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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을 만난 사람들 - 박수현

작성년도 : 2004년 696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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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하기를 사람은 살면서 세 번의 좋은 기회가 온다고 하였다.그런데 나에게는 세 번의 기회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행운의 기회가 왔으니 그것은 한국으로의 귀순이었다. 중국 친척집을 방문하는 친구를 따라 1993년 10월 두만강을 건넌 것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북한에서는 갈매기처럼 이름있는 자전거를 하나 장만하는 것이 최대의 꿈인데 중국땅에는 갈매기급의 자전거들이 그 넓은 도로에 꽉 차서 다니고 있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던 중국사람들이 "한국은 우리보다 백배는 더 잘 살고 있다"고 한 말에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1993년 10월중순 드디어 한국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내가 한국에 와서 맨 처음 간 곳이 목욕탕이었다. 목욕탕에 들어선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선물중에서 가장 귀하다고 하는 칼라TV가 목욕탕에 켜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남녀가 함께 목욕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도저히 남자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배가 나왔는지 오늘, 내일 애 낳을 임산부들 같았다. 어른이 배가 나온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었지만 애들이 배나온 것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사람들을 열심히 쳐다보았고 그사람들 역시 나를 마치 영양실조 걸린 아프리카 사람인 것처럼 쳐다보았다.

북한주민들은 잘 먹어서 배가 한번 나와보는 것이 소원이다. 아마 북한 사람들에게 한국사람들은 먹고 살찌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고 하면 거짓말쟁이라고 얻어맞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북한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면 "몸이 났다"(살이 쪘다)고 하는 말을 제일 듣기 좋아한다 한국으로 올 때 함께 왔던 한 친구는 자기 몸이 개그맨 김형곤 같이 되어간다고 너무 좋아한다

북한사람들에게 한국이 아무리 좋다고 입 아프게 떠들 필요가 없다. 그네들에게 뼈에 와 닿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데 나는 그것이 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통일을 위해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기름이 철철 흐르는 배가 될 것이다 당부하건대 불쑥 나온 배를 고혈압이다, 중풍이다 하면서 구박하지 말고 통일을 위한 보배라고 생각하시기를...

한국에서 처음본 TV프로는 어떤 연예인이 장애자 보호시설에 가서 수족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연예인은 탤런트 김혜자였다.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한국에서도 북한에서처럼 장애자를 한 곳에다 수용하여 밖으로 못나가게 철저히 통제를 하는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다보니 의외로 장애자들이 많았다. 나는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서울에 장애자들이 이렇게도 많아서 되겠는가 걱정스러웠다.

북한의 수도 평양에는 장애자들이 살 수가 없다. 한때 평양에서 장애자를 둔 가족 모두를 지방으로 이주시킨 적도 있다. 그리고 장애자는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장애자들이 일반인들과 똑같이 대학에도 다니고 각종 운동경기 뿐만아니라 올림픽에도 나간다고 하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북한의 장애자들에게 이런 세상이 있다고 하면 과연 믿어나 줄런지...

한번은 친구와 함께 시내구경을 나갔다. 우뚝선 백화점도 웅장했지만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은 일류급이었다. 이런 고급품들을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즐거웠다. 그렇게 몇군데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신문들이 쭈욱 꼽혀있는데서 한 장을 뽑아들고 가는 것이었다. 친구를 따라 한참가다 보니 버스 토큰을 파는 가게 앞에 조금전 친구가 신문을 뽑아간 곳 보다 더 큰 진열대에 여러 가지 신문이 가득 꽂혀 있기에 아무 생각없이 신문 한 장을 뽑아 팔굽에 끼고 친구를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어이어이"하는 소리와 함께 도끼눈을 한 50가량의 아저씨가 뒤쫒아 오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누구보고 그러나 싶었는데 그 사람은 정확히 나를 지목했고 그 순간 나는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졌다. 옆에 있던 친구는 아저씨에게 죄송합니다라고 하면서 얼른 내가 들고 있던 신문을 돌려주었고 당황하고 있는 나를 쳐다보면서 껄껄거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친구가 뽑은 신문은 지역정보지인 벼룩시장이었고 내가 뽑은 것은 일간지 스포츠 조선이었다

1995년 3월에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생활이 너무나 문란스럽게 보였다 대학생들은 옷차림부터 아음 내키는 대로였다. 찢어져 너덜대는 청바지, 너무짧아 쳐다보기가 아슬한 치마, 솔직히 그런 것을 쳐다보노라면 가슴이 벌렁거려 공부가 제대로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무슨 허벅지 경연대회를 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나만 그런 것 같고 남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은 학교에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라 마치 공원에 놀러온 사람들 같았다. 시퍼런 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잔디밭에 남녀가 네 살, 내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꼭 붙어 앉아 있거나 아예 남학생이 여학생의 허연다리를 베고 누워서 뭐라 수군대고 있는 것이었다.

북한의 대학생들은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 하고 수업시간에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다. 그리고 학생규찰대가 있어 늦게 등교하는 학생들은 화장실 청소 등 처벌을 받는다. 또한 연애를 하다 발각이 되면 이유불문하고 퇴학조치 당한다. 그러니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한국 남녀대학생들의 지나친 유희장면들을 볼 때면 아직까지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가 한국에 온지도 그럭저럭 7년이란 세월이 지나간다. 그동안 생활하면서 항상 나를 괴롭힌 것은 자나깨나 북한 땅에 계시는 부모님들과 형제들 생각이었다. 장가들어 아이까지 있게되니 더더욱 마음은 북에 두고온 가족으로 향했다. 그러던중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어떤 사람에게 가족들 소식을 전해들었다. 나는 각고의 노력끝에 형님과 부모님 그리고 막내동생 뿐만 아니라 연락이 없었던 셋째마저 1999년 2월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지금 나는 경희대학교 한의대 본과 3학년이다. 형님은 식당을 차려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려고 하고 있다. 고향이 강원도 춘천인 아버지는 사촌형제들과 이모님들을 찾으셨고 10년 넘게 앓고 계시던 담석증도 수술을 받아 고통에서 벗어나셨다. 말년에 인생의 기쁨을 맛보면서 매일매일 꿈같은 세상에서 살고 계신다. 그동안 살아오셨던 북한에서의 생활은 악몽이 아닌지 의심을 하시기도 하신다. 참으로 우리가족은 천운을 만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바램이 있다면 학교를 졸업한뒤 한의원을 차려 의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렇게 정착하기까지 많은 관심과 격려를 하여주신 많은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탈북하여 남의 나라 땅에서 고생하는 제2,3의 나같은 사람들이 더는 없었으면 하는 심정이며 그들도 하루빨리 안정된 생활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박수현 한의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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