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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유고(遺稿) 4-꿈으로 보이는 7년

작성년도 : 2004년 522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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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遺稿) 4-꿈으로 보이는 7

 

 

유고

 

꿈으로 보이는 7

 

남광수

 

4. 인간 방목지(20005-20021)

 

교화소로 떠나기 전날 나는 어머니와 동생들, 삼촌들을 만났다. 모두가 나의 앞날을 걱정하며 눈물지을 때 나는 그들에게ꡒ나는 죽지 않는다. 꼭 살아서 돌아올 테니 걱정말고 기다리라ꡓ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기차와 자동차를 갈아타고 몇 시간만에 내가 도착한 교화소는 겉 모습부터 어마어마하였다. 5m는 실히 될 콘크리트 담장이 빙 둘려 처져있고 그 위로는 또 전기 철조망이 늘여져 있었다. 교화소 대문도 굉장히 큰 철문이었는데 전기로 열리고 전기로 닫혔다. 수인들에게 우정 공포감을 주기 위하여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부터가 온 몸에 소름이 끼치게 공포감을 주었다. 교화소 담장 네 귀에는 자동총을 휴대한 경비대가 주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닌 죄인이었으므로 접수하는 것도 영수증으로 처리되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어떻게 사람을 짐승처럼 영수증으로 처리하는 것일까? 마음속으로부터 반항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교화소 안에 들어서니 일하러 나가는 죄수들이 30여 명 가량 줄을 지어 마주 나왔다. 모두 화목을 하러 가는 죄수들이었는데 옷은 말할 나위 없이 헐었는데다 쇠사슬로 연결된 끌바(나무에 박아서 당기는 도구)를 통해 모든 사람이 한 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니 걸을 때마다 쇠사슬소리가 났다. 몸이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처럼 아룽아룽한 갈비대가 드러나 보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 모두가 마지못해 끌려가는 마소 같았다. 이제부터는 나도 저런 생활을 하게 되겠구나, 생각하니 벌써부터 소름이 끼쳤다.

교화소에 입소하면 순서가 신체 검사를 거쳐 교양실에 들어가고 거시서 1530일 가량 기초교육을 받은 뒤 정식으로 교화반에 배치된다. 나는 15일간의 힘겨운 신입반 생활을 간신히 이겨냈다. 그때는 마침 절기로 보면 씨붙임 철이었으니 모든 힘을 농사에 집중한다고 하였다. 신입반 생활에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 일은 감자 종자를 나르던 일이다. 죄수 매 사람 30kg짜리 종자마대를 지고 60도 경사 300m 산길을 하루에 5번 오르내려야 한다. 헌 옷을 걸치고 한 줄로 길게 늘어져서 무거운 마대를 지고 한치 한치 산길을 톱아 오르다 보면 나도 과연 사람이 옳긴 옳은가, 생각과 함께 고대 노예 사회에서 애굽의 노예들도 바로 이런 식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하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들었다. 주먹보다 작은 밥 아닌 밥 덩어리를 한 개씩 먹고 그런 고역을 하다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만 보였다. 어떤 죄수들은 도중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그 때마다 총을 쥔 경비대들이 앞, , 중간에서 마구 몰아댔다.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실제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었다. 정말로 죽지 못해 하는 일이라 하겠다.

신입반에서는 저녁에 잠 잘 때까지 줄을 맞추어 앉아 공부를 시켰다. 교화생활 준칙, 위생준칙, 인민보안원에게 지켜야 할 예절, 이렇게 세 가지 준칙학습을 시키고 이것을 잘하지 못하는 죄수들에게는 잠을 재우지 않았다. 내가 들어가 있었던 사회안전성 제12 교화소는 모두 4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1과는 본소이다. 2과는 동광 생산지, 3과는 짐승방목, 4과는 감자 농사와 원목 채벌, 이것이 그 구성이다. 12 교화소의 당시 수용 인원은 약 2,500명으로 추산되었다.

마침내 생각하기도 끔찍한 신입반 생활을 끝내고 나는 4과에 전과되어 구내반에서 일하게 되었다. 구내반이란 다른 교화반들과는 달리 과 내부에서 제기되는 일을 하는 작업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교화반의 일은 감자농사와 원목채취가 기본이라면 구내반에서는 과의 내부 일 즉 취사장, 화목조, 단야, 돈사, 나무패기조, 위생원, 잡부일을 하였다. 과의 의원은 당시 250명 가량 되었다. 나는 구내반 담당 보안원에게 선을 보인 후 나무패기조에 배치되었다. 그때부터 15일 정도 화목조가 날라오는 나무를 도끼로 패어 밥을 짖고 온돌을 덥히는데 필요한 화목을 보장하였다.

4과로 배치된지 보름 만인 6월 어느날 나는 갑자기 열병에 걸렸다. 그때 그 교화소에는 열병이 돌아 죽는 사람이 많았다. 먹지도 못하고 고열 속에서 11일 동안 앓으며 죽을 고생을 하였다. 교화소는 인민보안원(안전원)의 승인없이는 약을 쓰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리 중한 병에 걸려도 보안원에게 잘못 보인 죄수는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사람 복이 있다고 할까? 담당 안전원이 처음부터 나를 좀 쓰려고 계획했던 모양인데 내가 열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자 그는 위생원을 불러 나에게 집중치료를 하라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일어나서 조금씩 다니게 되자 담당 안전원이 나를 취사장에 배치해 주었다. 그것 역시 그의 배려였다. 취사장에서 근 열흘 동안 일하였는데 그 나마 몸이 좀 회복되었다.

어느 날 담당 안전원이 나를 불러 건강 상태며 여러 가지를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잡부조장을 인계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잡부조장이란 전체 과의 규율을 책임진 죄수를 말하는데 총적으로 볼 때는 과에서 왕이나 다름없다. 물론 죄수들은 잡부조장한테 꼼짝 못하였다. 잡부조장은 일체 과의 규율과 인원상태 점검, 학습, 일과 생활을 모두 통제하였으며 밥 먹을 때에도 취사장에서 단독으로 먹었다.

그 해 72일 우리는 국가로부터 대사령을 받았다. 죄수 아닌 죄수들이 너무 많으니 다 수용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여 나는 2년을 감형 받았다. 먼저 잡부조장으로 있던 사람이 석방되고 내가 그 때부터 완전히 잡부조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후 8개월 간 나는 다른 죄수들보다 많이 헐한 교화 생활을 하였다. 우리 과에서 일은 안하고 규율만 보는 유급죄수는 나 혼자 뿐이었다. 죄수들이 일하러 나가는 것과(시간) 새로 들어온 인원, 환자 등 모든 죄수들의 인원점검과 죄수들의 범죄 형태, 교화반 배치, 보안원들의 심부름 등 모두 내가 관할하였으며 작업이 끝나고 감방에 가두고 그들을 신검(몸수색)하는 것까지도 내가 관리하였다.

내가 잡부를 인계 받았을 때 과의 실태는 정말 말이 아니었다. 감방은 통나무로 지은 귀틀집이었는데 한쪽으로 기울어져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형편이었고 나무로 만든 기와장도 썩고 바람에 날려 비가 오는대로 새는 정도였다. 또 감방은 감방대로 한심하기 그지없어 이, 빈대, 바퀴가 욱실거렸다. 나무고장이어서 불은 뜨뜻하게 땠으나 소독설비 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죄수들이라고 해도 이러한 외양간 같은 데서 살며 고된 로동에 시달릴 수는 없었다.

나는 잡부로 일하면서도 계속 어떻게 하면 우리 과의 생활 형편을 낫게 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였다. 한편으로는 죄수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던 규율생활도 조금씩 늦추어 주었다. 하루종일 고된 로동에 시달린 죄수들이 감방에 들어와서까지 줄을 맞추고 앉아 있고 강한 규율과 통제 속에 있어야 하는가? 물론 규율을 늦춘다고 보안원들에게 욕은 많이 먹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들이다. 욕은 하고 규율은 세우라고 추궁은 하면서도 나에 대하여서는 눈을 감아 주었다. 죄수들 역시 나에 대해 칭찬을 하였으며 그에 따라 나의 위신도 좀 더 올라갔다.

나는 우리들 죄수들의 생활 개선을 위하여 감방 꾸리기를 과에 제기하였다. 이 제의가 교화소에 승인되자 나는 처음으로 쇠 장대를 들고 기울어 진 감방을 하나하나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기울어진 벽체를 쟈끼로 뜨고 바로 세우고 썩은 나무는 새것으로 교체하였다. 이런 식으로 여러 날 동안 간고분투한 끝에 비로소 당장 무너질 것 같던 감방을 바로 세웠다. 그 다음은 진흙과 톱밥을 섞고 석회를 섞어 벽 미장을 시작하였다. 그 안에서 미장이라고 하면 시멘트는 생각지도 못하였고 조금씩 국가에서 받아 오는 석회로 미장을 하다 보니 질은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개선을 위하여 나는 죄수들에게 더 높은 요구를 제기하였으며 조금만 잘 못하고 하라는 대로하지 않아도 마구 질책하고 때로는 족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역시 석회가 부족하였다. 나는 석회를 자체로 해결할 것을 결심하고 나의 과장에게 제기하였다. 물론 능력이 있는 죄수들과의 토론한 다음에 말이다. 과에서도 반신반의하였지만 승인하여 주었다. 하여 우리는 그것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석회를 자체로 생산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박영순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ꡒ연길폭탄ꡓ을 만들어 냈다고 하지만 우리가 석회를 자체로 구워낸 것도 결코 그것보다 쉽지는 않았다. 아무튼 우리는 정말이지 빈터우에서 석회도 구워내고 다른 모든 것도 창조해 나갔다. 매일 석회를 구워내자 온 미장을 하고도 남아 감방 회칠까지 하였다. 한 마디로 몇 달만에 감방의 면모를 일신시킨 것이다. 이제는 지붕을 교체해야 했다. 우리는 과에 제재기를 놓아 줄 것을 제기했다. 이것도 승인되었다. 물론 보안원들이 자신들의 여러 가지 편의를 위해서 승인했겠지만 어떻든 우리는 제재기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제재기 운전공을 따로 뽑고 원목을 끌어들여 제재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거기서 나온 판자와 각자로 끝내 지붕도 새 지붕으로 바꾸었다.

다음으로 내가 발기한 것이 소독실이다. 사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그 때 우리 수용소에는 정말이지 이 벼룩이 빈대 등 해충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때문에 우리 죄수들은 하루종일 나가 실로 힘에 부친 일을 하고도 돌아와서는 그 해충들 때문에 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하여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문제만은 꼭 해결하여야겠다고 생각했고 여러 차례 제기한 끝에 마침내 허락 받았다. 하여 나는 같은 여러 명의 죄수들과 힘을 합쳐 마침내 작고 아담한 습식소독실을 건설하여 놓았다. 그리고는 매일 교화반 별로 옷 소독, 침구소독을 하여 해충에 의한 고통만은 최대한으로 덜어 주었다.

이렇게 나의 감옥생활은 흘러갔다. 물론 이 기간의 모든 생활이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극도의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죄수들이 많이 사망하였으며 나 역시 성격이 거친 보안원들에게 매를 맞아 머리가 터지기도 하였다, 그때에 서럽고 분하던 일이 지금도 선히 떠오른다.

내가 왜 이 글 소제목에서 교화소를 인간방목지라고 하였는가? 교화소는 일반 구류장하고는 다르다. 구류장에 구류된 죄수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지만 교화소의 죄수들은 밖으로 내몰려 일을 한다. 죄수들이 일할 때는 23명의 자동총을 휴대한 경비대가 따라다니며 감시 통제하고 반항하거나 도주하는 죄수는 즉석에서 사살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교화소의 죄수들은 높이 10cm, 너비 7cm 가까이 되는 콩밥덩어리를 먹으며 일하러 나가서는 풀이건, 나무 뿌리이건, 열매 이건 무엇이든 먹을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주워 먹어 모자라는 칼로리를 보충한다. 하기에 길을 가다가도 낟알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이면 얼른 주워서 입에부터 넣는다. 오죽하면 양배추 뿌리까지 날 것으로 먹겠는가? 구류장의 죄수들은 갇혀 있기에 동물원이라고 한다면 교화소의 죄수들은 방목되는 짐승이나 같은 것이다.

죄수도 사람이다. 교양되고 개조되어 참답게 살라고 교양하는 것인데 이러한 생지옥에서 몇명이나 살아나 교양 되겠는가? 교화소에서는 남에 대한 동정이 자신이 빠지는 함정이라는 말이 통영되고 있다. 죄수는 남을 생각지도 말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수용자를 도와 준 죄로 잡부조장 자리에서 8달만에 해임되었다. 그 죄란 배고파하는 수용자에게 밥을 여러 번 가져다 먹인 죄였다. 이런 광경을 보아온 승냥이 같은 심보의 다른 죄수가 그 사실을 고자질하였던 것이다.

나는 나무패기조에 내려와 며칠 고생하다가 이번에는 담당안전원의 추천으로 구내반을 총 책임진 조장으로 되었다. 내가 구내반을 이끌고 일하던 어느 날 쌀을 지러 본소에 내려갔다.그 때에는 이미 구내반 조장을 하여 거의 6달이 지나서였다. 그날 나는 모든 사업 조직을 해 놓고 직접 10명의 인원을 선발하여 쌀을 지러 내려갔다. 하지만 이 때에 사고가 날 줄이야. 화목조에 나갔던 한 명의 죄수가 도주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는 얼마 못 가서 붙잡혔으나 그에 대한 련대적 책임으로 나는 철직되어 본 소에 있는 락후자반에 내려갔다. 락후자 반이란 교화소에서 죄를 짓거나 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죄수들을 한데 모아 놓은 교화반을 말하는데 제일 힘든 일만 골라가며 시켰다. 여기서 나는 다시 5달 동안 고생하고 겨우 해방되었다.

이때에 내가 고생하던 중 제일 잊혀지지 않던 한가지 사실만 말하려고 한다. 어느 날 나는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조그마한 주머니를 들고 취사장 지붕에 널어놓은 언 감자를 도적질 하러갔다. 취사장 담장을 뛰어 넘어 살금살금 굴뚝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간 후 언 감자를 천 주머니에 쑤셔 넣다가 그만 취사장 죄수에게 들켰다. 그가 고함을 지르자 금방 죄수들이 쓸어 나와 나를 붙잡으려고 날뛰었다. 나는 취사장 지붕에서 다른 지붕으로 옮겨 뛰었으며 나지막한 지붕 우로 다시 뛰어 내렸다. 그런데 그 낮은 지붕이 무너질 줄이야. 그 작은 집은 판자로 만든 사체실(죽은 사람을 넣어두는 곳)이였는데 지붕의 판자가 썩어 그대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그 자그마한 창고가 사체실인 것을 몰랐다. 하지만 ꡒ빠지직ꡓ소리가 나며 내 몸이 그 창고 안으로 떨어지는 순간 발 밑에 무엇인가 물렁물렁한 것이 물큰 밟히는 것을 느끼었다. 무엇인가 예감이 오싹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나는 눈이 뒤집혔다. “으악!“ 이게 뭐야. 입을 쩍 벌리고 죽은 시체가 내 발 밑에 있지 않는가. 시체는 모두 4구가 있었다. 혼비백산하여 나는 죽어라고 도망쳤다. 거기서 간신히 빠져 나온 나는 난로 불에 그 언 감자를 구워먹으며 마음속으로 울었다. ‘꼭 이렇게 해야만 살 수 있는가?’ 그래도 배가 고프기에 훔쳐 온 언 감자는 먹어야 했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나의 교화 생활 2년이 흘러갔다. 교화 생활 시작 2년 만에 나는 또 다시 3년의 대사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교화소 문을 나서면서 나는 침을 뱉었다. 죽어도 이런 곳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과연 어떻게 알랴?

 

 

 

2004-11-19 21:00:18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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