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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늦깎이 중학생의 힘찬 출발" - 임혜린

작성년도 : 2005년 638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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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중학생의 힘찬 출발"

- 임혜린

 

 

새로운 환경

 

중국을 떠나 한국에 입국한지도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부모님을 떠나 단신의 몸으로 입국한 나는 사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아신세나 다름없었다. 어린 몸으로 낯선 땅에 와 홀로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사로잡혀 나는 며칠 밤을 눈물 흘리며 지낸 적도 있었다.

 

이곳에서 나의 신분은 학생이다. 그것도 같은 나이또래의 친구들보다 3년이나 늦은 늦깎이 중학교 3학년이다. 탈북하여 입국전까지 중국에서 5년 동안 나는 늘 숨어 지내느라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의 뒤쳐진 공부를 만회하고 새로운 환경에 하루빨리 정착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나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하나원을 졸업할 때 선생님께서 나한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혜린아, 보린원에 가서 정말 열심히 생활해야해. 네가 그곳에는 탈북자로서는 처음 가기 때문에 잘해야지, 만약에 마음을 열지 않고 방황하거나 정착하지 못하면 나중에 너 같은 사람이 보린원으로 가고 싶어도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네가 잘 해야 해, 알았지? 선생님은 혜린이를 믿어! 선생님 실망시키지 않을거지.’

 

이렇게 선생님께서 당부하시던 말씀을 나는 항상 기억하며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지금은 학교공부도 열심히 하고 보린원에서 실시하는 행사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또 집에서는 동생들을 잘 챙기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다. 이렇게 열심히 지내다 보니 주위 분들의 격려와 칭찬을 듣게되어 더욱 더 흥이 난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인 보린원에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거나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자식을 양육할 수 없게된 가정의 아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살도 채 안 된 신생아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있다. 90명의 아이들과 23명의 선생님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곳은 나에게는 제2의 가정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한 방에서 10명씩 같이 지내다보니 불쾌한 일들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일들이 더 많다. 때로는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나고 짜증도 나지만 또 그 아이들 때문에 웃기도 한다. 여기 있으면 외롭지는 않다. 만약 내가 이곳에 오지 않고 혼자 지내고 있다면 외로움에 사로잡혀 혹 탈선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 들어와도 선생님과 동생들이 반겨주니 마음만큼은 한결 따뜻하다.

 

내 고향 북한에도 하루빨리 이런 시설들이 세워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거리에서 방황하거나 구걸하는 아이들도 없을 것이다. 북한에서 부모님을 잃고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북한에 있을 때 한국은 자본주의라서 절대로 남이 죽든 말든 간섭하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대한민국에 와 보니 오히려 북한보다 사회복지 시설들이 한층 더 잘 갖추어져있다. 또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도무지 무엇이 사회주의이고 자본주의인지 전혀 모르겠다. 다만 이념을 떠나 인간이라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만큼은 꼭 누리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곳 보린원에 오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나를 믿고 이곳에 보내 주신 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훗날 꼭 성공해서 나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고 싶다. 이런 나의 꿈을 향하여 조금씩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학교생활

 

학교생활은 정말 재미있다. 친구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며 공부할 수도 있고, 친구들과 어울려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어서 좋다. 1학년 때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는 못했다. 친구들이 나한테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때 나는 친구 보다 학교생활에 빨리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친구들을 사귀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지금 당장 공부를 열심히 해도 다른 친구들을 따라 잡기 힘든데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면 공부에 소홀해질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난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나를 조금만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 이후 난 늘 혼자였다. 쉬는시간에는 매점도 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놀지도 않았다. 혼자서 학원 숙제를 하거나 문제집을 풀면서 복습을 했다. 이렇게 친구들을 멀리 하면서까지 공부해서인지 처음에 본 중간고사 성적은 생각보다 잘 나온 편이었다.

 

이곳 아이들은 입학하기 전에 과외나 학원을 다니면서 중학교 1학년 과정을 미리 공부하고 온다고 했기에 걱정이 앞섰다. 하나도 모르고 학교에 들어간 나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노력한 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공부하는 방법을 찾아가며 효율적으로 공부하려고 노력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사회와 과학 성적을 올리려면 사회는 자기 전에 한 시간씩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을 소리 내서 읽어보고 과학은 노트정리를 하면서 외우며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방법을 쫓아 나는 단 하루도 빠짐 없이 사회 교과서를 읽고 과학은 노트정리를 꼼꼼히 하면서 암기했다. 수학은 학교에서 배운 것 외에 문제집을 하나 더 풀었고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학원선생님이나 학교 선생님에게 찾아가 물어보았다. 이렇게 매일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정말 기말고사 때는 사회와 과학, 수학 성적이 많이 향상됐다.

 

내가 지금까지 학교생활을 하면서 공부해본 결과 정말 공부는 내가 한 만큼 결과가 나왔다. 성적이 더 잘나오지도 않고 적게 나오지도 않았다. 딱 내가 한만큼 나왔다. 정말 신기했다. 어떨 때는 내가 계획했던 점수가 나오지 않아서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올라가니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중3이 되었으니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고 집에 와서도 좋은 언니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용기를 갖고 지난날의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현재의 난관을 극복할 것이다.

 

내가 열심히 생활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주위 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자기가 맡은 일에 꾸준히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해 나갈 것이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되었으니 공부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학교생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멋진 친구들과 함께 평생 기억에 남을 중학교 추억을 만들고 싶다.

 

그리운 어머니

 

지금 어머니는 북쪽에 계신다. 사람들은 나를 작지만 다부지고 강단 있는 아이로 생각하지만 나도 혼자 있을 때는 늘 어머니 생각에 눈물짓곤 한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싶고 그립다. 다른 아이들처럼 어머니에게 어리광 부리고 감기라도 걸리면 어머니의 손길을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하나뿐인 어린 동생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가족과 함께 있었을 때는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잘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혼자 몸이 되고 보니,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어머니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여태껏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 드린 것이 맘에 걸려 어머니께 편지라도 한 통 써보려 한다. 비록 이 편지가 지금 당장 북한에 계시는 어머니께 전달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어머니께서 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저 어머니의 장녀 혜린이에요.

 

따뜻한 봄 햇살만큼이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 이곳 서울 날씨는 회령보다 춥지 않지만 저의 마음은 항상 꽁꽁 얼어붙어 있답니다. 서울보다 34배는 더 추운 회령에 있을 때도 마음만큼은 따뜻했는데, 이는 어머니께서 저의 곁에 계셔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제가 난로 당번이 되면 어머니께서는 항상 아침 일찍 학교에 함께 가서 난로에 불을 지펴 교실을 따뜻하게 해주셨죠. 그리고 겨울이 되면 춥지 말라고 따뜻한 스웨터를 떠주셨던 어머니의 손길이 지금 너무나도 그리워요. 어머니 언제면 다시 어머니의 그 따뜻한 손길을 느껴볼 수 있을까요? 10, 20, 아니면 50?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벌써 어머니와 헤어진지도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네요. 어머니께서 곁에 있을 때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어머니께서 저의 곁에 계시지 않으니 뒤늦게서야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의 소중함을 깨달았어요. 조금 더 일찍 어머니의 소중함을 깨달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마음고생 시키지 않았을 텐데.....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 씩 한답니다. 지금이라도 저의 철없던 행동을 용서해 주실 수 있으세요?

 

지금 이 시간 어머니는 뭐하고 계셔요? 이 못난 딸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시고 있으세요?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드리지 못하는 이 못난 딸을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께서 아프고 힘들거나 외로울 때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해서 너무나 죄송해요. 그래도 맏딸이라고 의지가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어머니의 힘이 되어주지 못하네요. 그저 어머니께서 늘 건강하시길 간절히 기도할 뿐 저로서는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네요.

 

어머니 제 걱정은 마세요. 저는 아주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비록 가족과 함께 지내지는 못하지만 저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딘가에서 어머니께서 늘 저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고 믿고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 저 뒤늦게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그 누구보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교육제도가 많이 다르지만 적응하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아요.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너무 친절해서 학교생활이 즐겁기만 해요. 이번이 제가 공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요. 어머니 저의 힘이 되어 주실 수 있으시죠? 항상 저를 응원해 주실 거죠? 어머니의 응원 한마디면 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인내할 수 있어요.

 

저는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좋은 대학에 들어갈 거예요. 그래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어요. 꼭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될 거예요. 저를 믿으시죠? 어머니 많이 힘드셔도 딱 십년만 기다려 주세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통일도 꿈속의 일만은 아니겠죠. 통일이 되지 않는다 해도 남과 북이 지금처럼 부모 자식을 만나지 못하게 갈라놓진 않을 거여요. 꼭 훌륭한 모습으로 어머니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그 날까지 건강하셔야 되요.

 

통일을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은 이만 쓸게요.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딸

 

임혜린 올림

 

 

나의 꿈

 

나의 꿈은 한의사다. 원래는 소아과 의사가 꿈이었는데 산과 들에 나는 풀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한의사가 될 수는 없지만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고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꼭 한의사가 되어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아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큰 병원을 세워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싶다.

 

너무 큰 꿈 일수도 있지만 열심히 생활하면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본다. 운명이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지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이 사회에 꼭 필요한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20053월 임혜린 씀

 

 

2005-06-13 10:24:1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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