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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이산은 약이 없는 아픔

작성년도 : 2003년 65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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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은 약이 없는 아픔

- 김봉수

 

 

우리 가족이 중국에서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991월초였다. 광활한 중국땅 여기저기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탈북자들이 훝어져 살고 있었다.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이국땅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언어차이에 의한 의사소통과 취직, 치료, 교육 등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불가능한 상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어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내가 처음 시작한 일은 청소 일이었다. 두만강을 건너서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청소부를 시작으로 병원의 보일러공, 자전거 수리공, 채소장사, 삼륜 자전거를 이용한 짐꾼, 벽돌공장 막일꾼 등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했다.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수입은 보잘 것 없었다. 수입이 적다보니 아이들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맏이가 날 대신하여 삼륜차를 끌고 밤에는 2~3시간씩 짐을 실어 나르며 푼돈을 벌기도 했다. 딸과 막내아들은 산과 들에 가서 미나리, 달래, 민들레 등을 캐어 오거나 밤에 야외시장에 버려진 채소들을 주어다가 음식을 해먹었다.

 

우리가족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불법체류자인 탈북자들을 무조건 체포하는 중국 공안들에 대한 불안과 공포였다. 체포된 사람은 영락없이 북한으로 압송되었다. 따라서 애들이건, 남자든, 여자든, 어디에 살고 있든지 체포와 압송이라는 불안과 공포감이 한시도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길을 다닐 때나 마음놓을 수가 없고 잠을 자도 편히 잘수 없었다. 광활한 대지는 있어도 마음놓고 밟을 곳이 없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어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두더지의 생활과 비숫한 인생이라고 할까... 탈북자들은 공안의 검문검색에 대비하여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고 살고있던 거처를 자주 옮겨야 했다. 우리도 8개월 동안에 11번이나 집을 옮겼다. 어떤 경우에는 옮겨간 집에서 밥 한끼도 지어먹지 못하고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가느라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었다. 벙어리의 흉내를 내면서 공안들을 따돌리기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추적과 검문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었다. 항상 긴장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된 일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손에 붙잡혀 북한으로 압송되었다.

 

가슴을 조이던 위험은 나에게도 찾아오고야 말았다. 19996월 아내가 공안에 체포되어 변방 구류소에 끌려갔다. 아내를 구해 보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조선족 친구와 함께 면회를 가서 옷 몇가지와 얼마간의 간식 그리고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에는 이산가족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과 누구든지 구출하러 가겠으니 꼭 기다리라는 당부를 적었다. 철문 사이로 그곳 마당에서 체포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풀을 뽑고 있는 아내를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구슬픈 눈물만 흘러내렸다. 아내는 끝내 나오지 못하고 북으로 압송되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붙잡혀 가고 난후 매우 슬퍼하고 불안해했다. 두만강을 건너가 꼭 구출해 올것이라고 다짐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아내가 붙잡힌 지 꼭 일주일이 되는 날, 맏이와 딸아이도 공안에 체포되었다. 갈수록 험한 산이라더니 악재가 겹친 셈이었다. 아내의 일로 아직도 마음의 정리도 하지 못한 상태인데 두 자식까지 붙잡히다니... 뒤통수를 한방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그때의 심정은 지금도 뭐라 표현할 수 없다. 일을 나갔던 나와 들판에 미나리를 캐러 나갔던 막내아들만 남았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내가 과연 이산가족이 되자고 가족을 데리고 중국에 왔던가, 이산갖고이 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북한으로 다시 가자!" 어려웠던 시기에 날 도와준 중국 조선족 목사님ㅇ르 비롯한 몇 사람에게 작별인사의 편지를 인편에 전달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주위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 다시 생각해 보라며 극그 만류하였다. 그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상황을 보아가며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얼마 있지 않아 딸이 돌아왔다. 맏이는 북에 압송되어 갔다가 40일만에 돌아왔다. 그 애는 탈출하여 고향집에 갔었으나 어머니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맏이와 딸아이가 오자 다행스러웠지만 아내가 없으니 허전하고 슬픈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신변상 문제 등으로 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 생활하게 되었다. 아내는 1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아내가 굶어죽었거나 병들어 죽었을 거라며 이미 잘못된 사람이니 생각지 말고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하짐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내는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꼭 돌아온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이들도 종이학을 접으면서 "엄마가 꼭 돌아오게 해주세요"라고 써넣었다.

 

2000년 여름, 어느 해수욕장에 갔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가족끼리, 부부끼리, 연인끼리 즐겁게 지내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아내를 생각했다. 돌아오는 버스 칸에서 마음이 울적해 한편의 시를 적어보기도 했다.

 

그 글은 당시 나의 일기장 어디엔가 적혀 있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그 해 초겨울 어느날 대견스럽게도 막내가 어머니를 구하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아내가 압송되어 간지 1년이 지났으므로 지금쯤은 감옥에서 나왔을 법한데 두만강이 얼면 넘어올 수도 있으니 2월말까지 기다리자고 달래서 그때까지 오지 않으면 3월에 한번 시도해보자고 했다.

 

20001225일 아침, 애들을 다 데리고 그 지역에 하나뿐인 조선족교회에 찾아갔다. 십자가 옆에 앉으니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머지않아 남한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이 되지 않고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아내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일주일 후인 200112일 연변에 아내가 돌아왔다. 기차역 광장에서 난 아내를 얼싸안고 몇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이렇게 우리가족 다섯 식구는 다시 함께 모여 생활하게 되었다. 19개월만의 만남이었다.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생사여부를 알 수 없었던 그 이산으로 하여 우리 가족은 피도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 이산, 그것은 약이 없는 아픔이었으며 아픔 중의 아픔이었다. 그 후 우리는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지금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 살던 때의 어려움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이 모여 단란하게 지내고 있는 요즘 난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욕과 희망이 가슴속에 충만하다.

 

나는 모든 탈북자들이 그들 스스로 원하는 곳에 가서 생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남북면회소가 설치되어 이산가족의 만남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밑거름이 바탕이 되어 하루빨리 통일이 되고, 그리운 부모형제가 얼싸안고 행복하게 살아갈 그날을 그려본다.

 

20034월 김봉수

 

 

2006-02-20 13:36:59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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