐르는 계곡의 노랫소리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높은 산봉우리와 수려한 산림, 기이한 절벽들이 너무도 아름다운 내 고향이었습니다.

북한의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지만 여러 공장.기업소들로 조화를 이루어 앞을 다투어 솟아 있는 굴뚝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때론 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탄광의 노동자들의 주검으로 내뿜는 검은 타래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고향은 모두 강원도인데 저만이 아오지가 고향이 되었습니다.

지난 6.25 때 아버지의 형제분들이 남하하신 이유로 저희는 북한 말로 말하면 혁명의 배신자이고 조선노동당에 위험분자이니 군사 분계선 가까운 근처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희 온가족은 함경북도 아오지탄광에서 검은 석탄과 함께 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살던 마을에도 국군포로와 포로교환병(국군포로를 남한으로 넘어보내고 인도 받은 인민군포로), 그리고 의용군 등 남한과 연관이 있는 그런 분들이 살고 있었지만 탄광에 배치되어 보니 그런 분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분들도 저희 가족과 같이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아무리 뼈 빠지게 일을 하여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용 후레시에 의지하여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갱 안에서 콧구멍이 꽉 메이는 석탄먼지를 뒤집어쓰고 발파소리와 벨트 컨베이어를 비롯한 각종 기계들의 청각을 째는 듯한 소음은 그야말로 지하의 벌 둥지라 할까 아니면 지옥이라고 표현할까 ...

여하튼 표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거기에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사고로 (굴이 무너지고 기계고장과 그로 인한 인명피해 등)들려오는 소식은 간담을 싸늘하게 합니다.

어떤 땐 방금 전까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저의 눈앞에서 팔다리가 절단되어 쓰러져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웃으면서 갱 막장으로 들어 간 사람이 굴이 무너져 행적을 못 찾는 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 아버지 형제분들이 남하하시는 것을 막지 못하셨어요.

그리고 반동의 딸로 낳을 것이었으면 자식들을 낳지나 마셨어야지 하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울리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남자라면 무조건 당에 입당하여야 사람값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도 오빠들은 당에 들 수도 없었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그에 맞는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추방자의 집 자식이 어찌 넘겨다나 보겠습니까.

저희뿐만 아니라 국군 포로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에서 조금 나은 부류는 포로 교환병으로 아오지에 오신 분들이고 그보다 더 나은 분들은 의용군으로 북에 떨어져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저의 집에 성분이 안 좋으니 형제들이 시집 장가도 역시 그와 비슷한 집 자식들을 선택하여 중매가 들어오고 결혼하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눈감고 귀 기울이면 저의 형부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실종되었다고 형부는 평생을 인정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자기로서는 그래도 노동당에 입당해 보려고 밤낮을 이어가며 야근하고 갱 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집에서 보내주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에우고 오소리굴 같은 갱 안의 한쪽 구석에서 쪽잠으로 피곤을 달래며 일을 하여 입당추천 심의에서 꼭 보류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애타도록 노력해도 안 되어 끝내는 포기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였고 그때마다 술에 취해 울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의 한 생에 고이 간직할 귀중한 것 그 무엇인가

값진 재부도 높은 명예도 그 모두 아니라네

아 그 언제나 나에겐 오직 하나

어머니 당의 믿음 있으면 더 바랄 것 없어라

 

이렇게 노래를 부르시는 형부의 모습은 가엾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평등을 갈망하고 땀과 기름을 지하 520M에서 헤아릴 수 없이 바쳐 왔건만 사회적으로 외면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석탄은 공업의 식량이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손톱 밑이 새까맣게 되고, 석탄먼지를 뒤집어써서 눈과 치아만 반짝거려가며 일을 하여도 우리의 꼬리에 붙어있는 추방이라는 단어는 지우려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뿐만이 아닙니다.

수 백 미터 되는 막장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수많은 피해자들이 저와 같은 삶을 살아 왔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군사독재통치제도를 만들어 놓았고 자기들의 지휘봉대로 좌우로 잘 돌아가는 충견들을 앞세워 사회 통째로를 자기들의 장난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북한사회와 백성들은 그야말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기름진 먹이 그릇이었습니다.

그들 부자에게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천국이고 지상 낙원이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그의 충견들이 북한이라는 사회를 자기들의 야욕을 실현하는 야망의 무대로 만들었고 그자들이 힘없이 약한 우리들을 사회적으로 외면당하게 하였고 저들의 군사독재의 희생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보입니다. 언젠가는 김정일의 충견들도 주인의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버리고 잡아먹고 하는 것이 김정일의 지략이고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꿈에라도 보고 싶은 고향에 대한 아픈 추억은 저를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그 추억으로 인생을 새 충전하여 더 열심히 뛰고 또 뛸 것입니다.

하여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못 다한 삶을 제가 대신하여 꿋꿋이 살아가는 당당한 모습에서 찾으렵니다.

그래야 김정일의 독재가 마지막 비명을 지를 때, 그리고 김정일이가 저승열차에 올랐을 때 그 통쾌하고 짜릿함이 몇 천 배로 더하리라 생각합니다.

 

20051017일 아침이슬 씀

 

 

2005-10-18 10:35:29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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