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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새처럼 날아 나의 결혼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 탁영철

작성년도 : 1999년 522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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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2년 6월 황해북도 봉산에서 3남1녀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도시경 영사업소에서 일하다 8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나 나는 어머니 없는 설움을 겪으며 자라야 했다. 어려움과 고생속에서도 부모있는 학생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89년에는 신의주 경공업대에 입학하였다.

당시 내가 바란 것은 오직 하나, 졸업후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것과 더불어 집안을 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던 94년 9월 남한방송을 청취한 사실이 탄로나 보위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북한을 떠나기로 하였다. 같은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이던 남동생과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중국으로 탈출하여 97년 5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탈북을 결행한 3년간의 세월...... 중국공안과 북한 보위부에 붙잡히기를 몇 번, 또 다시 탈출, 쫓기는 마음으로 긴 밤을 보내던 나날들! 사랑하는 동생이 또다시 붙잡혀 북으로 끌려 가고 나는 남한으로 귀순하는 역사의 비극적인 운명들! 입국후 엄마 없이 내 손으로 키운 동생을 데리고 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에이는 듯한 슬픔을 맛보았다.

한국에 온지 2년,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의 심정으로 적응에 힘썼다. 정신적인 방황도 있었고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떠나온 부모형제를 생각하며 탈북당시의 심정으로 마음을 다지곤 하였다. 북한에서 못 받은 대학졸업장을 받기 위해 대학 기계공 학과 3년에 편입하였다. 직업도 없이 학교를 다니겠다는 것이 무모하게도 보였지만 무작정 부딪혀 보기로 하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수강 신청하는 날, 나도 소위 북한 대학에서 컴퓨터를 배워 좀 안다고 자부했는데 인터넷(인터넷은 문외한)으로 수강신청을 하라는 것이었다. 적지 않이 당황스럽기도 했고 자존심도 상하였다. 창피를 무릅쓰고 북한말로 옆좌석 학생에게 물어 겨우 수강 신청을 마쳤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과목은 북한에서 배운 것과 같은데 교수님의 강의내용을 알아들을수 없었고, 어둠속의 밤거리는 북한에서 교육받아 왔던 썩고 병든 자본주의의 참 모습처럼 보여 받아들이기 힘들었 다. 그러나 이 사회는 자신의 일은 자기가 찾아서 하는 사회이고 또한 열심히 살다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과 그만한 대가가 있는 사회라를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남한에서 생활하면서 웃지 못할 경험도 수없이 했는데 혼자 수영장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샤워실에서 남자들이 노팬티로 샤워를 하고 있어 여기는 남자전용 목용탕 겸 수영장으로 오인, 알몸상태로 기세당당하게 수영장안에 들어갔다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남한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외로움 극복이 아닐까 싶다. 방과후 돌아간 집에는 반겨주는 사람 한 명 없고 썰렁함이 감돌 뿐이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청소하고, 벽을 상대로 대화하는 고독한 시간, 정말 싫었다. 고독을 잊기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 거나 주말에는 건설공사장이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몸을 혹사했다. 그러다가도 가족생각이 나면 술에 취해 엉엉 울기도 했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피하기 위해 가정을 빨리 이루는 것이 빨리 정착하는 길이고 성공의 밑천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진 것 없고 혈혈단신인데다 잘 생기지도 못한 귀순자 총각에게 누가 시집이나 오겠는가?

자괴감만 쌓여갈 뿐이었는데... 모 이벤트회사의 주선으로 맞선 본 예쁜 처녀가 나의 모든 것을 감싸안고 10월이면 내곁으로 온다. 결혼이란 말이 오가면서 제일 가슴아팠던 것은 주변사람이 "왜 하필이면 북한남자냐?"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을 할 때였다. 그 때마다 나는 혼자 뇌까린다.

외국인하고도 결혼하는데 같은 동족인 내가 북한출신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하나? 지켜봐라! 내가 꼭 남한남자보다 몇 배 더 행복하게 해줄테니까...라고 말이다.

말못할 고생과 어려움도 있었지만 교육과정이 다른 대학을 2년만에 졸업하게 되고 예쁜 아가씨와 결혼도 하게 되다니...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고 자위하며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북한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를 모시고 결혼식을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어쩔수 없는 일, 나의 이 행복한 소식을 새라도 되어 날아가 알려 드릴 수만 있다면... 결혼이란 대사 앞에 아버님과 형제에 대한 애절한 마음에 남몰래 뒤돌아서 눈물을 훔친다.

앞으로 통일2세도 많이 낳고 싶고, 내 삶의 날개를 활짝 펴 성공된 삶도 살고 싶다. 통일이 되는 날 아들, 딸 손잡고 제일 먼저 형제들에게 달려가 열심히 살아온 모습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로인해 고생했을 형제들에게 내가 누린 모든 행복의 일부라도 나눠드리고 싶다.

1999년 10월 탁영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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