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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자유와 풍요속에 홀로 서기

작성년도 : 1999년 63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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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풍요속에 홀로 서기

- 김승철

 

 

"개똥 밭에 뒹굴어도 저승보다 이승이 낮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인지 북한을 떠나 러시아에 벌목을 갔다가 전혀 다른 세상천지를 보고 좀 사람답게 살고 싶어 탈출했었다. 그후 러시아의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며 살길을 찾다가 남한으로 온지도 이제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그 세월동안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처음 김포공항으로 들어설때에는 '이제는 북한에 잡혀갈 위험은 없다'는 안도감으로 몇 년간의 피말리는 긴장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니 살 것 같았다. 긴장이 풀어진 나에게 남한의 물질적 풍요로움이 온갖 환상을 불어넣었다. , 이렇게 물건이 많은 나라도 있구나, 수퍼에 가면 온갖 먹거리들이 가득히 쌓여 있다는 것이 그때는 어째서 그렇게도 신기하던지...

 

북한에서 양복 한 벌을 갖고 네 계절을 지내고 늘 배급쌀이 모자라 배고픈 생활만 해왔었다. 남조선이 발전했다는 소문만 들었지 이처럼 잘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사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처음에는 남한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다만 잡혀갈 신변의 위협이 없이 편안하고 내 마음대로 살 수만 있으면 될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발전되고, 모두가 잘 살고(처음에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잘 사는 것으로 보였다.) 상품이 가득한 세상을 접하고 보니 욕심과 야망이 살아났다. 신문과 텔레비젼 방송으로 보여지는 남한을 보며 나도 '재쏘'(러시아 벌목장)에서 일하던 것처럼 열심히 일해서 한 5년쯤 되면 1억원을 벌어보리라고 겁없이 계획을 세웠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주는 월급은 한달에 70만원이 조금 넘는 정도. 보너스까지 합하면 한달 평균 봉급이 110만원 정도였다. 아침 6시 반쯤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일해서 버는 돈 치고 '너무 적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고 생활비를 쓰고 나면 도저히 계획을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북한에서 결혼 후 4년을 부모집에 얹혀 살았던 나에게 임대집은 너무나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무덤같았다. 저녁에 퇴근길에 올라 열쇠를 열고 들어가면 텅 비여있는 집, 누구도 반겨주지 않고 제대로 된 맛있는 음식도 준비되어 있지 않는 집은 정말로 외로웠다. 어떤 때는 러시아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했다. 피곤함을 못이겨 옷을 대충벗어 놓고는 잠들었다가 늦게 일어나 대충 끓여먹으니 서글펐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가슴아픈 것은 북한에 있는 부모와 가족과 형제들이었다. 텔레비젼에서 보여지는 굶주린 사람들과 두만강가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보며 혼자만 와서 잘 살고 있다는 괴로움과 죄책감으로 항상 고민해야 했다. 이러다가 통일이라도 되는 날이면 돈이라도 벌어서 가족들에게 지은 죄를 갚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돈을 벌려 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북한사람이라고 호기심을 나타내더니 다음에는 무엇인가 등뒤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멸시와 같은 열등감이 나를 항상 괴롭혔다. 처음 회사에서 일할 때 였다. 나는 북한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한자를 좀 알고 있었다. 어느날 신문을 보는데 나보다 나이가 적은 직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승철씨, 한자를 볼 줄 알아요?"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남한은 법치국가이다. 못살고, 못먹고, 못입고 김일성에게 저항도 못하고 굶어죽어가는 북한 현실이 남한사람들에게 나를 남한에서 2등 국민으로 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다. 장사를 해보고도 싶고, 식당을 해보고도 싶고, 남한의 대학을 졸업해보고 싶고.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깊이 해보면 남한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물렁물렁하고 허술한 나라가 아니었다. 또 언제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그런 일에 성공할 자신도 없었다. 한때는 안보강연을 다녀서 버는 돈에 안주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자꾸 새사람들이 오는데 일생동안 안보강연을 한다는 담보도 없었다. 다만 임시 방편이었던 것이다.

 

힘든 것은 그것뿐이 아니였다. 남한사회의 온갖 나이트클럽이니 카바레니 하는 유흥거리들이 유혹하고 괜찮은 자가용을 굴리기도 싶었다. 성적인 충동을 못이겨 아가씨들이 유혹하는 곳에도 가고 싶었고 또 가보았지만 진실된 기쁨과 만족이 없었다. 그렇게 한 번씩 가고 쓰고 할 때마다 타락하게 되고 돈을 벌고 남한사회에서 멋있게 성공해서 통일되면 고향으로 가리라던 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남한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라고 해서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따라다녀서는 돈을 벌수가 없다'고 말한다. 정말로 생각뿐이었지 나는 돈을 벌수가 없었다. 남한이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나는 아무런 지식도 재간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처음에 북한에서 왔다는 것 때문에 텔레비젼과 사회단체에서 관심을 돌려주고 띄워주고(지금은 그런 것이 거의 없지만) 해서 현실을 잘 몰랐던 것이다.

 

내가 남한에서 살면서 제일 몰랐던 것은 돈과 내 삶 혹은 인생과의 관계를 잘 몰랐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나에게는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버는 것만이 성공이고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이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또 돈을 벌어야 북한에 있는 부모와 가족과 형제들에게 내가 지은 죄를 보상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말하자면 돈이 나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한 사회는 나쁜 사람도 곁에 있고 좋은 사람도 곁에 있다. 남한에서 나에게 고마운 충고를 주고 나를 위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나는 내 생각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한 기술을 배운다기보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정말로 내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또 내가 내 자신을 책임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물우에 뜬 기름같은 존재인 북한사람이 남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처음에 남한 정부가 마련해준 직업이 월급이 적다고 1년만에 그만두었었다. 금방 입사한 20대의 신입사원과 같은 월급을 받고 또 그렇게 일해서는 도저히 돈을 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4개월을 놀았다. 남한에서 말하는 '백수' 생활을 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내가 무슨 재간이 있을 것인가.

 

사람은 항상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뒤를 돌이켜보고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곰곰히 느껴보아야 한다. 그냥 되는대로 젊음 하나만 믿고 살다가는 능력껏 살아가는 남한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젊음을 잃게되면 인생도 잃을 수밖에 없다.

14개월동안의 백수 끝에 내가 깨닳은 것은 내 자신이 내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실을 인정하고 차분하게 배우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장사를 해보지도 못한 사람이 째일대로 째인 남한사회에서 장사를 해보아야 성공할 확률이 적은 것은 뻔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내 깨달음이었다.

 

또하나 깨달은 것은 돈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내가 처한 현실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지금 차도 없고 핸드폰도 없다. 처음 남한에 왔을 때 같이 있던 친구들이 나를 보고 지독한 깍쟁이라고 흉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에는 개의치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천원을 가지고 하루를 기쁘게 보낼수도 있고 10만원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나일뿐이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차례진 월급을 가지고 행복하게 느끼고 살 수 있도록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노력했다.

 

자신의 생각과 습성을 바꾼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풍족하지 못한 조건에서 내 자신이 만족스럽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살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통일을 대비하고 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적은 금액이지만 열심히 저축하고 자신을 준비한다. 남한사람들과의 경쟁에서도 이기고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도 승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승자의 기준은 돈도 아니요, 사회적인 성공도 아니다. 내가 훗날 내 자신을 돌이켜 보았을 때 "그래 나는 열심히 살았어"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사는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러시아 벌목장에 갈 때 들은 말이 있다.

 

"재쏘가면 아무리 못 되어도 세 번은 돈을 벌 기회가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지만 내 인생을 훌륭히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배운다면 언젠가는 차례질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기회를 잘 활용하여 더욱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98월 김승철 (현 북한연구소 연구원)

 

 

2005-12-21 13:17:56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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