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분실사건과 누명 - 최정화
작성년도 :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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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분실사건과 누명
- 최정화
최정화(전 함경북도 회령시 가정부인)
엄격한 조직생활과 통제, 그리고 서로를 감시하고 경계하는 속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불신이 어둡게 드리워 있는 곳이 북한이다. 하지만 그 숨막히게 옥죄이는 더러운 수령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 정체를 숨긴 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일성, 김정일을 욕하는 낙서, 정치적인 행사장에 전기선을 끊기도 하고 김일성의 초상화를 없애버리기도 하고 또 쿠데타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 덕에 우리는 누명을 쓰고 온 가족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잘못될 가봐 불안에 떨며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해놓고 남에게 피해를 주냐"고 욕설도 퍼부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북한의 우상숭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다. 우상숭배에서 기본인 초상화를 지키기 위해 활활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꺼내오기도 한다. 가장 소중한 자녀까지 잃으면서 말이다. 사고로 군 병실에 수류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 초상화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 가며 수류탄을 몸으로 막는 사람들이 바로 북한 사람들이다.
한국 사람들은 세상에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하냐, 그건 미친 짓 이라고 경악하거나 웃을지 몰라도 우리말도 배우기 전 어린 나이부터 우상숭배를 먼저 배웠기에 그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으며 1년에 한 번씩 주는 사탕, 과자 한 봉지에 감격해서 고맙습니다 하고 눈물짓고 수령이 있어야 나라도 인민도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 사람들로서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지 않고 충성이라고 여기고 거기서 자긍심을 느낀다.
모든 외부세상과의 소식을 차단하고 있는 북한 땅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경험하기 전에는 북한이 전형적인 수령독재사회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남편은 회령 크라프트지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두꺼운 종이와 포장지를 생산하는 공장인데 그곳에서 운수작업반 반장으로 일을 하였다.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은 "우리 공장 어느 작업반에서 수령님 초상화가 분실 돼서 요즘 공장분위기가 굉장히 날카롭게 돌아가고 사람들 얼굴이 다 굳어지고 말이 아니오. 어디 가서 함부로 이런 일을 발설하지 마오. 정치적으로 큰 손실이라 소문나면 절대 안 되니까 말이오" 라고 하였다.
그 말에 "아니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대요. 잡히면 어떡하려고, 그 사람은 이제 발각되면 죽겠구만요" 하고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글쎄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초상화 사건 혐의가 남편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남자 두 명이 우리 집에 찾아와 초상화 보위사업정형(초상화 관리 상태를 말하는데 북한에서는 가끔씩 가정집으로 초상화청소 정형에 대한 검열을 나오곤 한다)을 검열하려 다닌다며 초상화를 어디서 수여 받았는가, 본래 천연색이었는가 고 이것저것 꼬치고치 캐물었다.
그들이 왔다간 다음 날 같은 인민반에 사는 가까운 이웃인 조정옥과 이순실이 와서는 "언니, 보위부에서 우리한데 찾아왔는데 이 집에 있는 초상화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내막을 잘 알아내라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들의 말이 심상치 않아요" 하고 알려주었다.
너무 기막히고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일이었다. 우리들 마음은 청백하지만 있는 죄, 없는 죄 다 뒤집어 씌어 죄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만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만도 여기지 않는 험악한 이 세상에서 누명을 쓴다는 것은 언제 어떻게 정치범수용소로 갈지 모르는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런 세상에서 생떼 같은 동생을 잃고 삼촌도, 이모도 잃은 데다 남편이 말도 안 되는 간첩누명을 쓰기도 하고 또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온갖 고생 다해가며 살아온 우리들이기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주시하는 북한의 독재정치를 너무도 잘 알고 당해온 터이라 떨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보위부에서는 동네 사람들 외에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홍씨를 밀정으로 우리 집에 보내어 초상화에 대한 내막을 다시 알아보게끔 하였다. 그 여자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놀러온 행세를 하며 초상화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나는 그런 그가 얄밉고 화가 치밀어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히 내놓고 말하라, 보위부에서 보내서 오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리고는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제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 때가 있으니 함부로 성한 사람잡이를 하는 것이 아네요"하고 쏘아 붙였다. 홍씨는 얼굴이 벌개져서 당황해하며 자기는 보위부에서 시켜서 마지못해 한 짓이라고 변명했다.
그 문제로 우리 부부에게만 감시를 붙이고 조사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갔다 오후가 되어 집에 돌아온 작은딸이 얼굴에 불안감이 잔뜩 실려 가지고 말했다. "어머니, 오늘 학교에 어떤 남자 세 사람이 날 찾아왔었어요." 그 말에 그만 놀라 정신이 번쩍 들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따져 물었다.
사연인즉, 학교에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교무부장이 불러내서 교무부장실로 갔더니 거기에는 허우대가 큰 남자 셋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책상에 걸터앉은 사람이 이제부터 묻는 말에 솔직히 말해야 용서받을 수 있다며 아버지가 초상화를 언제 가지고 왔느냐, 언제부터 집에 천연색초상화가 있었느냐 하고 따지고 책상을 치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화가 날대로 나서 다음 날 공장 담당 책임 보위지도원을 만났다. " 왜 내게 그런 당치도 않은 누명을 씌우는 거요.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를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목적이 무엇이요. 나는 떳떳하기 때문에 군당에라도 찾아가서 해명을 하고야 말 것이요"고 들이대고 따져 물었다.
앉아서 항의하는 남편을 쳐다보고 있던 보위지도원은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김동무네 집에 갔던 사람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이어서 잘 몰라 한 일이니 이해하라고 하였다. 사람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조롱하고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너무도 태연한 자세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이는 "어느 때는 간첩이라 하더니 인제는 또 반동으로 몰아 사람을 잡으려 한다니, 내가 이런 일 당하자고 16살에 의용군에 입대하여(북한에서는 의용군에 징집되었어도 징집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총을 잡았나, 억울하고 분해서 못살겠다"며 나지막한 소리로 분통을 터뜨리며 가슴을 쳤다. 식구들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보위부임무를 받고 우리를 감시하던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보위부의 입과 눈 노릇을 하는 그들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보위부에서 시키는 일이라 안 하겠다고 하면 안 한다고 딴 지를 걸어 저희들 가정에 피해를 주게 될 것 같아 감시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마지못해 했을 것이다.
이웃끼리 정을 나누고 가까이 지내면서도 고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서로 감시하고 그로 인해 서로 미워해야 하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케 하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이것이 바로 북한의 현실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참고 현실을 직시하는 수밖에 없다.북한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착취 받고 압박 받는 곳에는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은 남한 자본주의 사회를 놓고 만들어진 말이지만 도리어 북한의 독재자들에게, 인민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명언이다.
그 후 남편은 그 공장에 더 있고 싶지 않다며 회령 편의협동조합 기계수리공으로 직업을 옮겼다. 딸들 셋은 혼기가 차 맏딸은 강원도 원산으로, 둘째는 함경북도 나진으로, 셋째는 회령에 시집을 보냈다. 고생 속에 자란 딸들이었지만 부족 되는 것이 너무 많은 어려운 살림이어서 첫날 옷(한복) 한 벌 제대로 해 입히지 못하고 혼수도 변변히 갖추어 보내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딸들을 시집보낼 때마다 남들처럼 해 보내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 한숨만 내쉬었다.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건 배후자를 선택할 때도 가정성분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노동자들이라도 가정성분이 좋거나 집안에 간부가 있으면 당연히 약혼대상자 성분에 대해 시안전부나 보위부를 통해 사전에 요해한다.
만약에 모르고 결혼했어도 자기 집안 발전에 지장이 된다고 이혼을 시키거나 당사자 서로가 헤어지기 싫어서 이혼을 하지 않으면 직위에서 해임시키거나 심하게는 농촌이나 탄광, 광산으로 추방을 보낸 실례도 있다. 북한 밖에 없는 이런 특위의 혼인조건 때문에 딸들도 외면 당하고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딸들도 힘들었겠지만 지켜보는 우리 부부도 가슴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결혼이라고 하면, 결혼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먼저 성분 때문에 상대방에게서 순간에 외면 당하는 것에 대한 고통이다. 성분이 안 좋은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혼을 한다. 어찌 보면 같은 처지여서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에 더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편할지도 모른다.
2003년 11월 탈북자동지회 회보 "탈북자들" 2003년 11월
2004-11-19 20:53:08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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